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일까 재앙일까
“그러니까 유랑씨 눈에 종.양.이 있을 수 있다고요. 흑.색.종이요.”
의사는 한 음절 한 음절 명확하게 발음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라식 수술을 위한 검사를 받으러 안과에 들른 날이었다. 그때까지 눈에 통증이 온 적도 딱히 불편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나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아직 어린 사회 초년생이었다. 라식 수술을 위한 검사를 받으러 가, ‘종양’이라는 말을 들으리라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라식 수술을 위한 모든 검사가 무난하게 끝난 참이었다. 마지막 검사를 마친 뒤 의사는 갑작스러운 말을 꺼냈다. 내 눈 속의 점이 너무 큰데, 안구암일 수 있다고 말했다. 큰 병원 가서 검사를 먼저 받아보라는 주문이 이어졌다. 그의 말이 귀로는 들렸지만 머리에는 와 닿지 않았다. 라식수술 날짜 대신 눈에 이상 소견이 있다는 종이를 받아 들고 병원을 나섰다. 종이 한 장의 무게가 그렇게 무거운지 처음 알았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병원에서 전철역까지 뚜벅뚜벅 걸어갔을 테고, 전철역에서 집까지 또다시 걸어 들어왔을 텐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안구암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눈에 종양이 있는 것이 맞다면 안구를 적출하거나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안암 전문의를 검색해 보고, 증상이 어떠한지 치료방법은 어떠한지 찾아보다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전문의 예약은 일정이 이미 꽉 차서 한 달 뒤에나 할 수 있었다. 바쁜 하루 중에도 눈물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본래 비관주의자인 나는 이미 머릿속에 수많은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토요일이었던 다음날, 예약은 하지 못했지만 일단 대학병원에 갔다. 전공의들만 근무하는 날 같았다. 내 눈을 살펴본 의사가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교수님 만나보셔야겠어요.” 그는 다급해 보이는 모습으로 그다음 주 월요일로 전문의 검진 날짜를 잡아주었다. 분명 병원 사이트에서는 전문의 검진을 예약하려면 한 달이 더 걸리는 것이었는데. 악성 종양일 가능성이 높은 건가. 한 번 더 좌절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 엄마에게 줄 가방을 하나 샀다. 그동안 돈을 벌면서 엄마를 위해 제대로 무언가를 해준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갑작스레 떠오른 것이다. 가방을 고르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보험비가 얼마나 보장되나. 만약 검진 결과가 맞다면 직장에는 병휴직을 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관두었다. 종양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치료가 가능하니까. 그렇지만 치료로 인해 평화로운 일상이 잠시 보류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남은 일상을 이런 식으로 슬프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주말 내내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가 되자 생각났다. 그 날은 미리 신청했던 스윙댄스 동호회 강습의 첫날이었다. 폴짝이는 커플댄스를 추고 싶은 기분도 기운도 없었지만 주말 내내 울었고, 이 기분으로 주말을 마무리하기는 싫었다. 강습을 하는 신림동 지하 바에 가보기로 했다. 어둑한 지하 바에는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첫 수업이라 간단한 동작만 배웠다. 춤 동작을 연습하는데 웃음이 나왔다. 주말 내내 나를 괴롭히던 단어들이 순간 머리에서 잊혔기 때문이다. 강사가 가장 신나는 스윙 음악을 틀어주고 그 리듬이 마음을 흔들자 그제야 생각났다. 어쩌면 한동안 이 강습을 못 듣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눈물이 차올랐다. 혹시 이 수업이 마지막이라면 그저 즐겨야겠다. 조용히 생각했다.
테이블 위에 갖가지 물건들이 복잡하게 놓여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해골이다. 아무렇게나 놓인 해골은 그림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정물화에 중심에 해골이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르멘 스텐비크(Harmen Steenwijck, 1612~1656)의 <정물 – 바니타스의 알레고리>라는 작품이다. 바니타스(vanitas)란 라틴어로 허무, 덧없음, 허영 등을 뜻한다.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라는 도입부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에서 유래한 바니타스 정물화는 삶의 유한성과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는 그림을 말한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17세기의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유행했다. 직전까지 유럽은 30년 전쟁(1618~1648. 로마 가톨릭 교회 지지 국가와 개신교 지지 국가들 사이에 일어난 종교 전쟁)의 영향으로 막대한 전쟁 비용을 치르며 많은 목숨을 희생으로 치룬 상태였다. 그보다 이전에는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다. 눈앞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도한 이들은 불안과 함께 인생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느꼈다. -아마 21세기 코로나를 맞은 우리의 심경과 비슷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바니타스 정물화의 유행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해석한다.
바니타스 정물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죽음과 허무함, 덧없음과 관련이 깊다. 스텐 비크의 작품에서 해골 주변에는 조가비, 책과 악기, 비단 천, 시계, 불 꺼진 램프, 도기 그릇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도(刀)도 보인다. 조가비는 동남아에서 수입한 물품으로 고가의 물건이었다. 자색의 비단 천 역시 사치스러운 삶을 나타내며, 일본도는 권력을 의미했다. 세 가지 물품은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나는, 그러나 어느 순간 의미 없이 사라질 허영과 관련이 깊다. 불이 꺼진 램프와 포켓 시계 역시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상징한다. 책은 지식과 배움, 그 한계를 나타내며 악기 역시 언젠가 간결하게 끝날 시간을 말한다. 도기 그릇은 깨지기 쉬운 것으로 인간의 삶이 가진 연약함을 뜻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림을 보는 순간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 외에도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꽃, 과일, 연기, 거품, 촛불 등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꽃은 언젠가 시들어갈 시간을 의미하고, 썩어가는 과일은 부패하여 없어질 삶, 연기와 거품은 갑작스레 사라지는 인생을 뜻한다. 바니타스화는 단순한 정물화가 아니라, 인생의 유한함과 허무함, 덧없음을 상징하는 사물들로 가르침을 주는 그림인 것이다.
바니타스화를 보며 ‘끝’에 대해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은 언젠가 끝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 부귀영화, 권력 등- 중 대다수는 언젠가는 바스러지고 사라질,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것들이다. 끝을 알면 인생에서 걸러야 할 것이 명확해진다. 삶에서 걸러야 할 것과 남겨둬야 할 것이 무엇이지 알려주는 거름망, 죽음을 인식하면 그 거름망이 생기는 것이다.
'끝을 안다는 것'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죽음은 항상 두려운 존재다. 죽음뿐 아니라 모든 것의 끝은 두렵다. 즐거운 시간이 사라지고, 행복한 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은 허망하고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생이 부질없고 덧없다는 것만 결론일까. 마지막을 안다는 것은 이따금 축복이 되기도 한다. 끝을 인식하면 인생의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힘이 생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 선택의 기준을 간결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부질없는 것에 매달리고 걱정했던 시간을 버리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소중하게 여겨야 할 순간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내 이야기는 어떻게 끝났을까. 눈물의 주말 이후 월요일에 전문의에게 검진을 받으러 갔다. 전문의는 내 눈을 검사해보더니 5분 만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흑색종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안도감에 지난 주말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되짚어 보면 안구암을 의심했던 주말 내내 오로지 두 가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첫 번째 ‘나 자신’이었다. 눈에 종양이 자리 잡고 있어 일상의 흐름이 한동안 끊어진다면 아쉬울 것은 많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그동안 마음껏 해보지 못했다는 것, 그것만이 아쉬웠다. 특히 스윙댄스를 배우던 일요일 두 시간의 기억이 각별했다. 무언가를 더 가지려 욕심내지 말고 그 특별한 즐거움을 자주 느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한 가지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충분히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고 만남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고, 소중한 친구들을 더 자주 만나 널 정말 좋아했다고 말해줄 걸.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가 단 두 곳만 비추듯 그 두 가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나를 사로잡던 자잘한 고민과 걱정은 모두 사라진 채였다. 인생의 중요한 두 가지 포커스를 깨닫게 된 셈이었다.
물론 당시에 얻었던 깨달음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금세 나는 지겨운 일상에 안착했고, 한 달쯤 지나자 다시 욕망과 고민 덩어리의 인간이 되었다. 더 가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지냈으며, 삶의 감사함도 자주 잊었다. 다만 그때의 경험 이후 한 가지 습관은 생겼다. 무언가를 선택해야 해서 혼란스럽거나, 일상에 지칠 때 ‘끝’을 상상하게 된 것이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는 인생의 마지막을 상상해본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이걸 선택하지 않으면 먼 훗날 후회할까. 그러면 선택이 의외로 쉬워진다. 뿐만 아니라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은 웬만하면 참지 않게 되었다. 후일 그것을 못해본 것이 후회로 남을지 모르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에 기억도 나지 않을 사람들 말에 신경 쓰는 일 역시 줄어들었다(물론 여전히 눈치를 많이 쓰기는 한다). ‘나 자신’과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 신경을 쏟기에도 시간은 짧다는 생각을 한다. 실패가 두려워 멈칫하는 순간에도 인생의 끝을 염두에 둔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되면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 사라지고 무언가를 시도할 용기가 솟아난다.
죽음뿐 아니라 갖가지 순간에 그 끝을 상상한다. 일상에 묻혀 지치거나 어긋나는 관계가 있을 때에는 그 관계가 언젠가 끝날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본다. 그 사람과의 인연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고, 끝을 상상하면 오히려 후련한 관계도 있다. 전자의 경우 인연을 더 이어가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후자의 경우 언젠가 끝을 맺을 가능성이 높은 관계라 생각한다. 마지막을 상상하면 인간관계도 조금 가벼워진다.
끝이 존재한다는 것은 참 두려운 일이다. 어떤 식으로 올지 모르고 언제 올지도 알 수 없으니까. 삶의 유한함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허무하고 덧없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따금 마지막을 상상하면 생각이 간결해지기도 한다. 혼란스러움이 줄어든다. 인생의 포커스를 단순하게 좁혀주기 때문이다. ‘끝이 존재함’을 안다는 것, 늘 괴로운 일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