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랑선생 Dec 01. 2020

위로받고 싶어 카톡 친구 목록을  뒤적이던 밤

누군가에게 기댈 줄 아는 것도 용기다  

간절히 위로받고 싶었지만 위로를 청하지는 못했던 밤       

 

 카톡에 떠 있는 친구 목록을 1시간 이상 뒤적거린 밤이 있었다. 불과 몇 달 전 일이다. 몸이 아팠는데,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낀 날이었다. 마음은 힘겨웠는데 해야 하는 일도 밀려있었다. 외로움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힘겨운 마음을 호소하고 싶었다. 위로받고 싶었다. 카톡을 열어 친구 목록을 위에서 아래로 스크롤하며 훑어보았다. 나를 위로해줄 사람이 있을까. 내 마음을 털어놓을만한 이가 있을까. 한국에 있는 친구나 지인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이 나라에 와서 알게 된 지인들 역시 아이를 재우고 잠들어 있을 때였다. 물론 깨어 있을 친구도 있을 테고, 운이 좋게도 나를 위로해줄 좋은 친구들 역시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섣불리 연락할 수 없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남에게 기대지 말고 되도록 자립적으로 살자는 나의 인생 모토 때문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제대로 혼자 설 수 있는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멘탈이 강한 인간이라 믿었다.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은 의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늘 누군가와 무엇을 같이 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없으면 한 발 짝도 내딛지 못하는 유형의 인간이 되어버릴까 두려웠다.

  나름대로 바람직한 인생 모토였다. 인간은 결국 무소의 뿔처럼 홀로 자신의 삶을 버텨나가야 하는 존재니까. 그러나 때때로 이 ‘자립적 인간’에 대한 환상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고통과 외로움을 어디엔가 호소하고 싶을 때, 어디에도 그것을 털어놓을 수 없는 유형의 인간이 된 것이다.


두 번째는 남들에게 민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었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었다. 나의 우울함과 외로움이 누군가를 더 우울하게 만드는 상황이 싫었다.    


 세 번째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누군가에게 내 서러움, 고통, 외로움을 털어놨다가 더 상처를 받게 될 수도 있으니까. 상대의 반응이 시원치 않거나 귀찮아할 경우 내가 더 외롭고 서러워질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내 힘든 사정이 '딱한 사정'으로 변하여 누군가의 가십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결국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처절하게 외롭고 서러운 순간이 오자 그동안의 인생 모토와 굳은 다짐, 상처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사람에게 상처 받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던 나였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친구 목록을 한참 뒤적이다 깨닫게 되었다. 위로를 받고 싶을 때, 상처를 드러내어 울고 싶을 때 나는 누구에게도 쉽게 기대지 못하는 바보였음을.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글을 온라인에 올려 대지만 정작 내 서러움과 상처를 드러내는 일에는 누구보다 서툰 인간이라는 사실을. 눈물을 줄줄 쏟아냈다. 예전의 나였다면 가장 찌질하게 생각했을 스스로의 모습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슬픔과 불안을 견디어 나가는 힘   

  

  

월터 랭글리(Walter Langley)의 모습 @Wikipedia

 월터 랭글리(Walter Langley.1852~1922)는 19세기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영국의 노동자 계층에서 태어났다. 슬럼가에서 시작된 삶이었다. 어릴 때부터 배고픈 이들의 모습, 질병과 죽음 등 가난의 풍경에 익숙했다. 그러나 미술에 대한 그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어머니 덕분에 그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880년 랭글리는 뉴린(Newlyn)이라는 어촌에 가서 새로운 풍경을 찾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어촌에서 어민들의 일상을 담으며 인상적인 작품들을 그려낸다. 바다에 나간 배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여성들의 모습, 배로 도착한 생선을 무거운 광주리에 담아 나르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등 그가 화폭에 담아낸 것들은 가난한 이들의 힘겹지만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1886)과 <배를 기다리다>(1885)  @Wikipedia



 그는 뉴린에서 그린 작품들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세계관을 담아내는 한편 상업적 성공도 거머쥔다. 랭글리가 뉴린에 정착한 이후 이에 감응을 받은 화가들 역시 뉴린으로 이사하여 작품 활동을 벌인다. 이곳은 프랑스의 바르비종처럼 화가들이 모여 작품 세계를 키워나가는 곳이 되었으며 뉴린파(Newlyn School)라는 말이 생기기도 한다. 랭글리의 명성은 유럽 곳곳에 퍼졌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아름답고 진정한 예술작품으로 랭글리의 그림을 꼽기도 했다.      

 

 랭글리의 대표작 <슬픔은 끝이 없고>(원제: Never Morning Wore to Evening but Some Heart Did Break)이라는 그림이다.

<슬픔은 끝이 없고>(1894. 월터 랭글리) @Wikipedia


  고요한 바다를 배경으로 한 여인이 얼굴을 감싸 쥔 채 흐느끼고 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자세 속에서 깊은 절망이 엿보인다. 가족의 목숨을 바다에 뺏긴 것일까. 힘겨운 삶의 고통에 지친 것일까. 사연은 알 수 없으나 그녀에게 큰 시련이 닥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슬픔에 가득 찬 그녀의 감정과는 다르게 뒤에 펼쳐진 바다는 평온해 보인다. 등대의 불빛이 조용히 바다를 밝히고 있다.


 무심해 보이는 바다와는 다르게, 젊은 여성을 위로하고 있는 노년의 여성이 보인다. 그녀는 가만히 젊은 여성의 등을 쓰다듬고 있는 중이다.  많은 말을 건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랜 세월 인생의 지혜를 쌓은 듯 보이는 노인은 절망에 빠진 이를 그저 토닥이고 있을 뿐이다. 애통한 그녀의 표정에서 깊은 공감을 느낄 수 있다. 노인의 손에 담긴 온기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에게도 깊이 전해져 온다.    


 제목처럼 삶의 고통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다. 작품 속에서 유일한 희망을 보여주는 것은 위로를 건네는 노인의 존재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쳐오거나 깊은 외로움과 절망에 사로잡힐 때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위로와 온기다. 상처 받은 마음을 숨기지 않고 어딘가에 드러내 보이고 누군가가 이에 공감해줄 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슬픔은 점차 끝을 보인다.  



누군가에게 기댈 줄 아는 용기     

    

  많은 사람들이 자립적이고 정신력 강한 인간형을 선호한다. 나도 근본적으로는 그런 인간형을 동경한다. 늘 자립적 인간을 꿈꿔왔고 실제로 내가 그런 인간형이라 자부한 시절도 있었다. ‘나는 쿨하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야’ 내 깊은 자부심의 근원이었다. 당시에는 내가 좀 특별한, 항상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고 오만이었다.


 내 상처를 밖으로 드러내는 일은 금기시했다. 내 힘든 상태를 드러내는 것은 지극히 창피한 일이고 민폐라 생각했다. 그럭저럭 초연한 인간의 표정을 짓고 살아왔기에 민낯을 드러내는 일에도 인색했다. 타인에게, 심지어 나에게조차 깊은 상처를 드러내고 울지 못했다. 덕분에 자립적 인간을 넘어선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철저하게 외로웠던 몇몇 시간을 지나고 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의 두 발로 삶을 버티어나가는 사람은 멋지다. 그러나 내가 늘 쿨하고 멋질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했다. 나 역시 외롭고 서럽고 때때로 상처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리 내어 울어도 되며, 누군가에게 기대도 됨을 알게 되었다. 상처를 드러내며 울고 타인에게 기대는 사람이 약한 사람은 아니다. 멍청하거나 의존적인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이미 스스로의 삶을 감당하고 버티어내고 있는 인간이라면, 한두 번쯤 누군가에게 외로움과 고통을 호소해도 괜찮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힘겨운 마음을 털어놓을 필요가 있다. 인간관계는 삶의 ‘독’이자 ‘약’이다. 결국은 나를 위로해줄 믿을 만한 누군가가 필요하다. 깊은 친분을 유지하는 가족이나 친구에게만 사정을 터놓고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 고민과 상처를 드러내는 글을 올렸는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의 따뜻한 댓글에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누군가 인터넷에 올려놓은 글이나 노래, 또는 책이나 그림에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사실 그 모든 것은 사람의 작품이다. 누군가의 온기가 온라인이나 작품을 통해 건네져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누군가의 온기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을 위로해줄 만한 사람도, 글도 음악도 없다면 스스로에게 기꺼이 위로받아야 한다. 주의할 점은 있다. 나에게 가혹한 자아는 넣어두고 나에게 너그러운 자아를 꺼내 위로받아야 한다. ‘너 많이 외로웠구나.’ ‘너 많이 슬펐구나.’ ‘상처 입었구나. 그럴만해’라고 속삭여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외로움과 고통과 불안이 느껴지는 날은 누구에게나 있다. 스스로가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있는 섬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외롭고 슬픈 당신이 허약한 사람은 아니다. 외롭고 슬프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최악은 외롭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하고 멘탈이 약하다며 스스로를 탓하는 것이다.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날도 존재함을 인정하자.


외롭고 힘겨운 날, 다른 이들의 기분과 상황까지 헤아리고 배려하는 당신은 훌륭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당신이 민폐를 끼쳐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기댈 줄 아는 것도 용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