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들로부터 ‘배낭여행 절교 썰’을 들을 때가 있다. 절친한 친구와 단 둘이 장기 배낭여행을 갔다 절교했다는, 비교적 익숙한 클리셰다. 대부분 이야기의 패턴이 비슷하다. 서로 죽고 못 살 정도의 친구였고 겹겹이 쌓인 우정을 믿었기에 함께 떠났는데, 의외의 지점에서 갈등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물 한 모금을 나눠먹는 문제나 여행 경로나 행선지를 둘러싼 의견 차이로 사소한 다툼이 벌어진다. 이 사소한 갈등은 여행지에서의 다툼으로 이어지고, 결국 관계 끊기에 이르기도 한다. 10여 년의 우정은 아무 소용없었다며 친구와의 사연을 읊는 이들도 있었다.
절친과의 배낭여행에만 해당하는 얘길까. 오랫동안 축적해 온 친분이나 상대에 대한 정보, 깊어진 감정이 무색해지는 순간을 가끔 만난다. 결혼 뒤 배우자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될 때가 그렇다. 내가 결혼 전 알던 연인이 대체 이 사람이 맞는 건가 아리송한 감정을 만날 때가 있다.
역시 세상은 지극히 공평한지, 나만 그런 감정을 느낀 건 아니었나 보다. 하루는 남편이 마블 시리즈 영화 제목을 하나 대며 우리 연애 시절 함께 본 영화 아니냐고 물었다. 연애 시절 개봉한 영화는 분명했지만 본 기억이 흐릿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 다른 여자랑 본 영화인가(?)" 갸웃거리던남편은, 갑자기 수수께끼가 풀린 듯 촌철살인 한 마디를 던졌다. “아, 연애 때 너랑 지금 너는 다른 사람이잖아. 너 말고 다른 여자랑 본 영화 맞네.” 결혼 전 나는 남편에게 최대한 해맑게 웃는 여자였을 테니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확실히 연애 시절의 나는 '해맑게 웃기 기술 보유자(!)'였다)
이 정도의 유머야 웃고 넘어갈 소재지만, 가끔은 관계의 가변성이 상처나 좌절로 이어지는 일도 생긴다. 지인의 예의 바른 웃음을 믿고 함께 자취를 했는데 견디기 어려운 생활 방식 차이를 만나 좌절할 때가 있다. 오랫동안 알던 친구와 함께 일을 해보니 업무 파트너로서는 손발이 맞지 않는 순간도 만난다. 학창 시절에는 아무 장벽 없이 어울린 친구였는데, 성인이 된 후 사고방식이나 대화의 방향이 정반대라 만남을 이어가기 어려울 때도 있다. 차갑고 야속한 인간관계, 식어가는 서로의 마음을 탓하며 장탄식을 내뱉는 경험. 그런 경험을 건네 들을 때면 의문이 솟는다. 변치 않는 관계와 사람이란 거, 세상에 있긴 한 건가.
수수께끼 같은 등장인물의 관계, 에두아르마네의 <철로>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 1832-1883).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예술가다.
에두아르 마네의 모습
유복한 법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고전주의 역사화가 쿠튀르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러나 이단아의 기질이 있었는지 마네는 스승에게 반발하며 견습생 생활을 끝낸다. 1859년부터는 파리 살롱전에 출품을 했지만 잦은 낙선을 겪는다.
단순히 낙선했을 뿐 아니라 화가는 색다른 시선으로 다양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특히 1860년대에 발표한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는 비평가와 대중들로부터 커다란 비판을 받는다. 두 작품에는 부끄러움도, 신비로움도 거둔 채 정면을 응시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신화나 역사도 아닌 일상을 배경으로 다룬 작품에서 나체 여성을 등장시킨 건 일종의 파격이었다. 이 파격으로 인해 마네의 작품들은 상스럽고 음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좌)와 <올랭피아>(우) @wikiart
마네는 이처럼 새로운 관점으로 작품 속에 색다른 구도와 인물을 등장시켜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예술가였다. 그의 1873년작 <철로> 역시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다.
<철로>(에두아르 마네, 1873) @wikipedia
작품 속에는 두 인물이 자리해 있다. 긴 머리의 젊은 여인과 흰색 원피스를 입은 어린 소녀. 무릎 위에 책을 펼친 여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소녀는 올림머리를 한 채 철로 된 울타리를 잡고 무언가를 구경하는 중이다. 어두운 색의 옷을 입은 여성과 밝은 색의 옷을 입은 소녀의 모습. 대조된 색감이 화면 속에서 빛난다.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는 혼란을 느꼈다. 제목이 <철로>인데 철도도 기차도 화면에는 등장하지 않으니까. 작품 이름을 잘못 봤나,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소녀가 붙잡고 있는 철책 바깥,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본 후에야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다. 아마도 소녀는 힘찬 연기를 내뿜으며 철로를 달린 증기기관차를 구경하는 중인 듯하다.
그러나 제목의 정체보다 궁금했던 건 그림 속 두 등장인물의 관계였다. 두 인물의 구도가 어딘지 아리송하고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을 쥔 채 정면을 보는 여성과 뒤를 돌아서 철로를 구경하는 올림머리 소녀. 둘은 대체 어떤 사이인 걸까?
일단 두 사람을 모녀 사이로 설정해 아주 전형적인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엄마와 아이가 나들이를 나와 철로를 구경하는 풍경 정도로. 그러나 모녀라고 하기에는 그 심리적 거리가 너무 멀어 보인다. 특히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룬 여타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철로>는 무척 독특한 구도를 띄고 있다.
메리 카사트의 <젊은 엄마의 바느질>(1902, 좌)와 마네의 <철로>(1873, 우). 두 작품 모두 젊은 여성과 여자 아이가 등장하지만 그림의 구도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모녀를 화면에 담을 때 서로를 안고 있거나 엄마가 아이를 돌보는 모습을 그린 경우가 많은데 마네의 작품 속 두 사람 사이는 약간 붕 뜬 듯 무심해 보인다. 시선도 동작도 다르고 친밀감이란 걸 느끼기 어렵다.
관계를 다르게 설정해 그림을 보며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만약 두 사람이 가정교사와 학생 정도의 관계라면? 그렇다면 두 인물의 다른 곳을 보는 시선,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가 비교적 덜 어색하게 느껴진다. 완전히 다른 잣대를 들이댈 수도 있다. 두 사람을 서로 처음 본 사이, 어쩌다 우연히 한 공간에 들어선 사람들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저 우연히 만나 한 캔버스에 담긴 관계. 이렇게 본다면 이 얄팍해 보이는 관계도, 두 사람의 멀찍한 간격이나 무심한 거리도, 전혀 어색하거나 무심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작품의 해석을 정답처럼 내놓기는 어렵다. 마네는 허구나 교훈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현실을 그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철로>란 이름을 붙이고 두 인물을 등장시키지만, 화가는 전형적인 구도나 배경을 집어넣지 않았다. 책과 강아지와 멀리 보이는 기차선로만이 소품과 배경으로 자리해 있을 뿐이다. 젊은 여성과 아이의 관계에 어떤 틀도 덧대지 않고 무심한 사실을 드러낸 그림. 마네의 작품답게 <철로>역시 관람자의 머릿속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
관계의 가변성을 인정하는 여유
<철로> 속 두 등장인물의 관계는 보는 이에게 생각 거리를 던진다. 교훈이나 고정관념의 틀을 섣불리 들이대지 않는다면 두 사람은 각자의 영역에 자리한 채 그저 다른 곳에 집중해 있을 뿐이다. 자신의 관심거리와 할 일에 충실한 두 사람의 관계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좋다- 나쁘다', '친밀하다- 거리감이 있다'는 잣대나 평가는 덧붙일 필요도 없다.
한편으로 작품을 통해 사람 간 심리적 거리와 간격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관계에 따라 사람 간의 자연스러운 간격과 거리도 달라진다. 미국의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 1914~2009)의 이론에서 사람 간 간격의 답을 얻을 수도 있다. 그는 저서 『숨겨진 차원』에서 사람들이 친밀도와 심리적 거리에 따라 어떻게 타인과의 공간의 크기를 선택하는지 밝혀내고, 이 심리적 거리를 네 가지로 분류했다.
에드워드 홀의 생전 모습(좌)과 그가 이야기한 '친밀도에 따른 심리적 공간'(우 @http://webzine.dgucenter.or.kr/article/regen_directio
(1) 첫 번째 거리는 46cm 이내로 가까운 관계로, 각 개인의 간격과 영역이 좁다. 주로 가족이나 연인처럼 서로의 숨결, 온도나 냄새까지 나누는 밀접한 관계에 해당한다.
(2) 두 번째는 46cm~1.2m 거리로, 팔을 뻗었을 때만큼의 길이다. 친구나 지인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과 가지는 거리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정도의 간격을 뜻한다.
(3) 세 번째는 1.2미터에서 3.6미터 정도의 거리로 사회적이고 공식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 나누는 거리를 말한다. 일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대화 도중 참여와 이탈이 어느 정도 자유롭다.
(4) 네 번째는3.6m를 넘는 거리로 공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무대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의미하기도 하고, 강연자와 청중 사이의 거리에 해당하기도 한다. 이 거리에서 말하는 이의 목소리는 커지고 몸짓 등 비언어적 의사소통으로 감정과 의견이 전달된다.
가끔생각한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상처는 대체로 이 거리감의 착오에서 오는 것 아닐까. 가령 공적인 거리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밀접한 신체 접촉을 해오면 불편감을 느낀다. '일로 만난 사이'에 내 개인적인 사정이나 심경을 모두 이해해 주길 바란다면 실망감을느끼기 쉽다.
물론 사람과 만날 때마다 기계적인 영역 가늠이나 금 긋기를 의식적으로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모든 인간관계에 일률적인 거리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것.가족처럼 밀접한 관계로 맺어진 회사, 연인처럼 가까운 친구를 입으로 부르짖을 순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런 관계가 성립하긴 어렵다. 기본적인 거리감이 다르니까.
홀의 연구 결과에서 또 다른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같은 사람과의 관계라도 상황이나 조건이 바뀌면 서로 간의 거리가 달라지고, 이 때문에 거리 가늠에 혼란이 와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배낭여행에서 절교하는 친구들이 그렇다. 오랜 친구와는 개인적 거리 정도를 유지하면 되었지만, 장기 여행을 하면 일상을 나누는 일시적 동반자 관계가 된다. 가까워진 거리감 때문에 혼란이 올 수 있다. 친한 지인이 사업 파트너가 될 경우 공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기존의 개인적 거리를 적용할 수 없으니 괴리감이 오기 쉽다.
인간관계의 변화나 이별을 사람 간의 어긋남이나 상대 탓으로 돌리면 슬픔만 가중된다. '인간관계란 역시 부질없는 것’이라는 말만 되새기며 상처만 곱씹을 수 있다. 인간관계가 상처의 지뢰밭처럼 느껴진다면, 떠올려 봐도 좋다. 상대방과의 거리를 재정비해야 할 시점 아닌지. 적절한 거리감을 잊은 채 단 하나의 관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사회적인 거리의 사람에게 날 온전히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아닌지.차라리 상황과 조건에 따라 상대와의 거리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유연하게 인정하는 편이, 인간관계의 상처를 덜어준다.
1. TMI지만, 제가 5월 31일까지였던 청소년 책 원고 마감을 도저히 지키지 못해서 지금 모레(6월 8일)로 미뤄서 현재 많이 쫄리고(?) 편집자님께 여러모로 면목이 서지 않는 상태네요 ;;;(요즘엔 브런치에 들어오는 걸 막는 스마트폰 제어 앱 같은 걸 깔고 브런치에 안 들어오고 있었어요.ㅎㅎㅎ;;;)오늘 매거진 글은 지금 발행하지만 답댓글을 달고 이웃분들 글을 찾아가 제대로 읽는 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2. 다음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 글은 6월 20일(화) 저녁에 발행하겠습니다 :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6월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