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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Nov 22. 2022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

오늘을 붙잡아 살아내는 일

걱정 부자


      

십여 년 전, 임용 공부 삼수 중인 후배에게 '공부하는 데 어려운 건 없냐'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후배는 태연스레 대답했다.


 “공부를 제대로 할 때는 어려운 게 없어요. 불안해서 공부가 안 되니까 괴로운 거죠.”

 

 가만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임용 시험을 준비할 때를 되짚어보면 공부에 집중하고 몰입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올 때였다.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과가 불합격이면 어떻게 하지?’라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툭툭 튀어나오곤 했다. 불안은 곧 걱정으로 전환되어, ‘열심히 해도 어차피 안 될 거라면 때려치우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고, 그날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정말 때려치우는 결과로 이어지고는 했다.    


 최근에는 또 다른 걱정으로 하던 일을 놓아버리는 경험을 했다. 늦은 밤, 글쓰기를 위한 자료 수집 중이었다. ‘기후위기와 미래 경제’ 정도의 주제로 글을 써야 했다. (청소년용 글이니 실제로는 훨씬 더 말랑말랑한 제목이긴 하다) 검색을 하다 보니 관련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기후위기와 식량 위기, 에그플레이션 등등. 물론 밝은 내용은 아니었고, 마음이 살짝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어 구글과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맞춤형 경제 기사를 나에게 제공하기 시작했다. 스태그플레이션, 신냉전체제, 한국의 경제 위기... 주제가 하나같이 밝지 않았고, 장밋빛 뉴스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스스로를 잘 알기에 기사를 클릭하고 싶지 않았다. 지식을 쌓는 건 좋지만 기사를 죄다 읽으면 불안감이 찾아올 거란 걸 아니까. 그러나 늘 마음과 반대로 움직이는 나란 인간. 어느새 관련 기사를 하나씩 클릭해 훑어보고 있었다. 머릿속은 이미 불안의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아,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인류의 미래가 어찌 될지 알 수 없구나. 이를 어쩐다, 큰일이네. 나는 그렇다 쳐. 우리 애는 어쩌지?(많은 부모에게 그렇듯 내 최대의 아킬레스건은 역시 아이의 미래다) 아니, 식량 위기가 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 거야?


 갖가지 불안과 걱정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나의 미래, 우리 집안의 미래, 세계 인류의 미래까지 죄다 당겨서 갖은 걱정을 하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밤 12시가 넘어 있었다. 생각의 종착점은 '부질없다'는 결론으로 흘러갔다. 글은 써서 무엇 하나. 미래가 어찌 될지 모르는데. 부지런히 움직이던 마우스에서 조용히 손을 뗐다.


 인생을 되돌아보면 이런 식으로  불안 – 미래예측 및 걱정 – 하던 일 때려치우기 의 수순을 밟을 때가 꽤 있었다. 내가 갈망하는 목표를 이룰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그날 할 일을 때려치우는 순간이 드문드문 있었다. 책을 쓸 때는 출간 후 반응이 어떨까 걱정하다 원고에서 손을 놓는 날도 생겼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까 두려워 건강검진을 슬슬 미루는 일도 가끔 벌어졌다. 불안도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감정이라지만,  그게 과도해서 늘 문제가 생기고는 했다.

          


순간의 진실, 모네의 <루앙 대성당>



 장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 인상파의 선구자로 불리는 예술가다. 그는 1874년, 훗날 ‘인상파’로 불린 이들의 전시회에서 <인상: 해돋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출시해 논란의 주인공이 된다.


클로드 모네(좌)와 그가 1872년 인상파 첫 전시회에 출품한 <인상 : 해돋이>(우) @wikiart


 안개가 자욱한 항구의 풍경을 묘사한 작품은 ‘그림 같이 아름답다’로 표현되는 예술계의 통념을 깨부수고 있었다. 화가는 사물의 고유한 색채와 형태를 구분하여 그리지 않았다. 다른 화가들처럼 몇 달을 들여 세부 묘사에 힘을 쓰지도 않았다. 윤곽선을 흐리게 하고 빠르게 붓을 움직여 물감을 칠해나간 작품이 전시장에 내걸렸다.


 기존의 작품과 방식이 달랐던 그림은 비평가들의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대강 붓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많은 조롱과 비난을 받은 후에도 모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화가는 이젤을 세운 뒤 자신이 받은 색채와 형태의 순간적인 인상을 캔버스 위에 표현했다.


 그리고 모네는 1893년, 파리 센 강 주변의 루앙 대성당 근처의 상가 2층에 작업실을 구한다. 루앙 대성당은 11세기에 준공을 시작해 1544년까지 오랫동안 복합적인 양식이 첨가되며 세워진 건축물이었다. 오랜 세월  도시 침략에 따른 파괴와 복원을 겪으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루앙대성당의 모습


 모네는 <대성당> 연작을 2개월간 그려냈다. 모델이 동일했고 형태와 구도가 비슷했음에도 빛과 대기의 흐름에 따라 각 작품은 서로 다른 느낌을 풍긴다. 새벽, 오후, 해가 질 무렵, 맑은 날마다  다른 건물인 듯 보인다.


루앙 대성당 연작(장 클로드 모네, 1894)

 

<대성당> 연작 속에서 어떤 그림이 루앙 성당의 실체를 나타낼까? 사실 '실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다. 모네는 빛의 강도와 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을 담던 화가였다. 이런 시점으로 바라보면 모네의 그림 속 주인공은 '루앙대성당'이 그 자체가 아니다. 견고하게 서 있는 루앙대성당이라는 실체도 어차피 영원하고 견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으로 보자면 그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변화와 순간성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바뀐다. 돌덩이라 할지라도…”라는 글귀, 모네가 노트에 적어놓은 글귀를 되짚어볼 만한 대목이다.


작품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현재- 미래라는 단선적인 시간의 흐름과 그 가치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루앙 대성당 각 작품의 가치를 견주어 본다고 생각해보자. 가령 아침의 습한 대기에 둘러싸인 루앙 대성당은 오후의 환한 빛에 쌓인 점심의 루앙대성당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시점의 그림도 다른 시점의 그림을 위해 존재하거나 그려진 것이 아니다. 다른 시점을 빛나게 만들기 위해 보조하는 존재도 아니다. 연작 속 루앙 대성당의 모습은 각기 다른 진실과 의미를 품은 채 존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시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가령 11월 22일이라는 오늘의 날짜는 곧 다가올 12월 31일, 1년을 마감하는 날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2022년의 시간은 5년이나 10년 후쯤, 빛나는 결과나 희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순간은 엄밀히 말해 그저 그 순간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결과'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순간이 존재할 뿐.



미래라는 시간의 가치를 다시 바라볼 때      


살아가면서 인간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 있다. 삶을 결과로 자꾸 판단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미래의 밝은 결과나 희망을 위해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다 초조해하고, 어두운 미래의 결과를 상상하며 현재를 낭비하며 우울해한다. 그러나 사실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미래는 미래일 뿐이다.  각 순간은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래의 결괏값을 위해 현재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더 냉정한 사실도 존재한다. 삶을 결과로 따질 경우, 그 결론은 허무해질 수밖에 없다. 엔딩은 ‘죽음’이라는 결과로 뻔하게 정해져 있으니까. 결괏값으로 인생의 가치를 온전히 따지면 남는 것은 허무함과 공허함 뿐이다. 명확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 대다수의 시간을 과거에 얽매이고, 미래를 상상하며 지금 필요한 일을 하는 이 순간을 날려 버린다. 과거에 가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미래의 어떤 것을 갈망하다 끝끝내 괴로움에 빠진다.

   

 이 글을 쓰는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라는 감정에 몸을 내맡기며 80% 이상의 시간을 허비하며 산다.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까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며 순간도 많다. 그러나 가끔씩 생각한다. 어쩌면 결과에 대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괴로워하기에는 인생이 짧을 수 있다는 걸. 예측하지 못한 일이 내일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걸. 나에게 다가올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다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과 즐길 수 있는 것을 놓칠 수 있다는 걸.   


 이런 이유로 미래에 불안이나 걱정이 지나치게 커져 괴로워질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지금 현재를 잊고 있구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피하고 싶어 미리 절망이나 좌절을 택해버리기도 하는구나. 좋지 않은 결과를 두려워하며, 희망이 오지 않을까 겁내며 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걸 이따금 깨닫는다.     


김영민 교수의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선생이 되고 나서 공부를 지나칠 정도로 치열하게 하는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왜 그토록 열심히 하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공부하는 순간이 좋아서요. 오, 그런가. 이 대답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영광된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답이었다. 인간은 우연의 동물이며, 순간을 살다가 가는 존재하는 것을 상기하는 간명한 대답이었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사회평론) 103p                             


  

 순간을 잊지 않고 즐기기 위해 내가 택하는 방법은 산책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찾아오거나 걱정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에는 집 근처 공원으로 나간다. 천천히 산책을 하며 꽃을 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의 잎사귀를 본다. 나를 둘러싼 자연의 빛깔을 눈에 담는다. 오늘을 살자고 스스로에게 얘기한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을 인지하고 나서야 결심이 선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결심.


 이 단순한 방법과 결심이 순간을 다시 붙잡는 나의 작은 팁이다. 예전에는 하루하루를 온전하고 충실히 살아내라는 이야기를 뻔한 얘기라며 코웃음 치며 듣곤 했다. 지금도 그 말을 실행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걸 매일 지키기에 나는 몹시 게으른 편이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이 단순한 교훈을 코웃음 치며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미래를 아무리 예측하고 걱정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나를 지금 이 순간에 끌어 앉혀 하루를 충실히 사는 게, 그 방도가 그나마 최선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불안이 당신을 사로잡아 의욕을 꺾어놓을 때 생각해보자. 지금 어떤 시점을 살고 있는지. 앞으로 찾아올지 아닐지 모르는 미래를 살고 있는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살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가. 불안에 시달린다면, 이따금 삶의 시제(時制) 조정이 필요하다.




제가 요즘 글 쓰는데 집중이 안 되고 어쩐지 불안하고 산만해져서;;;; 충실히 하루를 보내자는 다짐으로 쓴 글입니다. 이 글 읽으시는 분들도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시길요:) 제가 11월이 조금 정신이 없었는데, 이웃분들 글도 곧 찾아가서 잘 읽어보겠습니다 ^^


다음 글은 12월 13일(화)에 발행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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