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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아리니 Oct 25. 2022

똥을 피하는 마음으로



내가 박병호 선수의 게시물을 본 것은 겨울이었기 때문에 당장 야구를 보러 가진 못했다. 그러나 내겐 꿈이 생겼다. 꿈이라고 말하기 거창할지 몰라도, 내겐 꿈이었다. 야구장에서 박병호 선수를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 말이다.


봄이 오길 기다리며 나는 겨울을 보냈다. 시즌은 끝났지만 이제 야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인간에겐 새로운 정보가 넘쳐났다. 일을 하느라 몸은 고달팠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게 재밌었다. 좋아하는 걸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고, 내일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하루를 지워버리며 살던 내가 내일을 기대하며 살게 된 일이야 말로, 히어로즈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티비에선 야구가 개막했다며 여기저기서 홍보 방송을 내보냈고, 나는 우선 중계방송으로 그들을 먼저 접했다. 소심한 인간은 어딘가에 가기 전에 그 장소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이버 사전 답사랄까? 


어쨌든 나는 박병호 선수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의 등번호인 52번을 외운 채 눈을 티비에 고정시켰다. 그는 우타, 즉 타석의 오른쪽에 서는 타자였지만 나는 그것도 모를 만큼 야구를 자세히 알진 못했다. 그래서 그냥 5만 죽어라 찾았다. 


그때 앞자리가 5인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그가 너무 호리호리했던 것이다. 그새 다이어트라도 심하게 했나?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카메라가 그의 등번호를 정확하게 비춰주었다. 그는 51번이었다. 


등번호 51번의 히어로즈 선수. 그는 현재 한국 프로 야구 최고의 스타다. 하지만 그때 내겐 그냥 박병호가 아닌 선수일 뿐이었다. 그래서 '얜 대체 뭔데 헷갈리게 '5'를 달고 있는 거야?'라고만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사랑하는 이정후 씨. 현재의 나를 생각하면 그저 웃음만 나는 생각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짜증이 나서 얼굴이나 보잔 심산으로 씩씩대고 있는데 카메라가 서서히 그를 비추기 시작했다. 


우선 스파이크가 박힌 운동화 위로 야무지게 올려 입은 버건디 양말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헐렁한 유니폼을 지나 까무잡잡한 피부의 목을 지나쳐 얼굴에 도달했다. 각진 남자다운 턱과 앙다문 입술이 보이더니, 시원한 콧날이 빠르게 스쳐 지났고, 마침내 또랑또랑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미친! 잘 생겼어!'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리고 사과했다. 당신은 잘 생기셨군요, 욕해서 죄송합니다. 왜 굳이 잘생긴 것에 사과를 하냐면 모르겠다. 쭈구리 본능이다.


아무튼 그의 외모에 꽂힌 나는 얼른 볼륨을 높였다. 그러자 캐스터가 친절히 그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앞자리 '5'를 달았단 이유로 내게 쓸데없는 핀잔을 들은 그의 이름은 '이정후'였다. 


그래서 또 샹투스가 울렸냐고? 아니다. 그냥 이정후구나 했다. 나는 잘생긴 야구 선수 하나를 알았고,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가 야구를 잘할 거란 생각은 꿈에도 안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는 잘생긴 야구 선수는 야구를 못할 거란 편견이 있었고, 이정후는 정말 잘생겼다. 그러므로 잘생겼지만 실력은 없겠네,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그가 '딱!'하고 경쾌한 안타를 쳤다. 그래도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저 한 번 쳤을 뿐이네 생각했다. 그가 데뷔 시즌부터 한국 야구 리그를 폭격하며 신인왕을 받았으며 유명한 레전드 '이종범' 선수의 아들이란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이정후에 대한 생각은 거기서 그쳤다. 


'4번 타자 박병호.'


박병호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내게 야구장을 가고 싶다는 욕망을 심어준, 귀엽고 잘생기고 멋진 데다가 야구까지 잘하는! 나는 엉덩이를 움직여 티비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성큼성큼 씩씩하게 걸어 나온 그는 발로 타석을 정리하고 배트를 한 번 쳐다본 뒤 자세를 취했다. 그의 눈밑에 앙증맞은 아이패치가 붙여져 있었다. 햇빛을 대비해서 붙이는 거라지만 솔직히 너무 귀여웠다. 사실 그 거구의 야구선수가 귀엽게 보인 순간부터 나는 이미 내 모든 걸 그들에게 바친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아무튼 그렇게 혼자 하트를 보내는 사이, 박병호 선수 또한 안타를 치고 나갔다. 그 뒤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목적 지향적인 인간이고, 박병호 선수를 봤기 때문에 뒤돌아 누워 박병호 선수의 사진을 검색하는 일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히어로즈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누굴까 하고 본 타석에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는 김하성 선수가 들어섰다. 그는 당시 히어로즈의 2번 타자였고, 그는 2루타를 쳤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그를 확실히 기억한 이유는 그의 미소 때문이었다. 2루타를 친 그는 신나게 달려 슬라이딩으로 2루에 도착했다. 그리고 일어나며 입을 꾹 다물었지만, 행복한 기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볼록 튀어나온 광대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저 사람 야구하는 게 진짜 행복하구나.'


이런 생각이 절로 드는 미소였다. 그 넓은 그라운드 위에서 오직 김하성만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김하성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 상대팀이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당시엔 그랬단 소리다. 그는 야구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 감정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신선했다. 그는 프로 선수고, 야구로 돈을 버는 사람이니까 열심히 하는 건 당연했지만, 그를 즐기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 또한 그랬다. 그의 그 행복한 미소, 그라운드 위에 서 있어서 너무나 행복하다던 그 에너지는 언제나 안 될 거야, 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하던 나까지 깨울 정도로 강력했다. 


그렇게 모든 게 장밋빛으로 물들던 그 순간,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강타했다. 


'근데 히어로즈는 참 문제예요. 야구를 이렇게 잘하는데 팬이 없잖아요. 저기 보세요, 좌석 비어 있는 거.'


순간 열이 확 올랐다. 당시엔 인지하지 못했지만 나는 이미 이 핑크도 레드도 아닌 버건디 빛의 인간들을 사랑하고 있었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걸 정말 참지 못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비를 껐다. 그 목소리를 귀에서 털어내고 싶었다. 잠시 씩씩대던 나는 곧장 야구예매를 알아보았다. 고작 나 하나가 좌석을 다 채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다. 


다만 야구장에 가면 내가 다짐했던 대로 그들을 실제로 볼 수 있었고, 또 그 재수 없는 해설위원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됐다. 그거면 됐다. 


그렇게 내 첫 번째 야구장 나들이는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마음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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