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도, 그들의 강렬했던 가을 야구가 끝난 뒤 - 제대로 보지 않았다 - 추운 겨울을 맞아 다시 생계전선에 뛰어들며 야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약국과 빵집, 주말 빵집까지 세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내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누워서 핸드폰을 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게시물을 보게 되었다. 바로 ‘박병호도 화나게 하는 사구'라는 글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그 당시에 박병호가 누군지, 김하성이 누군지, 이정후가 누구고 얼마나 유명한지 알지 못했다. * 참고로 박병호 선수는 히어로즈의 심장이라고 불릴 만큼 상징성이 큰 4번 타자였고, 김하성 선수와 이정후 선수도 신인부터 자신들의 실력을 발휘하며 자라난 엄청난 스타플레이어들이다.
다만 강렬한 제목에는 이끌리는 어쩔 수 없는 네티즌이었으므로 게시물을 확인했다.
그 게시물의 내용은 이랬다. 모 팀의 한 선수가 고의로 - 본인들은 아니라고 했다- 박병호 선수에게 몸에 맞는 볼을 던졌고, 이미 초반에 몸에 맞는 공을 겪었던 박병호 선수가 - 그 후에 그는 홈런을 쳤다 - 한 번 더 머리에 공을 맞자 참지 못하고 달려 나간 것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선 던진 놈이 잘못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운동선수들은 거칠고 화가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화내는 게 뭐가 그리 특별한가 생각했다. 여태껏 알았던 야구선수들처럼 야구장에서 야구 대신 엎어치기나 복싱이라도 하나 싶었다.
반전은 아래쪽에 있었다. 자극적인 짤방으로 시작한 영상의 하단부에는 박병호가 화를 낸 게 얼마나 이례적인지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박병호 선수는 185cm에 110kg, 게다가 엄청난 근육질의 4번 타자였다. 야구에서 4번 타자라 함은 찬스가 가장 많이 오는 타순이고, 그만큼 모든 팀의 경계를 받는 자리였다. 그에게 맞을 바엔 사구를 주겠다는 심정으로 상대는 몸에 바짝 붙는 공으로 승부를 많이 했고, 자연스레 그 타순의 선수들은 다른 타순보다 몸에 맞는 공의 개수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것도 경기의 일부, 그러니까 고의성만 없으면 실수라고 넘기고 넘어갔던 것이다. 심지어 사구에 맞아 부상을 당할 때에도 화를 내지 않던 그가, 그날은 화를 냈던 것이다. 경기의 일부가 아닌 고의가 분명하다는 소년 만화 팬의 가슴을 울리는 정의감으로 말이다. 게다가 그 게시물의 댓글도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박병호가 화를 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달랐다.
그 외에도 게시물에는 박병호 선수가 헛스윙을 하고 거칠게 숫자 욕설을 내뱉는 대신 자신의 머리를 아주 살짝 '콩!' 하고 때리며 '바보'라고 혼잣말을 하는 모습이 있었고, 모든 야구 선수의 꿈이라는 메이저리그까지 다녀온 엄청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땅볼을 치든 뜬 공을 치든 반드시 1루까지 전력 질주하는 모습도 존재했다.
상투스가 울려 퍼졌다. 그는 다정하고 성실한 선수였다. 꿈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유니콘 같은 선수였던 것이다. 야구선수에 대한 편견이 깊고도 컸던 내게, 크고 온화하고 귀여운 박병호의 등장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야구선수가 매번 식빵을 구워대고, 헬멧을 내리치고, 마운드에서 이단 옆차기나 레슬링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이다. 가끔은 복싱도 하고.
내가 그에게 빠지게 된 이유는 또 있다. 현재 삼십 대인 내 또래의 사람들은 남녀 불구하고 소년만화를 많이 보고 자랐다. 대표적인 것이 슬램덩크일 테고, 야구는 크게 휘두르며, 다이아몬드 에이스 등이 있다.
이런 소년 만화의 주인공은 언제나 천방지축에 타고난 재능을 갖고 있으며, 성실하게 노력하고 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선배 캐릭터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위로 올라간다. 나는 이게 싫었다. 온갖 민폐를 다 저지르며 수습은 그의 동료들이 하는데 정작 주목받는 건 주인공 놈뿐인 거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테니스의 왕자라는 유명한 만화에서 나는 주인공보다 주인공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던 주장, 안경 선배를 더 좋아했다. 그가 절대로 주인공에게 지지 않았으면 했다. 왜냐하면 그는 성실하고 착했고 재능도 있었으며 노력까지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화에선 언제나 주인공이 그를 넘어섰고, 이야기 설정상 그래야 하는 줄 알면서도 나는 그게 정말 싫었다.
물론 박병호 선수 또한 어릴 때부터 거포의 재능을 보여준 재능러이기는 했다. 다만 그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곳에서 매력적으로 나오는 술을 마시고도 야구를 잘하는, 혹은 성격은 개차반이지만 자기 일만큼은 잘하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는 아침 일찍 청소를 하러 나오는 직원들보다 더 일찍 출근해 하루를 시작했고, 충실히 자신의 루틴을 지키는 성실한 노력을 소중히 하는 주인공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좋았다. 재능이 있고, 그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 그가 박병호였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는 조용한 내 성격에 딱 맞는 천재였던 것 같다.
아무튼 이 사람 참 멋있다,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사진을 보던 내 눈에 드디어 히어로즈라는 글자가 들어왔다.
히어로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아, 아니?!
그렇다. 나는 그렇게 반해놓고도 어느새 그 팀을 잊고 있었고, 박병호가 그 긴 게시물 내내 히어로즈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내 잠재의식이 마지막에 나를 깨우쳐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나의 영웅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운명, 그 간지러운 단어가 다시 한번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히어로즈를 만나기 전까지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주파수가 맞은 적이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와 맞지 않았다. 나를 거부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히어로즈는 달랐다. 혜성같이 나타난 그들은 그 짧은 순간 내게 희망을 심어주었고, 내가 필요한 존재라 말해주었다. 나는 필요가 고픈 사람이었다. 내 필요를 위해서라도 나는 야구를 봐야 했다. 캐스터의 말이 맞았다.
히어로즈가 기적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