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그녀와 나는 결코 사이좋은 모녀가 아니었다.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녀간 대립을 반복하며(나는 지금도 사이좋은 모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결같이 ‘절대로 엄마처럼 안 살 거야’라고 생각했고, 어머니는 당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딸이 멀어져가는 것을 원망했다. 한 많은 어머니의 인생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어머니를 나는 싫어했다."
내가 쓴 글인 줄 알았다. 오랜시간 감춰온 감정이 판화로 찍어 나온 기분이다. 일본의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산문집 <느낌을 팝니다> 중 발견한 대목이다. 난 가로 안 문장을 반복해 읽어 보았다. ‘나는 지금도 사이좋은 모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게 이 문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는 위로 언니 한 명, 아래로 여동생, 남동생이 있다. 나 빼고 모두 엄마와 사이가 좋다. 특히 언니는 엄마의 베프(best friend)다. 언니가 결혼한 후로 둘 사이 우정은 더욱 각별해졌다. 내게 둘은 사이좋은 모녀의 전형이다. 엄마에게 언니 같은 딸이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나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 우리 둘은 미묘히 어긋나 있다. 불행한 방향으로 5cm쯤 틈이 나 있다. 난 안다. 그 틈은 앞으로도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엄마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면 마음속으로 이런 저런 것들을 한참 솎아내는 자신을 발견 한다. 엄마가 싫어할 말, 좋아할 말 구분해서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를 환하게 펴 발라 주고 싶다. 하지만 매번 실패한다. 엄마가 기대하는 나, 그 대수롭지 않은 것들(안정적인 직장, 원만한 대인관계, 언니˙누나로서의 책임의식 등)이 나는 때로 세상에서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제 앞가림도 벅찬 나날 속에서 나는 우리의 어긋난 틈을 애써 외면해왔다.
그런데 최근 그녀와 나 사이 어설픈 징검다리가 생겼다. 3개월 전부터 엄마가 요가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의외였다. 시시하다고 할 줄 알았다. 돈을 주고 하는 운동이니 열심히 달리거나 흔들거나, 땀을 비 오듯 쏟아내는 운동이 좋다고 생각할 줄 알았다. (난 엄마가 에어로빅을 해서 내가 더한 스트레스까지 날려버리고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는 수업을 들은 첫날부터 요가를 마음에 들어 했다.
“사람들은 다 되는데 왜 나는 안 될까. 뭐냐면.”
하면서 엉성하게 동작을 취해 보이는데, 기억해낼 수 있는 건 겨우 한, 두 가지다.
"엄마, 다음엔 사진을 찍어와."
그렇게 놀리면 답답해하면서도 눈이 감기게 웃는다. 귀여운 여자. 만면이 헤벌쭉 벌어지는 그 얼굴을 나는 얼마나 닮았을까.
엄마 몸은 바위 같다. 단단하게 굳었다. 그저 뭉친 정도가 아니라 오래된 엿처럼 대책없이 딱딱하다. 그런 몸을 풀려면 나보다 배는 더 힘이 들 것이다. 엄마는 수업을 듣는 또래 아줌마들 중에서도 가장 열등생이라 했다. 다른 사람의 절반도 손을 뻗지 못하고 다리를 접지 못하고 허리를 비틀지 못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나는 한숨만 내쉰다.
"나는 엄마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그 반대 역시 성립한다)" 우에노 지즈코는 말했다.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 얹은 짐이라도 덜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마저도 쉽지 않아 나는 또 엄마의 고생을 외면하면서 푸념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