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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아리니 Oct 25. 2022

침묵의 공공칠빵, 아니죠? 침묵의 사인회



한국인의 흥, 그러니까 가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흔히들 MLB(미국 야구리그)의 응원문화가 심심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에겐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들의 응원문화가 너무 좋다. 가만히 앉아서 박수를 치며 관람하다 클라이맥스에 함께 환호하는 것, 그걸로 관객의 의무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콘서트에 가서도 떼창보단 가수의 목소리를 듣는 걸 좋아하는 편이고, 앵콜 부분에서만 일어나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게 좋았다. 솔직히 나는 그냥 끝까지 앉아있고 싶다. 


게다가 MLB의 응원은 쉽다. 돌려막기가 가능하다. 그 많은 응원가를 다 알지 않아도 쉽게 즐길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장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박수와 야유로 모든 걸 커버하며 경기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가서야 렛츠고 '응원팀 이름'을 외치는 응원을 한다. 


렛츠고 다저스, 렛츠고 파드리스, 렛츠고 양키스. 


모든 팀에 돌려막기가 가능하다. 이 얼마나 편하고 행복한가! 


그렇게 편하게 선수들을 격려하며 나는 경기장에 온 주된 이유, 경기를 '관람'하는 것에 집중하면 된다. 아, 정말로, 누가 뭐래도 나는 MLB 스타일의 응원이 좋다. 


지금의 나는 이리 보고 저리보고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봐도 열렬한 야구팬이지만, 지금 당장 KBO의 그 응원문화가 없어진대도 전혀 슬프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은 한국이다. 따라서 나는 한국의 야구장을 가야만 했다. 모든 소심한 집순이들이 그렇듯 나는 집 밖을 나서기 직전까지 귀찮음과 두려움에 떨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크보(KBO라고 치기 너무 귀찮다) 팬들이 날 어떻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냥 내가 사람이 많은 게 싫고,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을 불편해한다. 


야구장에 가기 직전까지 내게 야구팬들의 이미지는 사찰 앞을 지키는 도깨비 상이요, 지옥문을 지키는 케르베로스 같았다. 


다행히도 그 오해는 야구장에 도착한 그 순간 눈 녹듯 풀렸다. 앞서 말했듯 야구팬들은 자신의 니즈, 욕구가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고, 나는 그들의 욕구에 눈곱만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나는 그들의 무관심에 안심하며 야구장으로 들어갔다. 현재의 나 또한 그렇지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사랑하는 선수, 팀뿐이다. 


아니, 근데 소심하다면서 어떻게 혼자 거기까지 갔냐고 묻는다면 소심좌 또한 가끔은 용기를 내고 싶은 날이 있는 거다. 아니, 소심하면 친구랑 같이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소심하고 내향적인 인간은 옆에 사람이 있는 게 더 힘들 때가 있다고 답하겠다. 


다른 사람을 따라가는 건 상관없지만, 내가 주도해서 어딘가에 데려갔을 시, 나는 그 사람을 반드시 대접해야 할 거 같고, 설명해야 할 거 같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야 할 거 같은 거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야구 직관은 대부분 혼자 이루어졌다. 


아무튼 내가 서울에서 제일 처음으로 간 야구장은 바로 잠실 야구장이었다. 아직 야구장 경험이 없던 나는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다 인터넷상에 가기 편한 야구장을 검색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교통이 좋은 잠실을 추천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잠실은 최악의 구장이었다. 왜냐면 멀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도 겁나 많았다. 야구팬뿐만 아니라 콘서트, 그리고 농구장까지 있는 곳이라 나 같이 사람 많은 곳을 극혐 하는 인간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내가 저렴해서 대충 예매한 좌석은 쓰레기통 바로 앞자리였다. 자리를 피해 쓰레기 통을 놓아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무튼 잠실 야구장의 첫인상은 악취와 벌레, 그게 다였다.


그렇게 싫었으면 집에 가면 되지 않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 않다. 소심한 집순이는 한 번 나갔을 때 모든 일을 다해야 하며,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야구장에 갈 때 유니폼도 챙겼고, 반드시 이 경기를 끝까지 보고 사인도 받으리라 맹세했던 것이다. 근데 대체 유니폼은 언제 샀냐고? 빡쳤던 그날. 


마침 스페셜 유니폼이 판매 중이던 때였고, 더불어 그 유니폼을 입고 하는 사인회 신청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박병호, 이정후의 스페셜 유니폼과 - 둘만 사인회 라인업에 있었다 - 김하성의 홈 유니폼을 구매했다. 하지만 스페셜 유니폼은 놀랍게도 배송 기간마저 스페셜하여서 내가 잠실로 떠나기 전에 도착하지 않았고, 나는 김하성의 유니폼만 챙긴 채로 잠실로 향했다. 


경기는 이겼다. 그날의 선발이 요키시 선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점수가 많이 나지 않는 경기였다. 솔직히 좀 지루했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에서 본 대로 9회가 끝나기 전 선수들이 나가는 출구 쪽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았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적었다. 그래서 나는 앞쪽에 쉽게 자리할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뚝뚝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김하성을 마주했다. 


'!'


솔직히 너무 놀랐다. 그는 티브이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컸고,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근육질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무표정으로 걸어오니 그야말로 나 같은 인간은 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깡패가 아니고, 깡패라 할지라도 여자에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걸진 않을 것이었으나, 그는 정말 근육 빵빵 무표정 맨이었으므로 나는 혼자 그를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걸어갈 뿐인 근육 빵빵맨을 보며 혼자 쪼는 자, 그게 바로 극 소심좌이다. 


아무튼 사인을 받는 것까지가 오늘의 목표였으므로 얼른 유니폼을 치켜들었다. 인터넷의 훌륭한 선생님들이 자기 유니폼을 지나치는 선수는 거의 없다고 귀띔해준 덕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유니폼을 슬쩍 밀어 넣자 무표정이던 그의 눈에 살짝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바로 내쪽으로 걸어왔다. 


이 순간이 아마도 나를 열정적인 히어로즈 팬으로 만든 가장 극적인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말도 못 하고 떨고 있는 인간에게 그 크고 무섭지만 멋진 선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사인해주세요.'


라고 말하지 못했다.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질 않았다. 사인은 받고 싶었지만 진짜 막상 그게 현실이 되자 그야말로 굳어 버린 나는 '아, 에, 이, 오, 우' 같은 숨소리만 겨우 내고 있었다. 


하지만 김하성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유니폼 한쪽 끝을 잡고 한 손으로 펜을 잡았다. 그리고 사인을 하려 했지만 이런 게 처음인 내가 그가 사인을 하기 편하도록 유니폼을 잡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생각보다 더 친절한 목소리로 유니폼의 이쪽을 잡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내 손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덜덜덜 떨리고 있었으므로, 옆에 서있던 중학생 꼬마가 반대편 유니폼을 잡아줄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학생. 


그는 정말 크고, 멋있었다. 몇 번을 반복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뛰기 때문에 또 반복을 해야겠다. 이해해달라. 그는 사인을 하는 내내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그 위의 볼록 튀어나온 광대에 그날 내가 보고 반했던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도 웃게 만드는 그 바이러스 같은 행복함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렇게 내 첫 사인회는 행복으로 침묵의 공공칠빵이 아닌 침묵의 사인회로 끝났다. 선수가 아닌 팬이 입을 꾹 다문 기묘한 장면이었지만 나는 충분히 넘치도록 행복했다. 


'여기.'


잠시 감상에 젖어있던 나를 깨운 건 낮지만 다정한 그의 목소리였다. 그가 펜을 돌려주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내가 얼른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는 작게 목례한 뒤, 반 발자국씩 걸어가며 기다린 팬들에게 모두 사인을 해주었다. 세상에.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언제 이렇게 사람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온통 그의 사인을 받고 싶어 하는 팬들로 가득했다. 그는 한 명 한 명 자신을 기다리는 팬 모두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저렇게 사인을 해서 대체 언제 집에 가나 궁금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묵묵히 사인을 했고, 아마도 내가 떠난 후에 버스에 탑승했을 것이다. 


왜 그가 언제 버스에 탑승했는지 모르냐면 용건이 끝난 내가 집에 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집순이들은 나가서 한 번에 많은 일을 처리하고, 그 일들이 다 끝나면 가차 없이 집으로 향한다. 


나는 야구를 봤고, 사인도 받았다. 그러니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얼른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밤공기는 차갑고 주위는 어두웠지만 발걸음만큼은 가벼웠다. 혼자 통통 튀며 걸었다. 김하성 선수의 유니폼을 품에 안은 채였다. 오버 더 레인보우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이 순간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여전히 불행의 바다 위에서 뛰어내릴까 말까 고민만 하던 내게, 그 무뚝뚝한 얼굴의, 사실은 다정한 선수가 다가와 세상엔 여전히 좋은 일이 많아,라고 말해준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이 나에게는 기적이었다. 방황하던 나의 주파수가 히어로즈에 완벽하게 고정되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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