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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Aug 23. 2022

흔들리는 마음으로부터 중심을 잡는 방법

마음이 불안정할 때 기본 찾기



브런치에서 내 글이 처음으로 Daum 메인에 올랐던 때가 기억난다. 5만 회가 넘는 조회수였다. 믿기지 않는 숫자에 들뜨고 설렜던 기억. 기쁨과 설렘은 최고한도로 치솟았지만 달뜬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글은 메인에 오르지 않았고, 조회 수가 시원찮았다. 실망감이 솟았다. 머릿속 물음표도 따라왔다. 앞으로 어쩌지? 다음 글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주제로 발행해야 하는 거야?   


 혼란한 마음과 고민 끝에 간단한 원칙을 세웠다. 글이 먼저라는 원칙. 제목으로 어그로를 끌더라도, 이목을 끌만한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더라도 - 실제 나는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서 이런 방법을 종종 썼다-, 글에 담긴 내용은 무조건 제목보다 좋아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내 선에서 가장 정성 들인 글을, 읽는 사람에게 제공해보자. 이후에도 조회 수나 구독자 수에 따라 요동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덜해졌다.  


 그럼에도 이따금 비슷한 맥락의 혼란이 찾아오고는 했다. 글쓰기를 시작한 후 가장 크게 혼란스러웠던 시기는 작년 여름이었다. 해외살이를 마치고 한국에 영구 귀국했던 그때, 마침 브런치 북 프로젝트의 수상작으로 나의 첫 에세이가 출간되어 나왔다. 


 이전에도 청소년 교양서를 출간한 경험이 있던 나였다.  그러나 공모전 당선작으로 에세이 장르의 책이 출간되는 건 조금은 성격이 다른 일이었다. 브런치북 프로젝트 전시회로 내 얼굴이 담긴 사진이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걸렸고, 브런치에서  홍보를 해주어 간단한 동영상을 찍기도 했다. 청소년 책과 달리 내 책을 알리기 위해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와 홍보를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귀국해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출판사 분들도 만났고, 새로운 분야의 사람들을 이따금 접할 일도 있었다. 들뜨고 설렜지만 어쩐지 마음이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시기였다.  


 이런저런 조언도 들었다. 누군가는 유명한 작가가 되려면 나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온라인상에서 독자에게 답댓글을 일일이 정성 들여 달거나 겸손을 넘어선 저자세로 일관하지 말고, 좀 더 잘 나가는(?) 모습을 부각해 퍼스널 브랜딩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한 얘기였다.


 요즘에는 글 쓰는 사람도 팬덤을 구축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는 이들도 있었다. 이를 위해 독자에게 적극적으로 매력을 어필하고 독자에게 자주 다가서는 창구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건넸다.  또 다른 누군가는 브런치는 돈이 안 되는 공간이니 다른 공간으로 글쓰기를 옮겨야 한다고 말했고, 어떤 이는 시간이 남으면 유튜브를 시작하라고 했다. 글 쓰는 사람도 그런 걸 하지 않으면 금세 뒤처진다는 이유였다. 인지도를 쌓아야 책 판매량도 올라간다는 말도 덧붙였다.

 

 모두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진심으로 나를 위해 주는 사려 깊은 조언도 많았다. 글쓰기도 중요하지만 출판사가 함께 하는 만큼 내 글과 책을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책을 몇 번 출간하면서 책이 몹시 팔리지 않는(?) 현실도 파악하고 있었고, 에세이 같은 분야는 저자의 인지도가 중요하다는 사실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이 조금 혼란스러웠다. 나를 알리고 인지도를 높이는 노력이 우선순위란 말인가?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도 노력 대비 결과가 미미한, 비효율적인 행위란 이야기인가? 쓸모없는 생각도 이어졌다. 퍼스널 브랜딩인지 뭔지를 하려면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나는 그런 게 좀 부재한 상태인데. 그렇다고 내가 압도적인 매력의 소유자도 아니고, 조금 소심한 관종(?) 일뿐인데.


 이런저런 조언을 듣고 나니 갑자기 내가 시대에 뒤쳐진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글을 쓰느라 세상의 중요한 흐름을 놓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작은 의심도 솟아났다. 도대체 글쓰기를 어떤 방식으로 이어가야 하는 거지? 당시에 온 물음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이어졌다.   



간결하고 소박한 아름다움, 박수근의 그림 세계    


   

 한국의 ‘국민화가’로 불리는 박수근(1914~1965). 1914년 일제 강점기에 강원도 양구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일곱 살 때 광산업에 손을 댔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보통학교에 들어가서 일찍이 그림에 소질을 보였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울 정도의 상황이었다. 집안 사정 때문에 화가의 꿈을 접으려 했던 때도 있었지만, 포기하기 어려운 꿈이었다. 그는 홀로 미술 공부를 계속해나간다. 특히 농촌의 정경과 농부의 진실한 모습을 담은 밀레의 작품을 자주 들여다보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화가 박수근의 모습


  끊임없는 노력 덕분에 1923년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는 기쁨을 맛보았지만 곧 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어 박수근이 어려운 살림을 도맡아 하는 처지가 된다. 그림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탓인지 1933년부터는 세 차례 전람회에서 낙선하고 만다. 이후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림 활동을 홀로 이어가다 아내 김복순을 만나 결혼을 했고, 평안남도에서 도청 서기로 일한 시절도 있었다. 나중에는 아내와 함께 평양으로 가서 그림 활동을 계속했다. 1941년에는 아내를 모델로 그린 <맷돌질하는 여인>으로 입선을 했고 중학교 미술 교사로 일을 이어가기도 했다.



시장(1950년대)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가족과 떨어져 잠시 이산가족이 되는 등의 사건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가족을 만났으나, 전쟁 중이라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헐값으로 화방에 그림을 파는 생활을 하다가, 미군 PX에서 스카프나 손수건 귀퉁이에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을 하게 된다. 화가로서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택한 결론이었다. 이렇게 근근이 모은 돈으로 박수근은 창신동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가족들과 함께 살 집이었다. 생계를 잇기 위해 일을 하면서도 그는 집의 대청마루에서 그림을 그렸다. 가난의 상징과 같았던 판잣집이 즐비했던 창신동에서 그는 이웃들의 따스한 모습을 화폭에 남겼다.  



창신동 집에서 찍은 박수근 가족의 사진(좌)과 1953년작 '집' (우)

 


판잣집(1950년대 후반 작품)




아래 그림은 그의 대표작인 ‘나무와 두 여인’이다.

나무와 두 여인(1962년)



 그림 한가운데, 겨울의 벌거벗은 나무가 서 있고,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 두 여인이 서 있다. 뒷모습을 보이는 여인과 아이를 업은 채 어딘가로 향하는 여인. 간결한 구도가 눈에 띈다. 화가는 형태를 조금씩 바꿔가며 비슷한 구도로 나무와 두 여인을 그린 '나목' 연작을 내놓았다. 마치 화강암에 그림을 그린 것처럼 화면의 우툴두툴한 표면이 눈에 띈다. 기름을 뺀 유화 물감을 빈 캔버스 위에 몇 번씩 덧칠해 발라, 화가는 두껍고 거친 느낌의 질감을 표현해냈다.  투박한 듯 보이지만, 묘한 힘을 풍기는 작품이다.  


 그 힘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속 나뭇가지는 단순히 벌거벗고 앙상한 모습이 아니다. 곧게 뻗은 나뭇가지에서 의지와 생명력을 느껴진다. 앙상한 가지 속에 숨어 있는 잎사귀는 봄이 오면 다시 푸른 잎을 피우고 활기차게 살아나갈 준비를 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무 밑에 간결하게 그려진 두 여인은 가난하고 고단한 시대에서 현실을 버텨나가던 당시 서민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미군 PX 시절 박수근과 함께 일하던 사이로 만났던 소설가 박완서는 –당시 박완서는 박수근이 일하던 PX의 점원으로 지냈었다고 한다- 1965년에 열린 박수근의 유고전에서 <나무와 두 여인>을 보고 커다란 감명을 받아 <나목>이라는 소설을 썼다. 이 작품을 통해 박완서 작가는 1970년 여성동아 현상 공모에 당선되어 소설가로 데뷔했는데, 그는 소설의 후기에서 예술가 박수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 그렇지만 예술가가, 모든 예술가들이 대구, 부산, 제주 등지에서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독한 술로라도 정신을 흐려놓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1·4 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 박완서, 소설 <나목> 후기 중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진실하고 따뜻한 이웃들의 모습을 그려갔던 박수근의 모습은 그의 소박하고 단단한 그림 세계와 겹치며 여운을 남긴다. 혼란한 시기에도 삶의 소박한 기본을 지켜나갔던 화가의 생애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소박한 기본 다지기가 필요할 때



 박수근의 작품세계와 생애를 통해 생각해보게 된다. 삶의 성실한 자세를 놓지 않고 그림에 대한 사랑, 삶의 기본을 이어갔던 화가의 태도, 어쩌면 많은 이들이 기억해야 할 예술가의 모습 아닐까.  


  나에게도 기본을 다시 돌아봐야 하는 시기가 있었다. 아마도 작년에 불안정한 마음을 겪었던 시기가 그랬던 것 같다. 혼란스러운 마음 끝에 “내가 기본으로 두어야 할 것이 무언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미련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일 수 있지만, 결국 ‘쓰는 행위’에 답이 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내 책이 나온 걸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것이고, 마음도 끊임없이 흔들릴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솔직히 다음 달 에세이 출간을 앞둔 지금도 어디로 도망가고 싶고 그렇다 - 아마 내가 덜 유명해 팔리지 못한 책을 보며 계속 한탄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의 강도를 줄이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주변의 반응에 지나치게 들뜨거나 가라앉지 않으려면,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흐름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브런치에 매주 글을 써서 올리는 것이 마음의 중심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마음이 들떠 힘든 시기에도 브런치에 글을 써야 한다는 루틴이 있으니 적당히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아 힘든 시기에도 글을 써야 하니 그 순간만큼은 억지로라도 마음을 다잡았다. 글쓰기로 인해 왔던 혼란에서 나를 지켜준 건 역설적이게도 글쓰기였던 셈이다.

 

 내가 내린 결론이 진실된 것이고, 다른 형태의 노력이 거짓된 것이라 얘기하고픈 건 아니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기본’이 있고, 노력의 형태 역시 제각각이니까. 기본보다는 삶에 적당한 전략과 요령이 필요할 때도 있고, 더 높은 목표를 찾아보는 것이 도움 되는 시기도 있다. 다만 꿈을 따라가거나 어떤 행위를 지속하다 세상의 흐름에 뒤처지는 듯싶을 때, 나에 대한 칭찬이나 비난을 들어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때, 기대보다 형편없는 결과에 실망감이 찾아올 때, ‘소박한 기본’을 떠올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기분의 Up과 Down을 오가는 아슬아슬한 현장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의외로 도움이 된다.


 마음이 쉴 새 없이 흔들릴 때는 기본기를 다지는 자세, 일정한 리듬으로 하는 일, 안정적이고 단단한 삶의 루틴을 기억해두자. 소박한 기초 다지기는 마음의 상승과 하강곡선이 왔을 때 나를 지켜주는 방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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