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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Aug 15. 2023

인생이 쉽게 망하지 않는 이유

흥망의 외줄 타기에서 살아남는 방법

 

 온라인 서점을 보다 내가 두 번째로 쓴 책이 절판된 걸 알았다. 4년 전 쓴 청소년 책 원고였다. 가족 여행을 가는 공항에서 핸드폰 메모장을 켜놓고 흥분 상태로 이 원고를 쓰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2020년에 출간된 이 책의 결과는 좋지 않았고, 결국 절판이 됐다.


 4년간 10권의 책을 다. 집필한 도서 중에 1만 부나 2만 부쯤 팔린 책도 몇 권 있고 1쇄를 전부 팔지 못한 책도 몇 권 있다. 10권의 책을 냈는데 결과엔 통일성도, 일관성도 없다.

 

첫 책을 쓸 때는 이렇게 일관성 없는 결과가 나올 거라 예측하지 못했다. 출간이 내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나중에 실망이 클까 기대감을 억누르려 했으나, 몹쓸 상상력은 이미 성공의 드라이브를 질주하고 있었다. 책을 내서 잘 되면 내 인생은 훨훨 날아가는 걸까? 육아와 살림의 회전바퀴를 벗어나, 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초보 저자의 대략 80%가 그러 하듯, 책을 한두 권 내도 인생이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음을 출간 후에 깨달았다. 심지어 당시엔 아무도 내 책에 관심조차 품지 않는 것 같았다. 에라 망한 건가. 이렇게 열심히 썼는데도. 이후엔 원고에 손대는 것조차 겁 날 때도 있었다. 열심히 썼는데도 안 되면 어떻게 하지? 회의감에 그날 쓰던 원고에서 손을 놓던 때도 있었다.     


 돌이켜보니 늘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외줄을 타듯 지냈다. 5년 전 처음 남편을 따라 해외로 가면서도 그랬다. 해외 생활에 대한 동경이 컸다. 이제 내 인생은 활짝 나래를 펼치는 걸까? 그러나 그곳에 가자마자 나는 외로움과 부적응에 시달렸고, 육아 우울증에 걸러버렸다. 코로나 시기, 가정 보육과 육아우울증, 향수병까지 덧대어졌을 때는 내 뇌가 하루에 5%쯤 망가져 가고 있다 생각했었다. 이곳 브런치에서 유랑 선생으로 브런치북 공모전 대상을 타고, 토해내듯 원고와 글을 쓰던 그 시기였다.

 

 2년 전, 비장한 각오를 하고 한국에 돌아올 때 나는 다시 내 삶을 활짝 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예전 한국에 있을 때의 나로 금세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귀국 후 오랜 시간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해외에서 보낸 우울한 시간의 후유증도 제법 오래 앓았다. 그럼에도 삶은 다양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외 생활동안 쓴 글과 책 덕분에 다음 원고와 기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가끔은 강연에 갔고, 인세 수입도 얻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교차하는 괴상한 시기였다.


 그러나 ()과 망(亡)으로 나뉘는 듯한 어떤 사건을 스쳐도 시간이 지나자, 삶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현재의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가끔은 여전히 마음의 후유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간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식재료를 사고, 줄넘기나 수영학원 방학특강 신청을 하고 숙제나 준비물을 챙겨주며 흘러간다. 그리고 다음 달이면, 수년 만에 직장에 복직해 7시 반마다 출근을 위한 버스를 탈 예정이다.

 

 돌이켜보니 흥한 책도 망한 책도, 해외 생활도 향수병이나 육아 우울증도 그 후유증의 그림자도,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탄 사건도. 더 거슬러 올라가 수능 성적이나 대학 선택, 어린 시절의 기억도, 그 모든 것들이 내 인생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어떤 것도 내 삶 전체를 망하게도 흥하게도 만들지 않았다.



인생을 껴안은 그림, 그랜마 모지스의 작품들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Anna Mary Robertson Moses. 1860~1961). 1860년 9월 7일 뉴욕주의 그린위치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10남매 중 셋째였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교실 한 칸짜리 시골 학교에 잠깐 다닌 것이 학교 경험의 전부였다.


그림을 그리는 그랜마 모지스의 모습

 


12살이 되자 애나 메리는 식모살이를 시작한다. 식사만 제공받으며 청소, 농장일, 음식 준비, 바느질 등의 노동을 15년간 이어간 생활이었다. 1887년에는 27세에 같은 농장에 고용되어 일하던 토머스 모지스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결혼 후 부부는 버지니아 주 스턴튼이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주변의 큰 농장 4곳을 돌며 일을 해 생계를 꾸려나갔다. 애나 메리와 토마스 부부는 성실하지만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다. 부부는 10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가난한 살림으로 5명이 병으로 사망했다.


 1905년, 이들 가족은 뉴욕주로 이사한다. 모지스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보고픈 꿈을 가졌으나, 그녀의 삶 대부분의 시간은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노동시간으로 흘러갔다. 1927년 60대에 접어든 뒤 남편 토머스 모지스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노년이 된 모지스는 생계를 이어가려 자수를 배웠다. 먹고살기 위해 바늘 끝으로 하얀 천 위에 그림을 그리듯 이불보를 수놓았다. 손재주가 힘을 발휘했다. 모지스가 수놓은 퀼트 이불보는 마을 주민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모지스의 손마디에 관절염이 찾아온다. 손가락을 정교하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 모지스는 자수일을 놓았다. 76세가 되어 동생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꿈꿨지만 하지 못하던 것을 70대에 이르러 시작하게 되었다. 모지스는 야외로 나가 잔잔한 시골 풍경과 소박한 일상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천진하고 소박한 에너지가 넘치는 그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그림을 2달러 정도의 가격으로 샀다.   


빨래 널기(그랜마 모지스, 1951)

 

1938년, 뉴욕에 사는 루이스 J. 칼도어라는 미술품 수집가가 이 마을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우연히  길거리 약국에 걸려 있는 모지스의 그림을 발견했다. 흥미를 느낀 칼도어는 하나에 3달러에서 5달러를 주고 그녀의 작품 10여 점을 샀고, 이를 뉴욕 맨해튼의 고급 화랑가에서 전시했다. 그리고 전시 첫날 그림이 매진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1940년에는 ‘한 농촌 부인의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이 열렸고 반응이 좋았다. 한 폭에 3~5달러씩 하던 그랜마 모지스 할머니의 작품은 8천 달러에서 1만 달러로, 훗날에는 100만 달러까지 값이 올라갔다.


 한 회사는 1947년 계약을 맺어 모지스의 작품을 크리스마스 카드 등으로 제작했다. 점차 천, 앞치마, 벽지, 아동복 등 다양한 상품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알만한 작품이 되었고, 이제 애나 메리는 그랜마 모지스(Grandma Moses)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랜마 모지스가 표지 모델로 등장한 타임지(좌)와 그녀를 기념해 발행된 우표(우)


1952년에는 그녀의 일생을 소재로 한 자서전 ‘내 삶의 역사(My Life’s History/ 한국어판 제목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가 발간되었다. 자서전에서 모지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삶의 스케치를 매일 조금씩 그려보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돌아보며 그저 생각나는 대로,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썼어요.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지요. 다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일들입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니 하루 일과를 돌아본 것 같은 기분입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마쳤고 내가 이룬 것에 만족합니다.나는 행복했고, 만족했으며,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알지 못합니다.
 삶이 내게 준 것들로 나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어요. 결국 삶이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랜마 모지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중에서
아름다운 세상(1948, 그랜마 모지스)

 

그랜마 모지스는 1961년 12월 13일 뉴욕에서 101세로 사망한다. 죽음 직전인 100세 때도 그녀는 25점의 그림을 그려 내며 충실한 삶을 살았다.



쉽게 부서지지 않는 삶   


    

 그랜마 모지스의 소박한 글과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녀는 삶 전체를 통해 '뒤늦은 때란 없다'는 걸 보여준 롤모델이었다. 노년이 되어 새로운 삶, 새로운 빛을 찾은 인물로 대표되기도 한다.  

 

 그러나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78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모지스가 삶의 빛을 제대로 마주했다 해석한다면, 그녀가 식모살이를 하고 아이를 낳고 일하며 지낸 시간을 어둡고 모진 세월로 섣불리 규정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어떤 시간을 흐르던 그녀는 삶을 충실히 살아냈다. 모지스는 그 삶에 원망도 후회도 덧대지 않았다. 아마 그랜마 모지스의 삶을 결정한 건 불운이나 힘들었던 시간도, 행운의 시간도 아니었을 것이다. 삶을 껴안고 걸어간 그녀 자신이지 않았을까.


 그랜마 모지스처럼 모든 형태의 삶을 긍정하고 끝까지 열심히 걸어가라 말할 자신은 없다. '꺾이지 않는 마음'을 섣불리 외칠 만한 자격도 없다. 나야말로 이따금 마음이 힘들 때마다 과거 기억을 꺼내 들며 '꺾이는' 인간이니까. 세 살이나 네 살 무렵의 성장 과정을 꺼내 들고 '결정적 시기'를 잘못 보낸 게 내 삶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며, 불평불만을 일삼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삶의 거대한 이벤트나 특정 시기가 내 인생 전체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걸. 삶에는 다층적 퀘스트가 존재한다. 한두 개의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다고 삶의 평탄대로를 걸을 순 없다. 반대로 거대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거나 고꾸라졌다 해서 평생을 망망대해에 빠져 지내지 않는다. 망망대해에 빠지더라도 구명조끼 한 두 개쯤은 주어진다. 그리고 어떻게든, 일상은 돌아온다.


  삶은 흥과 망, 음지와 양지 그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고 흘러가는 오묘한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삶을 껴안고 희망을 말할 수 있다. 당장 내 처지가 비루하고 초라하게 느껴져도, 결정적 사건으로 삶이 깨진 듯 느껴져도 우리는 쉽게 망하지 않는 거니까. 인생은 한 번에 부서뜨리거나 망가뜨릴 수 있는 게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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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자님들!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 관련해서 말씀드립니다. 예전부터 말씀드렸지만 제가 9월에 본업(가르치는 일)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 매거진의 연재는 8월로 슬슬 끝을 맺으려 해요. 다음 발행일(8월 29일)에는 이 매거진의 연재를 끝맺는 글을 올리려 합니다.


 수년 만의 직장 복귀라 적응하느라 글 쓸 시간도 부족할 것 같고, 사실 내년 4~5월까지 쓸 원고들도 있고, 여러 가지 사정도 얽혀 있어요(응원하기 관련해 브런치에서 연재 파일럿도 제안을 살짝 받긴 했었지만 일단 지금은 복직하는 시점이라 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을 했어요)


 개인적인 심경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 에세이는 제 본업과 약간의 충돌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저의 경우 지인 분들, 가족들이 제 얘기를 읽는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다들 쿨하시거든요) 그러나 학생이나 학부모님들이 제 개인적인 삶이 담긴 글을 찾아와 읽는 건 또 다른 측면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여기서 멈추려고 합니다. 몇 개월 있다가 조금 다른 방향의 에세이나 글 연재로 찾아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림 매거진에 2020년부터 약 3년간 94개 정도의 글을 썼더라고요 (94번의 자발적 마감을 거친 셈이네요) 4년간 책을 몇 권 출간한 것보다, 제 책이 몇 부 팔린 것보다 이 매거진 연재를 계속한 것이 제 삶과 사고방식을 가장 많이 바꿔놓은 일이에요. 찾아와 읽어주신 분들 덕분에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 많았습니다. 다른 매거진 연재를 언제쯤, 뭘로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사실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아 몰랐는데, 얼마 전에 쓰고 싶은 주제도 대략  생각이 났어요. 직장 복귀 후의 여유를 단언할 수 없지만 몇 달 지나고 나서 다시 다른 연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다음 글(8월 29일) 이 글 발행 때 글쓰기에 이런저런 말씀을 건네드리려 해요. 늘 그렇듯 긴 글 읽어주셔서 깊이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평소에 인스타그램에 근황과 소식, 명화 카드뉴스 등을 그나마 자주 올리는 편이에요. 링크를 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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