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향해 가는 과정이 힘겨울 때
첫 책을 낸 후 주변에서 가끔 질문을 받았다. 책은 어떤 경로로 내게 되었으며, 돈은 얼마나 벌었냐, 왜 책을 내게 되었냐는 물음이 다수였다. 원고를 출판사에 투고해 책을 냈고, 어차피 책으로 돈은 얼마 벌지 못함을 사실대로 말했다. 책을 낸 이유도 간단했다. 내 이름 박힌 책을 한 권 내는 게 원래 꿈이었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한 가지 추가 질문을 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책을 내고 나서 ‘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은근히 놀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책을 낸 사람에게는 저자라는 말을 붙이는 게 정확하지 않나 싶다-. 작가에 대한 고정관념을 갑자기 나에게 덧씌우는 지인도 있었다. 작가는 감수성이 충만하고-심지어 나는 청소년 경제 지식책을 썼는데도 이런 말을 들었다- 갑작스럽게 영감을 얻어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 쓰는 사람, 돈에 연연하지 않는 인물 정도의 이미지가 있는 듯했다. 나는 일단 감수성이 충만한 사람이 아니다. 책상에 앉아 무조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편이다. 돈에도 몹시 연연한다. 한 회사 사보에 기고를 한 적이 있었는데 원고료 입금이 몇 달 지연된 적이 있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조바심이 나서 입금 언제 되냐고 담당자에게 메일을 여러 번 보냈다. 그래, 이렇든 저렇든 나와 이야기하다 보면 고정관념은 전부 깨지게 되어 있으니까. 괜찮았다. 큰 상관없었다.
이 질문은 달랐다. 글재주와 노력이라. 심오한 단어다. 솔직히 나에게 글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는 순전히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글을 썼다. 상을 타고 싶어서. 그래도 당시에는 일기도 꾸준히 썼고 글짓기에도 관심이 꽤 많았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만화책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글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레 줄었다.
대학시절 교내의 글쓰기 공모전에서 상을 탄 적은 있다. 공고를 살펴보니 상금이 무려 30만 원이었다. 당시 집에 용돈을 달라고 자주 손 벌릴만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돈이 간절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전교생이 2500명 정도인 작은 규모의 교원 양성 대학이었다. 글쓰기에 심오한 뜻(?)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며칠 동안 끙끙거리며 수필을 한 편 썼고, 실제 수상을 했다. 학교 신문에 글이 실릴 것이라며 수정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다. 심사 위원이었던 국어교육과 교수님 사무실에 찾아갔다. 그날 교수님에게 많이 혼났다. 수필 응모작이 거의 없었는데-전체 응모작이 3편 정도였다고 했다- 그나마 글에 담긴 메시지가 좋아 내 수필을 뽑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글에 비문이 많고 짜임새도 엉망이라 전부 고쳐야 한다는 지적에 주눅이 들었다.
글이 신문에 실린 날, 같은 공모전의 소설 부문에서 상을 탄 다른 과 친구의 작품을 보았다. 이미 시상을 할 때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아이는 심사위원인 국어교육과 교수님들과도 문학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나누었다. 이미지도 뭔가 고상해 보였다. 아, 글을 쓰는 사람은 저런 인물이구나. 무엇인가 벽이 느껴졌다. 그 이후로는 글쓰기 재능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해 본 적이 없다. 갑작스럽게 30대가 넘어 재능과 노력에 대한 질문을 받으니 무엇이라 이야기해야 할지 난감했다. 나도 궁금해졌다. 무엇이 우선순위일까?
폴 세잔 (Paul Cézanne. 1839~1906)은 프랑스의 남부에 있는 엑상프로방스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가까운 지역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은행에서 먼저 일을 했다. 얼마 후 자신의 길을 찾아 미술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미술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후에도 독학으로 공부하여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1882년 관전에 입선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처음에는 세잔 역시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잡아내는데 관심을 보였지만, 점차 자신만의 그림 방식으로 대상의 변하지 않는 본질을 잡아내겠다는 결심을 한다. 시점을 다양화해 대상을 그리는 것이 그의 작업 방식이었다. 그의 정물화를 보면 사과나 오렌지같이 단단한 과일이 자주 등장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쉽게 썩지 않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려도 쉽게 변질되지 않았다. 사과가 물러 터질 때까지 거듭해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세잔은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고향 엑상프로방스로 가 예술 활동을 벌인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그려낸 소재 중 하나가 집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생 빅투아르산(Mont Sainte-Victoire)이었다. 세잔은 이 산을 유화로만 40번 넘게 그렸다. 수채화로도 거듭 그렸다. 그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이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잔이 그린 생 빅투아르산 연작을 보면 후기로 갈수록 풍경의 형태가 기하학적 도형에 가까워짐을 알 수 있다. 끊임없이 한 가지 주제를 그리고 그려낸 결과 대상을 단순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가령 사과나 오렌지는 구를 기본으로 하고, 통나무는 원기둥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풍경화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말년에 그린 <생 빅투아르 산>(1906)을 보면 집이나 나무 등의 풍경은 극도로 단순화되어 삼각형, 사각형의 형태로 나타나 있다. 산의 형태도 마찬가지다. 그는 기존의 화가들이 따르던 원근법 양식도 거부했다. 가까운 것을 크게 그리고, 멀리 있는 것을 작게 그리는 방식을 거부했다. 그림의 아래쪽, 가까운 부분은 어둡고 따뜻한 색으로 칠하고 멀리 위치한 산과 하늘은 차가운 계통의 푸른색으로 표현한다. 색채만으로 깊이감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세잔의 작품은 끊임없이 본질을 추구한 화가의 집념을 보여준다. 화가라기보다는 탐구자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들만큼 집요하게 대상의 본질적인 형태를 찾아내는데 주력했다. 끊임없는 반복으로 자연을 재구성한 그의 새로운 회화 방식은 당대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피카소 등의 입체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입체파 역시 대상을 여러 가지 기하학적 모양으로 단순화하고 다양한 시점으로 화폭에 담아내는데 주력하였다- 20세기에 발달한 추상 미술의 시작점 역시 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폴 세잔은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세잔의 삶 자체는 세속의 성공과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그의 예술 세계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노력이나 재능 어느 쪽이라 단정 짓기 어려운 ‘반복과 집념의 묵직한 힘’을 이 내성적인 화가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거듭된 시도와 끊임없는 탐구는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어낸 핵심 요소였다.
한 가지 행위를 거듭하는 것이 평범한 우리의 인생에서도 힘을 쓸 수 있을까. 되짚어보니 나에게도 같은 행위를 반복해온 역사가 있었다. 처음 교사로 부임했을 당시 수업 준비를 해야 했다. 가장 큰 과제였다. 나만의 방법이 필요했다. 많은 경우 정해진 양식(대개 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의 지도안을 작성하거나, 책이나 참고서를 들춰보며 단권화를 하거나 필기를 하며 수업 준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햇병아리 교사였던 나는 양식이 정해진 지도안을 만들어도 수업에 큰 도움을 얻지 못했다. 이미 교육 실습을 거치며 내 수업 실력이 형편없다는 사실도 확인한 뒤였다. 결국 찾은 방법은 수업에서 말할 내용-수업 도입부에서 아이들에게 할 질문, 수업의 내용, 마지막 마무리까지-을 전부 글로 풀어쓰는 것이었다. ‘오늘의 수업은 ○○에 대한 부분입니다.’로 시작하는 이야기 형식의 글이었다. 개념에 대한 설명, 질문, 개념과 개념 간의 관계, 적절한 예시 등 수업에서 할 말을 전부 글로 풀어쓰며 타이핑했다. 주말마다 수업 차시만큼 준비했으니 매주 대략 2~4편 정도의 글을 쓴 셈이다. 월요일이 마감인 일종의 글쓰기였다. 교과서와 참고 자료를 전부 뒤적인 후에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썼으니 시간은 6~7시간 정도 걸렸다.
솔직히 이 과정을 미화하고 싶지 않다. 당시에는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수업 준비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교사가 수업 준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지만, 주말 동안 준비에 긴 시간을 투자한다고 해서 수업이 늘 성공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수업 준비를 하고 싶었지만 별 수 없었다. 이 방식으로 준비를 하지 않으면 교실에 들어가서 아예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다른 방식으로 수업 준비를 해가면 말을 더듬기 일쑤였다. 방학 때와 시험 기간을 제외하면 수업 준비를 위해 1년에 100편 정도의 글을 썼다. 휴직 전까지 교사 생활을 한 것이 대략 10년 정도이므로 10년 동안 900편~1000편 정도의 글을 쓴 셈이다.
교사 6년 차 정도 되었을 때 우연한 기회로 첫 공저를 쓰게 되었다. 아무런 자격 조건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원고를 쓰며 공부한 내용을 글로 빠르게 적어내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글재주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마감을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시나 소설 등의 순수 창작의 영역은 다른 차원의 일이겠으나 공부한 내용이나 일상적인 이야기는 말하듯 글로 적어내기가 수월했다. 매주 수업준비를 위해 할 말을 글로 풀어 썼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글쓰기에 도움이 된 것이다.
‘노력하면 반드시 꿈을 이룬다’는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재능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러나 재능으로 모든 것을 귀결시켜 타인의 성공을 해석하면 내 모습이 초라해보이고 자괴감이 들기 쉽다. 피카소나 모차르트, 김연아 급의 정상에 목표를 두지 않는다면, 재능보다 '시도'와 '반복' 쪽에 무게를 두어 해석하는 것이 낫다. 개인적으로 ‘노력’이라는 무거운 이름은 붙이고 싶지 않다. 노력하면 반드시 성과가 따라온다는 생각에 몰입하면 오히려 힘들어진다. 시야가 좁아지고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금세 지치기 쉽다. 억울해지기도 한다. ‘시도’와 ‘반복’ 정도로 이름 붙이고 싶다. 아니, 이름을 무엇이라 붙이든 조금이라도 가볍게 여기고 싶다.
노력도 재능도 꿈을 이루는데 어느 정도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운-이 단어에 사회구조적 요인이나 환경이라는 요소까지 포함시키고 싶다-과 타이밍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노력이나 재능만으로 꿈을 이룬다 생각하면 성공했을 때 오히려 자만하기 쉽다. 우리는 자신의 성공을 잣대로 남에게 ‘노력이 부족하다. 더 치열하게 노오력해라’ 충고하거나 희망 고문하는 사람들을 익히 보아 왔다. 자신의 재능이나 노력만으로 성공했다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어차피 성공의 순간은 노력뿐 아니라 운과 타이밍 모든 요소가 결합해 우연히 찾아 오는 경우가 많다.
다만 시도를 거듭하며 꾸준히 한 가지 행위를 유지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죽을 만큼 노력해본다’ 정도보다 ‘시도 횟수를 열심히 늘려본다’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야를 넓혀 다른 길도 살펴보면서 꿈을 위한 시도를 꾸준히 지속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배우 오정세가 ‘동백꽃 필 무렵’으로 상을 탈 때 이야기한 수상소감은 그런 면에서 의미가 깊다.
지금까지 한 100편 넘게 작업을 해왔는데, 어떤 작품은 성공하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심하게 망하기도 하고, 또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좋은 상까지 받는 작품도 있었는데요. 그 100편 다 결과가 다르다는 건 좀 신기한 것 같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 100편 다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이 열심히 했거든요.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제가 잘해서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니고, 제가 못해서 망한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는 열심히 사는 보통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은 세상은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꿋꿋이, 또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결과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거나 지치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 일을 계속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 그냥 계속하다 보면 평소에 똑같이 했는데 그동안 받지 못했던 위로와 보상이 여러분을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시도 자체가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무리 해도 헛발질하며 시간 낭비하는 것 같은 마음에 전부 놔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어차피 재능이 없어보이거나, 애매한 재능만 가진 듯 싶어 모든 노력을 관두고 싶은 순간도 온다. 이럴 때는 시도를 계속해 성공 확률을 높이는 중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첫 책이 한창 잘 팔리지 않을 때 –지금은 그때보다는 잘 팔린다- 그런 생각을 했다. 책을 내려 계속 시도하다 보면 잘 팔리는 책도 하나쯤 나오지 않을까. 본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글쓰는 사람으로 남지 않을까. 지금도 책이 나올 시점쯤 되면 안 팔릴까 봐 걱정부터 앞선다. 원고 투고를 할 때도 조마조마한 마음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시도 횟수를 늘린다는 것에는 확실한 의미가 있다 생각한다.
시도를 거듭하며 자신의 방향이 맞는지 탐구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나 역시 세상의 잘 팔리는 책들을 질투하며 해당 도서의 컨셉이나 아이디어를 계속 살펴보는 편이다. 투고하여 연락 온 출판사에서 글의 깊이가 너무 얕다는 이야기를 듣고 (물론 우회적인 방법으로 언급했다) 어떻게 해야 글의 깊이를 찾을 수 있는지 다른 책을 보며 연구한 적도 있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물론 시도를 거듭한다 해서 반드시 꿈을 이루고 성공할 수 있다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발질은 아니다.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시도해본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인생에 도움이 된다. 꿈을 포기해도 그 분야가 취미로 자리 잡아 인생이 풍요로워질 수도 있다. 시도를 거듭하며 얻은 통찰을 다른 분야에 써먹을 수도 있다. 길을 가다 보면 샛길도 나올 수도 있고 샛길을 따라가다 더 재미있는 기회를 만날 수도 있다.
이미 꿈을 이루어 빛나 보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뛰어난 재능 덕분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당신보다 먼저 시도를 해 꿈에 이르렀거나, 그 사람이 지금 최고의 운을 만난 시점일 수도 있다. 당신보다 그저 시간대가 앞섰을 뿐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트랙과 시간대가 존재한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사람 운명이니까.
지금까지 화요일 오전에 글을 발행해 왔는데 다음주부터는 화요일 저녁 8시~10시 사이에 글을 발행하려 합니다! 한국의 오전 시간이 제가 사는 나라에서는 새벽 시간대라 바이오리듬(?)에 약간 무리가 있어 ㅎㅎ 시간을 바꾸려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