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tv광이었다. 하교 후 집에 오면 애국가가 나오는 방송 종료 시간까지 tv를 보며 하루를 보냈다. 다큐멘터리나 뉴스는 애초에 관심 대상이 아니었고, 드라마나 영화, 예능을 주로 시청했다. 브라운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은 대개 비슷했다. 트렌디한 드라마 속에는 근사한 직업과 멋진 사랑을 거머쥔 이들이 등장했다. 주말 드라마에는 화목하게 웃으며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이 있었다. 자동차 광고 속에는 해안도로를 멋지게 드라이브하며 웃는 남녀가 있었고, 아파트 광고 속에는 높은 곳에서 바깥에 펼쳐진 도시 풍경을 바라보며 차 한 잔을 즐기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어른이 되면 당연히 누리는 평범한 것들이라 생각했다. 그 '평범'의 잣대를 들이대며 이따금 나와 우리 집 사정을 돌아봤다. 그들에 비해 나는 어렸고, 미숙했다. 우리 집 사정은 풍족하지 않았고, 가족이 모일 시간도 부족했다. TV 속 사람들과 정반대였다. 궁금했다. 아, 저렇게 평범한 삶은 언제 누리는 걸까? 어른이 되면 저 정도 삶은 당연히 누리는 거겠지?
평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건 드라마 청춘시대 속 윤진명(한예리 역)의 대사를 듣고 나서부터다. 명문대생이지만, 쉴 틈 없이 아르바이트와 취업 준비를 병행하는 처지의 윤진명은 말한다.
회사원이 될 거야. 죽을 만큼 노력해서 평범해질 거야. 나는 지금 평범 이하다.
드라마 <청춘 시대> 속 평범을 꿈꾸는 대학생 윤진명 @jtbc
나이를 먹을수록, 사회생활을 할수록 윤진명의 대사를 실감했다. 평범한 삶은 당연스레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비범하게 노력해야 하는 것, 닿기 어려운 무언가였다.
평범함의 비범함을, 최근 들어 자주 되새기게 된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삶을 곳곳에서 관찰하게 되면서. 리얼리티 예능이나 브이로그가 유행하고, SNS에서 생방송으로 다른 이들의 삶을 엿보는 만큼 '평범'에 의문이 생겼다. 저 정도 지내야 평범한 건가?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저런 웃음을 지어야 '평범한 행복'을 손에 잡은 걸까?'평범'이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시대가 된 것 아닐까. 가끔 의문이 생겼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이미지의 배반(르네 마그리트, 1928-1929)
화면에 파이프가 하나 그려져 있다. 아래에는 글귀가 쓰여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파이프 그림을 그려놓고서 파이프가 아니라니? 이 무슨 모순된 이야기인가. 작품을 보는 감상자의 머릿속에는 혼란스러운 물음이 떠오른다.
작품은 20세기 초현실주의 대가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1929)이라는 작품이다. 벨기에 출신의 예술가 르네 마그리트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는 작품 세계를 보여주던 인물이었다. 논리와 철학에 밑바탕을 둔, 독특한 물음을 던지는 것. 그의 작품 세계가 지닌 특징이었다. 특히 이미지와 언어, 현실 사이의 괴리와 공간에 대해 밝히는 작품이 많았다.
<이미지의 배반> 속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그림 속 파이프는 2차원의 세계에 속해 있다. 그림 속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3차원의 세계와 2차원(그림 속 파이프)은 엄연히 다르므로.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마그리트의 다음 말 역시 이러한 의도를 드러낸다.
“당신들은 내 파이프에 담배를 채울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내 그림 아래 ‘이것은 파이프다’라고 썼다면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었을 것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우리의 착각을 일깨워준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흔히 실재와 같거나 실재의 완벽한 재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현실과 괴리된 2차원에 존재하는 이미지일 뿐이다.
이미지가 현실의 대상(원본)을 정확하게 재현하거나 지칭한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수많은 그림은 실재하는 대상과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최근에 우리가 수시로 접하는 인터넷 세상 속 이미지나 동영상도 마찬가지다. 각종 미디어나 SNS를 통해 가상현실이 실재하는 현실인 듯 온라인을 떠돌아다닌다.누군가의 근사한 사진,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듯한 삶, 그러나 엄격히 따지자면 이는 타인의 삶을 미화하고 편집하고 축약한 것이다. 그 모두가 이미지나 동영상일 뿐 엄연히 말해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 1964)
언어와 사물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작품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파이프’라는 단어는 세상에 실재하는 모든 파이프의 본질이나 특성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일까? 이를 파이프가 아닌 ‘책’이나 ‘우산’ 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지칭하기로 약속했다면 아마 우리는 위의 사물을 그저 책이나 우산 따위로 불렀을 것이다. 현실 속 무언가를 지칭하는 언어는 실재하는 대상의 본질과 큰 관계가 없다.
우리가 흔히 입에 올리는 단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행복'이나 '평범'이나 '가족'이라든가 '사랑' 등의 단어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그러나 언어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단어들을 접하며 몇 가지 장면을 떠올린다. 가령 '평범'이라고 하는 단어 안에 수많은 이미지를 구겨 놓고 있는데 (특정한 직업이나 가정의 모습, 일정 이산의 자산 상태 등) 그 장면의 근원을 따져 보면, 미디어나 SNS, 타인의 삶 몇몇 장면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가상 세계 속 ‘평범’이나 ‘행복’의 이미지에 속아 넘어가는 경우,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
'평범함'의 잣대에 질문 던지기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은 감상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인식하고 있는 수많은 단어나 이미지는 원본이 존재하는 것인가. 또는 원본의 본질에 얼마나 닿아 있는 것인가.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평범이나 행복, ‘잘 사는 것’의 이미지에 속아 넘어가기 쉬운 시대다. 우리는 이제 24시간 타인의 삶을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 유명인이나 인플루언서의 가정생활, 소유물, 연애 상황, 인간관계가 쉴 새 없이 눈에 띄기에, 이런 장면의 평균치가 평범의 기준으로 보이기 쉽다. 주변을 맴도는 이야기도 영향을 미친다. 평범한 대학에 가서 평범한 회사에 취업하고 평범한 행복을 꿈꾸며 살라는 조언이 난무하지만, 실상 그러한 삶은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대다수다. 그럼에도 평범에 닿지 못하면 스스로를 낙오자로 느끼기 쉬운 시대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평균치의 행복이라 생각하는 기준 대다수가 ‘소비’를 부추기기 위한 광고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어떤 크기의 아파트에 살고, 얼마 이상의 연봉을 받으며, 일 년에 몇 번쯤 여행을 가는 따위의 ‘평범’과 ‘행복’의 기준. 대다수가 광고나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잣대일 가능성이 높다. 그 평범을 당연한 기준으로 만들어 불안을 부추기는 교묘한 상술이 숨어 있을 가능성도 존재하고.
평범이나 행복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면, 그 말의 의미를 한 번쯤 되짚어 봐도 좋다.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단어와 그에 딸려오는 이미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파트나 외식업체 광고 속에 자리한 평범이나 행복을 믿고 따르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던져 보면, 닿지 못할 평범함을 갈구하며 불행한 일은 조금 줄어들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미셸 푸코 저/ 김현 옮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고려대학교 출판부, 2010
박정자, <시뮬라크르의 시대>, 기파랑, 2019
1. 내일 오후에 학교 강연이 하나 있어서 대댓글을 다는 것도, 이웃분들 브런치 읽고 답 남겨드리는 것도 내일 저녁이나 모레 정도에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기쁜 소식과 좋은 글 전해주시는 이웃분들께 더 빨리 찾아가고 싶은데 정말 많이 아쉽기도 합니다. 예상한 것보다 7월까지 정신이 없네요ㅠㅠ 오늘 글도 충분히 퇴고하지 못한 상태라 그 역시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