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감각 기르기
오래전 대학 졸업 시기 즈음이었다. 임용 시험 후 학교 기숙사에서 짐을 빼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시험을 엉망으로 보았던 터였다. 1년간 나를 옭아매던 수험서를 어디 먼 곳에 떨궈버리고 싶은 심경으로 집에 도착해 보니, 엄마가 있었다.
비참한 감정이든 신나는 기분이든, 나는 민낯의 표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임용시험을 망친 뒤 느낀 슬픔, 막막함 같은 건 무표정 속에 숨긴 채 분주히 짐을 풀었다. 날 지켜보던 엄마가 갑작스레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가볍게 건넨 얘기였다.
“네가 4년 간 대학 잘 다니고 졸업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니. 등록금이 비싸지 않았으니 이렇게 다닐 수 있었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상심해 있는 나를 위로하는 말 같기도 했고, 엄마 스스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던진 한 마디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며칠 동안 생각해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다른 대학에 다녔다면, 당시의 우리 집 형편으로는 4년 간의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엄마의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용 시험 직전 가계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내가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어 학교를 다닐 만큼 생활력 강한 아이도 아니었고.
그러나 다행히 내가 다닌 학교는 첫 학기 등록금이 몇십만 원 수준인 국립대였다. (아무리 20년 전이라 해도 다른 학교의 경우, 한 학기 등록금이 200만 원을 넘어가던 시기였다) 무료라 해도 무방할 만큼 기숙사비도 저렴해서, 생활비를 아낄 수 있는 학교였다.
터덜터덜 기숙사에서 집으로 향하던 순간에는, 생에 감사할 일이 하나도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되짚어보니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등록금이 비싸지 않은 학교를 찾아냈고, 큰돈 들이지 않고 4년 간 대학에 무사히 다녔고, 졸업할 수 있었다. “나는 임용시험에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는 머릿속 기본 값을 빼고 나니 감사할 일이 꽤 있었다.
물론 생에 감사 한 번 표했다 해서 내 삶의 태도가 딱히 바뀌진 않았다. 이후 우리 집 사정은 꽤 나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투덜이 스머프로 자주 변신하는 인간이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감사 일기를 쓰는 시도를 해봤는데, 감사할 일이 잘 생각나지 않아 이틀 만에 때려치웠다. 해사한 얼굴과 생글거리는 표정을 품은 사람을 보면 질투심이 먼저 솟곤 했다. 저 사람은 인생에서 심하게 고꾸라져 본 적이 없는 거야. 그러니 저렇게 해맑지. 멋대로 판단하며 못난 질투를 반복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삶에서 몇 번씩 고꾸라져 본다는 걸 안 뒤로도, 그 얕은 실수를 하고 또다시 반성하곤 했다)
유치하고 서투른 감정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나지만 이제 어렴풋이 안다. 누군가의 생글거리는 얼굴이, 고통 없는 삶이나 얕은 사유의 증거가 아님을. 나와 달리 그가 감사의 힘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웃을 수 있음을. 나보다 생의 비밀을 많이 깨달은 사람이라, 감사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걸.
수확기를 맞은 가을인 듯 보인다. 두 소녀가 들판에 앉아 있다. 한 소녀는 붉은색 커다란 숄을 두르고 있고 작은 소녀는 그 숄 아래에서 고개를 빼꼼히 들어, 먼 곳을 지켜보고 있다. 소녀의 시선은 멀리 하늘에 닿아 있다. 소나기가 지나가고,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며 쌍무지개가 뜬 것이다. 두 소녀는 아까까지 숄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을 듯 보인다. 작은 소녀는 언니의 고개를 내밀고 자연의 빛나는 선물을 내다본다. 기쁨의 탄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보는 이의 눈길을 끄는 것은 언니의 모습이다. 눈을 감은 상태의 소녀, 고개를 조금 든 그 얼굴에 평화와 경탄의 감정이 깃들어 있다.
그림의 제목은 <눈먼 소녀>(1856)다. 영국의 라파엘 전파 화가인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작품이다. <오필리어>(1851~1852)로 잘 알려진 밀레이는 이미 11세에 왕립미술학원에 입학할 만큼 재능을 인정받은 화가였다. 정밀한 묘사실력과 화려한 색채 감각으로 관람자의 눈길을 끄는 작품을 여럿 남겼다.
그가 영국 서섹스에 위치한 윈첼시에 머무를 때 남긴 작품이 <눈먼 소녀>다. 실제 모델을 보며 남긴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제목으로 미루어보아 그림 속 소녀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소녀의 무릎 위에는 손풍금이 놓인 채다. 화려하지 않은 옷차림새와 무릎 위 악기를 살펴보면 두 소녀가 거리를 떠도는 악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눈먼 소녀는 한 손으로 동생의 손을 쥐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들판의 풀을 쓰다듬고 있다.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치켜든 모습. 자세로 미루어 보아 들녘의 향을 맡거나 동생이 내지르는 탄성을 조용히 듣고 있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소녀는 동생이 경탄하며 바라보는 쌍무지개를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싱그러운 들꽃을 만지며 촉감을 느낄 수 있다. 황금빛 들녘에서 불어오는 흙 내음을 느낄 수 있으며, 비 온 뒤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마음으로 무지개를 그려볼 수 있다.
눈이 보이는 자들은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게 삶의 전부라 착각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감각이 그림 속 소녀의 영혼에 깃들어 있다. 비가 그친 걸 안 뒤의 안도감, 동생의 손을 꼭 쥔 채 느끼는 따뜻한 감정, 무지개를 상상하며 느끼는 경이로움. 소녀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관람자를 평안한 마음으로 이끈다. 그녀가 가진 특별한 감각과 영혼,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숄 위에 내려앉은 나비의 모습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삶이 불만과 권태로 가득 찰 때, 머릿속으로 내 인생의 기본값을 하나씩 빼본다. 삶에 당연스레 깔려 있다 생각하던 것들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지워본다. 그러면 감사함을 느끼는 감각이 조금씩 되살아남을 느낀다.
중동에서 해외생활을 하며 코로나를 맞은 시절이었다. 긴 가정보육으로 혼자 있을 공간이 없어 집 앞 공터에 차를 대놓고 글을 쓸 때가 종종 있었다. 차창 밖에는 대체로 누런 사막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코로나로 한국에 오기 쉽지 않은 때라, 당시에는 길가에 풍성한 나무와 꽃을 보며 걷는 것, 미술관과 서점을 마음껏 돌아다니는 것, 전철을 타는 것이 소원의 거의 전부였다. 얼마나 간절했는지 밤에 한국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꿈도 꿨다.
2년 전 무더운 여름날 한국에 영구 귀국하자마자 창밖의 반짝이는 나뭇잎을 보는 데 눈물이 났다. 드디어 이걸 볼 수 있구나 싶어서. 한국에 돌아와 첫 공연으로 아이와 어린이 뮤지컬을 볼 때도 비슷한 감격이 찾아왔다. 배우들이 무대에 등장해 오프닝 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룩 흘렀다. 노래가 특별히 감동적이었다거나 귀신 잡는 줄거리('신비아파트'라는 만화가 원작인 뮤지컬이었다)가 매혹적이어서 눈물 흘린 건 아니다. 내가 한국에서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주책 맞게 느껴지지만- 마음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그로부터 1년 반의 시간이 지나자, 감사함은 사그라졌다. 한국의 초록빛 풍경도 지리멸렬한 일상이 되었다. 어린이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이제 아이와 공연장에 들어가 1시간을 버틸 사람을 정하기 위해, 남편과 가위바위보를 한다. 서로에게 은근히 미루고 싶어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역에서 합정역 사이 구간을 달릴 때만큼은 여전히 설렌다. 전철 창밖으로 한강의 풍경이 펼쳐지니까. 넘실대는 햇빛을 받아 너르게 펼쳐진 한강물이 반짝일 때, 지하철에 앉은 대다수 사람들이 고개 숙여 핸드폰을 보는 그 순간. 나는 반드시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바라본다. 볼 때마다 매번 감탄한다. 지하철에 앉아 이 광경을 볼 수 있음에, 아니 지하철을 탈 수 있음에 고마워한다. 한국에서 쭉 지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각이다.
세상만사에 감사하라고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현실조차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강요를, 나는 몹시 싫어하니까. 그러나 마음이 불만과 불안이 가득 차 곧 터질 듯싶을 때, 삶에 얻어맞아 잔뜩 몸을 수그려도 어퍼컷이 계속 날아올 때, 마음이 바닥에 가라앉을 때, 내 인생의 기본값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이건 내 삶에 장착된 기본값이다’라고 여기며 쥐고 놓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나는 건강한 게 당연하고, 사지가 자유로운 게 당연하고, 내가 벌이는 일은 예측대로 펼쳐져야 하고, 나와 내 주변은 늘 무탈한 게 당연하다는 그런 법칙들, 디폴트들. 내 손에 꼭 쥐고 있던 그 힘을 풀 때, 의외의 구간에서 감사의 마음이 찾아오기도 한다. 무언가를 먹을 수 있거나 풀내음을 맡을 수 있거나, 앞을 볼 수 있거나, 지금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 고마움이 솟아날 때도 있다.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인생의 기본값을 높이기 위한 노력과 마음이 필요한 시기도 있다. 삶의 원동력은 대체로 그런 데서 오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세상에 영구하고 당연한 상태는 없다는 유일한 진리, 가끔은 그 사실을 떠올려도 좋다. 내 삶의 기본값을 새롭게 바라보는 감각이 이따금 필요하다.
1. 원래 2주에 한 번씩 화요일마다 글을 발행합니다만, 다다음 주 화요일이 설 연휴라 그 다음 주 (1월 31일 화) 저녁에 글을 발행하려 합니다.
2. 제가 원래 매달 2,4주 화요일에 글을 올리는데, 개인적으로 하는 독서모임과 겹쳐서 일정이 좀 빠듯하네요. 2월부터는 1,3주 화요일마다 글을 올리려고 해서, 미리 말씀드려요.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