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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아리니 Oct 25. 2022

한글로 영웅


그 상태로 나는 서울의 한 대학교로 편입을 했다. 갑자기 편입? 다 이유가 있다. 말이 나온 김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나는 부산에서의 가족과 관계된 삶이 너무 괴로웠다. 살면서 딱 한 번 정도는 끊이지 않는 가정불화와 나를 향한 가스 라이팅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내 아버지는 내가 의식이 있을 때부터 바람을 피웠으며, 어머니는 그 스트레스를 모두 내게 풀었고, 그 당시 우리에겐 아직 말도 못 하는 갓난아기인 내 동생이 있었다. 따라서 부산에서의 나는 일곱 살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고, 열세 살의 가정 상담사가 되어야 했으며, 스무 살의 이혼 대리인을 맡아야만 했다. 미국에선 청소년 학대로 잡혀갈 일이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이대로 죽긴 억울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의식이 있을 때부터 싸우고 헤어지고 싶어 했던 부모님의 소원을 앞장서서 들어드리기로 했고, 그들의 엇나간 사랑과 나의 노력으로 마침내 남남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자유 또한 되찾을 수 있었다. 나는 어렵게 찾은 그 자유를 그들이 절대 침범할 수 없는 곳에서 즐기고 싶었다. 


그게 바로 서울이었다. 서울을 목적지로 삼은 이유는 단순했다. 부산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북한을 갈 수 없으니 서울이었던 것이다. 사실 내 편입의 목적은 부산을, 그리고 가족을 떠나는 것이었다. 


서울의 삶은 상상보다 더 힘들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그 쪽방조차 미화된 것이었다 서울에선 숨만 쉬어도 돈이 들었다. 내 어려운 사정을 이용해 이상한 제의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돈에 쫓기고 사람에 쫓기다 보니 내 존재가 죄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부산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해도 그랬다. 나는 내가 절벽 끝에 서있다고 생각했다. 


틀렸다. 나는 이미 추락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추락했다. 풍덩! 그 소리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었던 것뿐. 나는 이미 싸늘한 바닷물에 빠져 온 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죽을 날만 기다리던 산 송장, 그게 바로 나였다. 


하지만 내겐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거창한 꿈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빚, 카드 값이 남아있었다. 내 부모는 나를 후회라 불렀다. 자신의 발목을 잡는 거대한 미련 덩어리라고 했다. 평생 그런 말을 들었어도 죽는 마당에 빚만 남기고 가는 재수 없는 X, 이라는 소릴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카드 값만 다 갚고 죽기로. 


그렇게 내 삶의 유통기한을 결정한 그날, 나는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켰다. 그러자 6대 0으로 지고 있는, 그것도 1회 초에 어마 무시하게 지고 있는 야구팀이 보였다. 나는 콧방귀를 뀌며 채널을 돌렸다. 그날 내가 한 혼잣말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저 팀 진짜 오지게도 지고 있네.'


죽기 직전의 인간이 저렇게 못하는 야구로 눈을 버리고 싶진 않았으므로, 채널을 돌려 예능 재방송을 봤다. 그러다 광고 타임이 돌아왔다. 광고에 쓸 돈이 없던 나는 다시 채널을 돌렸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그들이 그 사이 6대 5까지 점수를 따라잡은 거였다. 


'저게 가능해?‘


눈이 반짝였다. 순간 아드레날린이 솟아올랐다. 몸이 뜨거워졌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닷물에 빠진 나를 누군가 거대한 글러브로 건져 올리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시선을 고정했다. 매일 내 고막을 때리던 서울의 사이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선수의 이름은 단 하나도 몰랐지만 그들의 가슴팍에 박힌 글자만큼은 선명했다 


히어로즈. Heroes. 한글로 영웅.


운명이었을까? 조금은 낯간지럽지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야구는 1년에 144경기, 3월부터 9월까지 어마어마하게 긴 레이스를 하는 종목이다. 따라서 매일같이 명승부를 만들어내긴 어렵다. 


그런데 하필 내가 가장 힘들던 그때 그 시기, 히어로즈, 영웅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나타나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게임을 바짝 따라붙었던 것이다. 


꿀꺽. 절로 침이 넘어갔다. 말아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내 운명을 걸었다. 당신들이 여기서 역전을 한다면 나도 일어설 수 있을지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이겨라,라고 작게 읊조렸다. 


'아- 땅볼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없었다. 그런 건 영화의 주인공에게나, 드라마의 주인공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알량한 재능의, 그저 부산을 떠나고만 싶었던 도피자에게 그런 기적은 없었다. 그렇게 캐스터의 실망한 목소리와 함께 이닝이 끝났다. 


나는 채널을 돌렸고,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아무런 의미 없는 영상과 소리, 웃음들이 눈앞을 스쳐 지났다. 분명 재밌었던 예능이 하나도 재밌지가 않았다. 실망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던 사람들의 뒷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집중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채널을 바꾸기 시작했다. '결과가 나지 않으면 다 무용지물인 거야!'라고 스스로 되뇌며 그들을 떨쳐버리려 했다. 뜨끈한 국물, 우스꽝스러운 사람, 눈물을 흘리는 여자 주인공 등의 화면이 쓱쓱 지나가다 갑자기 강렬한 버건디가 나타났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그보다 더 강렬한 함성이 내 고막을 후려쳤다.


'와아아-!'


그리고 신기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욕만 하는 줄 알았던 야구팬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울고 있었다. 그라운드를 향해 몸이 꺾일 정도로 고개를 숙여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울면서 웃고 있었다. 그 찬란함 아래, 버건디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활짝 웃으며 관중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을 향해 박수와 웃음과 눈물을 보내는 팬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 그 넓은 관중석마저 빛나고 있었다. 내가 서울에 와서 본 사람들 중에 가장 빛나는 광경이었다. 


"넥센 히어로즈!"


살면서 이렇게 눈부시게 찬란한 순간은 처음이었다. 그 유명한 박병호, 김하성, 이정후도 아직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들은 멋있었다. 이 말 외에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나는 울고 있었다. 그깟 공놀이, 그리고 그깟 공놀이에 열광하는 사람들. 내가 무시한 그 사람들이 글러브 모양의 구명보트를 보내주었다. 그 구명보트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켜 주려는 듯, 캐스터가 외쳤다. 


"넥센 히어로즈가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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