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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리미 May 01. 2024

15. 정자와 난자

민망과 수치의 경계

정자와 난자

   이젠 내 차례다. 아내가 하는 절차와는 비 할 바가 아니지만, 상당히 간단하고 빠른 절차로 진행된다고 스마트한 휴대전화를 통해 알아 두었다. 이까짓 것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은 했지만, 역시나 두렵고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40여분쯤 기다렸을까 내 순서가 되었다. 초조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진료실 문을 천천히 열고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친절하게 눈웃음으로 맞이해 주던 담당 의사는 한 차례 더 신분을 확인했다. 몇 가지 절차상 대답하기 쉬운 질문들을 의례 물었고 난 그에 맞는 대답을 했다.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은 의자에 두고 오른쪽에 보이는 방으로 들어가 기다리라고 의사는 지시했다. 열려있는 문은 아무런 표찰이 없었지만, 별 의심 없이 들어갔다. 약간 어두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간단히 환자들을 검진하는 공간으로 보였고 방 안쪽으로 간이침대 하나와 집기 류, 의료장비가 놓여 있었다. 바로 뒤이어 들어온 의사는 한 손에 투명 비닐장갑을 끼고 낮은 의자에 앉았다. 의료용 장갑이라기보다는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회용 비닐장갑 같아 보였다. 그리고 날 벽 쪽으로 세우더니 아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지와 속옷까지 완전히 내리시고 뒷짐 지고 가만히 계세요.”


   돌 직구 같은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툭 던졌고 아까와 같은 친절함이 아닌 지시나 명령에 가까운 말투 여서 조금 당황했다. 난 앉아 있는 의사 앞에 선 채로 아주 조금 고민했던 것 같다. ‘내려? 말아?’ 남자 앞에서 대 놓고 바지를 내려본 적도 없거니와 이 조용하고 좁은 공간에서 바지 내리고 있는 짧은 순간이 머리에 스쳐 영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냥 의사다. 무슨 검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원래 이렇게 하는 거로 생각하자. 이제 와서 바지 붙잡고 버티면 뭐 할 거야.’ 체념하듯 말없이 조용히 벨트를 풀고 바지와 속옷을 발목까지 스르르 내려 내 몸을 맡겼다. 의사는 그런 나와는 달리 너무나도 익숙하게 비닐장갑 낀 손을 다리 사이로 슥- 들이밀어 고환 밑을 움켜쥐듯 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힘을 주고 다시 빼 보세요. 좋습니다. 한번 더 해보세요.”


   지시에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에 내 것이 잡혀 있었으니까. 침은 왜 꼴깍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됐습니다. 바지 올리고 나오세요.”


   수치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1분남짓 남자끼리 왠지 민망하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목욕탕이나 사우나에서도 남자들끼리 헐벗고 돌아다녀 봤지만 이런 기분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길게 생각할 겨를 없이 짧고 재빠르게 추스르고 무슨 일 있었냐는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다시 자리에 앉아 의사 명패만 뚫어지게 보았고 왜 그런지 눈을 잘 마주치지 못했다. 그때 내 표정이 어땠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덤덤했는지, 혹시나 빨갛게 상기되지는 않았는지. 후자가 아니기를 바라며 의사의 짧은 소견과 다음 절차를 안내받고 나왔다. 후유- 간단한 검사였는데도 진땀이 났다. 행여 누가 볼까 눈치보다 재빨리 다시 대기 의자에 앉았다. 남자가 내 것을 만졌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았지만 처음 겪는 것이다 보니 경험치가 하나 늘어난 것 같았고,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하면 할수록 헛웃음만 나왔다. ‘자식! 다 그렇게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 것을 혼자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1단계 통과!’. 그렇게 나 자신에게 생각을 주입했다.


   이제 본격적인 정자 채취만 남았다. 이곳에 오기 전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보니 나름 사전 조사도 철저히 했었다. 남자는 어떻게 채취하는지, 검사 절차나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혹시 아프지는 않은지 속속들이 찾아보았다. 먼저 시행한 선배님들의 리뷰와 후기들을 대부분 정독했다. 다양한 글들과 경험담이 많았지만 사실 별것 없었다.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댓글들 ‘그냥 빼면 됩니다…’


   “김선호 씨!”

   “네”

   “오른쪽 방 ‘남성 특수검사실’로 들어가세요.”


   표찰을 확인하고 조금 전까지 연습 한 대로 최대한 덤덤한 표정을 유지한 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는 곳마다 표정 관리를 꼭 해야 하는 사람처럼 표정을 생각해 가며 이동했다. 짧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 두 개 오른쪽에 두 개의 방문이 있었다. 정면에는 문 없이 작은 창문 형태의 안내 창구가 보였다. 병원 복장이 아닌 것 같은 복장의 마스크 쓴 여성이 보였고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해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들어오기 전 간호사에게 받은 투명한 플라스틱 컵을 들이밀었다. 신분 확인을 위해 신분증 제출 후 나와 아내 이름, 주민등록번호를 두 차례 묻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우리 이름이 새겨진 스티커를 바로 프린트해 플라스틱 컵에 붙이고는 내게 건넸다. 


   “왼쪽에 보이는 3번 방으로 들어가시고 문을 꼭 잠그세요. 끝나고 나오실 때 컵을 단단히 닫아 저에게 다시 주시면 되세요.”


   여성은 오른팔로 왼쪽 방을 가리켰고 시선 돌려 방을 확인했다. 신분 확인 외에 별다른 절차는 없었고 채취 실 가이드라인인 듯 눈길 한번 주지 않고 AI처럼 안내했다. ‘정액 채취실 3’이라고 쓰인 방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렸다. 마스크 쓴 여성은 내가 저 방 안에서 무엇을 할지 다 안다는 생각에 괜한 민망함이 밀려왔다. 서둘러 들어가 문부터 잠그고 돌아본 방은 한 평 반 남짓 크기로 커다란 안마 의자와 같은 푹신한 의자가 중앙에 놓여 있고 의자 정면으로 25인치 정도 되는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조금 어두웠지만 노란 조명의 스탠드가 밝히고 있어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의자 뒤로 씻을 수 있는 세면대가 갖춰져 있고 왼쪽에는 화장대로 보이는 테이블 위에 쾌적한 공간을 위한 공기청정기와 티슈, 손 소독제가 구비 돼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벽에는 공공 화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롤 형태의 페이퍼 타월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표시된 화살표 방향으로 종이를 툭 잡아 뺐다. 자세히 보니 종이가 아닌 비닐 재질이었다. 비닐을 들고 이리저리 펼치고 보니 큼지막하게 의자 전체 덮을 수 있는 전용 커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위생을 위한 것이라는 배려에 센스 있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남자들이 이곳을 드나들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손에 든 플라스틱 컵을 테이블 위에 신중히 올려놓고 처음이지만 몇 번 해본 것처럼 의자에 위생 커버를 씌웠다. 까맣게 꺼져있는 모니터 옆에 놓인 리모컨을 들고 자연스럽게 빨간색 전원 버튼을 눌렀다. 모니터가 켜지자마자 남자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영상이 이미 재생되고 있었다. 소싯적 서양이니 동양이니 혼자 숨죽여 보던 때와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고, 뭔가 불법적으로 숨어 보던 것과는 달리 병원에서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것을 시청한다는 생각에 더욱 기분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약간 비디오방이 연상되는 구조의 방이었지만 오늘은 목적이 다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혼자 보던 때와는 마음가짐도 달리 가져야 했다. 비록 국내에서는 합법이 아닌 영상이 흘러나오지만 당당하게 임해야만 했다. 문득 여자들은 한 번의 채취를 위해 오랜 기간 몸을 만들고, 관리하고 마취와 시술을 통해 조심스레 하나하나 채취하지만 남자는 아직까지 이런 원초적인 방법밖에 없다는 것에 실소가 나왔다.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전하고 새로운 기술이 나오더라도 남자들이 채취하는 방법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나이 먹고 혼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가도 나름 신성한 마음을 유지하며 채취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허리띠를 풀고  천천히 바지를 내렸다. 조금 전 남자 의사 앞 에서와는 달리 밀폐된 공간이라 그런지 편히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그대로 의자에 앉아 혹시나 바깥에 소리가 들릴까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괜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꾸물거리다 방에서 늦게라도 나오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스크 쓴 여자 간호사가 딴짓했다고 오해할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조급해졌다. 집중하자. 그리고 빨리 끝내자. 


   모니터 화면 속 영상은 보이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아 둘러보니 의자 옆에 걸린 헤드폰이 보였다. 남자들은 잘 안다. 이런 영상은 화면도 중요하지만, 소리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 크기에 맞게 착용하고 소리와 영상에 집중했다. 시작하기 전 다급한 상황에 서두르다 자칫 조금이라도 흘릴지 몰라 플라스틱 컵 뚜껑을 미리 열어 두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난 지금 합법적인 공간에서 정상적인 채취를 위한 목적으로 이 어두운 상황에 바지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후-. 모니터에는 아까부터 서양 남성과 여성이 나의 원활한 채취를 위해 격한 숨소리로 열심히 움직여 주셨고 오랜만에 보는 터라 그간 보지 못했던 온갖 현란한 동작에 심장이 뜨겁게 요동쳤다. 잠시만 감상했다. 그리고는 뒤로 약간 누운 자세로 다리는 적당한 각도를 유지하고 그분들을 바라보며 마음은 평온하지만 빠르게 수음 법을 실시했다.


   ‘어으…으으으… 윽…… 후…’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재빠르게 다른 손을 뻗어 컵을 가져와 소중히 담았다. 한숨과 함께 고조되었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고 몸이 이완되었다. 그렇게 십여 초 괄약근을 조였다 풀기를 반복하며 최대한 담아냈다. 자세 문제인지 오른쪽 종아리에 힘이 들어가 근육이 약간 뭉쳐 뻐근했다. 오랜만이라 양이 제법 많았다. 심장은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휴지로 뒤처리 후 숨을 다시 천천히 크게 내쉬면서 바지 올리다 문에 붙은 안내판을 보았다. ‘정액 채취를 위해 3~4일 이상의 금욕기간을 가질 것’, ‘폭음, 과로, 격한 운동은 피할 것’ 음… 이걸 왜 다 끝난 시점에 알게 되었을까.’ 전날 피트니스에서 격한 운동을 한 것이 살짝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을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제자리에 두고 거품 비누에 손을 씻고 손 세정제를 비비며 밖으로 나왔다. 바로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마스크 쓴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의문이라는 표정으로 슬쩍 아래를 흘겨보는 것 같았다.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는데 벌겋게 보이는 건 아닐까?’ 아까보다 조금 더 민망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다들 너 같은 표정이야.’라고 말하는 것같이 온화한 표정을 유지했다. 난 처음이 아닌 듯하게 당당하지만 소심하게 결과물이 들어있는 컵을 슬쩍 올려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투명하게 비치는 컵이다. 방금 채취한 묽은 달걀 흰 자 같은 액체들이 컵 눈금 두 칸까지 눈으로 명확히 보였다. 모르는 여성과 내 정자를 같이 보게 되는 건 처음이다. 순간 눈을 내리깔고 모른 척했다. 여성은 마스크를 고쳐 쓰며 능숙하게 나와 아내의 이름이 새겨진 스티커를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또 신분 확인. 혹시 바뀔지 모를 상황에 대비해 철저하게 확인 절차를 진행하는 것 같았다. 의학 절차에 따라 인위적으로 정자와 난자를 인공으로 수정해야 하는 작업이다 보니 사고가 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귀찮더라도 계속 묻고 대답하며 확인하는 것이다.


   평소 내 정자는 그저 휴지에 돌돌 말려 휴지통에 들어가기 일쑤였지만, 평생 살면서 오늘처럼 누군가에게 건네 본 건 처음이었다. 들어올 때 가졌던 경건한 마음을 다시 상기하며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 ‘남성 특수검사실’에서의 짧다면 짧은 임무를 마쳤다. 이것도 경험이라고 뭔가 해낸 것 같은 이 기분은 무얼까. 경험치가 또 하나 올라갔다. 오전 열한 시 반.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내 정자를 본 적이 있었던가? 다리가 풀릴 것 같이 힘이 빠져 대기실 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아이를 갖기 위해 남자가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사실 이게 다라고 봐도 무방하다. 정자 채취 이후 모든 절차는 이제 아내에게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정할 수 없다. 우린 시험관 시술을 진행하는 중이고 그 시험관 시술의 여러 절차 중 하나인 정자 채취를 조금 전 완료했다.



   며칠 후 아내와 난 난자 채취를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갱의실을 지나 수술실 앞에 도착했다. 아내 가방을 건네받고 들어가기에 앞서 헤어지는 연인처럼 손잡으며 잘하고 오라는 눈짓으로 들여보냈다. 수술 때문에 아침도 먹지 못해 하얗고 마른 입술인 채 들여보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수술실로 향하는 아내를 보니 단순 채취라고만 생각했지만, 막상 수술이라는 단어를 보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간단한 방법으로 채취할 수 있는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수면 마취를 해야만 채취할 수 있어서 한두 시간가량 시간이 소요된다고 일찍이 설명을 들었었다. 수술실 앞 통로 천장에는 모니터 두 대가 매달려 있다. 대기하는 남편이나 가족들을 위해 현재 수술과 채취 현황을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안내해 준다. 아내가 들어간 지 삼십여 분 만에 아내 이름 옆에 ‘수술 중’이라고 표기되었다. 


  수술실 맞은편에는 가족 대기실이 있다. 한 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하므로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와 같이 아내를 기다리며 시간 보내는 남자들 열댓 명 정도가 앉아 있었다. 다양한 모양의 의자와 소파가 배치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테이블 위엔 화분 몇 개가 놓여 있다. 서로들 이곳에 왜 왔는지 다 알고 있지만 잠시 힐끗 바라볼 뿐 이내 각자 가져온 책이나 스마트폰, 노트북에 열중한다. ‘저 사람들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겠지? 이곳이 처음인 사람도 서너 번인 사람도 분명 있을 거야.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모두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고들 있을 거야.’ 표정에서는 알 수 없지만, 아이와 아내를 위한 마음은 하나이지 않을까.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예의 인양 빈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모니터에는 대기하는 남자들 인원수만큼 여성들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들어간 순서대로 현재 상태가 이름 옆에 표시되어 있다. 그렇게 기다린 지 30여분 정도 흐른 뒤 채취를 마친 여성들이 한 명 한 명 기력 없는 표정으로 수술실 문을 열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모두들 창백하게 기력 없는 모습은 아마도 채취할 때까지 오랜 시간 빈속을 유지해야 하는 것도 있고 마취도 막 지나간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들은 그럴 때마다 벌떡 일어나 차례차례 맞이하며 물 한 모금 못 마셨을 아내를 위해 물부터 건네고 부축한다. 나도 모니터를 보며 현황을 수시로 체크했다. 아내는 채취 과정은 금방 끝났는지 짧게 ‘수술 중’에서 머물다 ‘회복 중’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수술보다 회복 시간이 오래 걸리니 몇 시간은 더 기다릴 수 있다고 조금 전 간호사 말이 생각났다. 그렇게 두 시간이 다 되도록 기다리다 보니 처음 대기실에 있었던 남자들은 대부분 바뀌어 오래 기다린 내가 선배가 된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예상했던 대기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가 더 지난 뒤 수술실 문 뒤로 아내가 보였다. 한달음에 달려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괜찮은지, 아픈 곳은 없는지, 잘 걸을 수는 있는지 묻는 물음에 아까보다 더 핏기 없이 마른 입술로 대답했다. 


   “배고파…”




   나도 아내도 모든 채취가 끝이 났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채취한 정자와 난자를 시험관 시술을 통해 배아 배양을 하게 되는 절차로 넘어간다. 그렇게 배양을 통해 신선하고 예쁜 모습으로 엄선된 배아를 골라 아내의 자궁에 살포시 심어두면 되는 것이다.


   시험관 시술의 특혜라고 해야 할까? 자연임신은 배아를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시험관은 가능하다. 아내는 모두 5개의 난자가 채취되었다. 보통 채취한 난자는 개수에 따라 적게는 2~3개 많게는 10개 이상으로 모두 수정을 거쳐 배양되는데 각각 다양한 모양의 배아가 배양된다. 신기했던 건 배양된 배아를 눈으로 직접 보는 날이었다. 모니터로 보여주는 배아들은 각기 다르게 생겼지만 처음 보는 우리가 봐도 어떤 배아가 예쁜 것인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모양이 뚜렷했다. 마치 작은 쿠키나 꽃, 호두, 약과같이 동그랗고 예쁜 무늬를 띠고 있었다. 세포분열을 일으킨 것처럼 동그란 것이 겹치고 겹쳐 모양을 이룬 듯 보였다. 보여준 배아는 모두 4개. 비록 많은 개수는 아니었지만 시험관 시술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고 한다. 다만 많으면 많을수록 확률이 높아지는데 적은 수이다 보니 임신 확률이 조금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개수다. ‘저 작고 동그란 것이 배아란 말이지?’ 자연의 신비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나 작은 것이 사람 몸에 들어가 아기가 된다는 것이 신기했고 마법 같아 보이면서도 바로 믿어지지 않았다. 내 정자와 아내의 난자가 만나 이런 모양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학창 시절 제대로 된 성교육 한번 받지 못했기도 했고 생물, 과학 시간을 허투루 보낸 내게는 실전으로 느끼는 현장 체험학습과도 같았다. 


   5개의 난자 중 배양된 배아는 4개였지만 그중 3개가 양호한 중급 배아로 시험관 시술에 적합하다고 했다. 배양된 배아는 많을수록 좋다는 건 알고 있다. 임신 확률이 높아지는 것도 물론 좋은 점이지만, 만약 실패 한다면 다시 이식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또다시 채취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배아는 냉동할 수 있어 실패 시 해동을 통해 다음 기회를 노려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린 배아가 3개이므로 실패하더라도 2번 더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적은 수의 이식은 그만큼 착상 확률이 낮아진다. 그래서 배아 개수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이다. 우린 확률을 높이기 위해 양호한 3개의 배아를 모두 이식하기로 했고 날짜에 맞춰 바로 이식을 시도했다. 이식은 채취할 때만큼 오래 걸리지 않아 바로 일상이 가능하지만, 이식 후 착상을 위해서는 안정에 안정이 필요하다. 확률은 낮지만 3개의 배아가 모두 착상되면 세 쌍둥이가 되는 것이다. 요즘 주변에도 제법 쌍둥이들이 많이 보이는데 왜 그런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이대로 잘 착상되고 유지만 된다면 바로 임신이라는 타이틀을 우리도 가질 수 있다. 어찌 보면 간단한 시술 같아 보이지만 기술적인 시술 외 최적의 몸 상태, 시도 시기, 채취 결과물, 배아 개수, 이식 그리고 착상에 이르기까지 단계 하나하나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합이 맞아야 하고 확률과 어느 정도 운도 따라야 임신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처럼 난임이든 불임이든 그 작은 몇 퍼센트 확률을 위해 노력하고 수차례 시도하고 돈과 시간을 투자해 내 아이를 갖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세상이 되었다. 다르게 보면 예전처럼 아이가 들어서기 위해 막연히 한약이나 삼신할머니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닌 의학 기술로 확률을 높이는 시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둘만 낳아 잘 키우자’,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라는 공익 홍보물을 보고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한 반에 6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좁디좁은 교실에 앉아 머리를 맞대던 요즘은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2~30년 사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저출산 국가 대한민국.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분명한 건 아이가 점점 줄어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낳지 않으려는 부부도 많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처럼 갖고 싶어도 갖기 어려운 부부들도 많아졌다. 나라에서도 고육지책으로 임신에 필요한 비용과 다양한 복지를 지원해 주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많은 지원이 아닌 몇 차례 시술비나 약을 저렴하게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정도다. 몇 년 동안 실패, 실패, 실패를 반복하고 여러 차례 다시 시도하는 부부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 비용 부담이 상당하다. 비용을 고려하면 시도할 수 없는 부부임에도 빚을 져가며 시술을 계속 시도하는 이유는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내 아이를 갖기 위한 간절함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도 그 간절함이 저 하늘 끝까지 닿기를 바라고 바라며 소중한 내 아이가 찾아오길 마음속 깊이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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