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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Jun 14. 2022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말이 위험한 이유

가능성과 기회가 널린 시대, 왜 우울할까 


무한한 가능성과 중독 



 고등학교 동창 중 수능을 다섯 번 친 친구가 있었다. 우등생이었던 친구는 원래 의대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첫 수능에서 뜻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만족하지 못했던 친구는 재수를 준비했다. 그러나 다음 시험에서도 점수가 충분치 않았고 심지어 지난번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결국 친구는 수도권의 한 대학에 들어갔으나 적응하지 못했다. 수능 공부에 의욕을 잃어가는 모습이 확연히 보였지만 친구는 반수를 한 다음, 조용히 다음 수능을 준비했다. 


 그 시기쯤 친구가 무심코 내뱉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정도로 하는데 의대에 못 가면 내 인생이 실패로 돌아갈 것 같긴 해."  그렇게 다섯 번 수능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몇 해 후부터는 연락이 서서히 끊어졌다- 언젠가 우연히 마주친 친구가 쓴웃음을 지으며 하던 말도 생각난다. "수능시험도 중독이 된다니까." 그 이후로는 친구의 소식을 잘 듣지 못했다. 결국 의대를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다. 


 친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능성이 분명 있는데 억울하게 닿지 못하는 것 같은 상태. 나도 그 상태를 수차례 겪어봤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는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시험을 더 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게으른 천성만 고치면 가능할 듯 싶었다. 20대의 나는 특히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말을 믿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단 시간에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 듯싶었다. 게으른 기질을 바꾸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퇴근하고 나서 조금만 더 몸을 움직이면, 하루에 몇 시간을 투자하면, 어떤 목표 지점에 이르면 인생이 180도 바뀌고 환골탈태하듯 다른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에 남 탓을 할 수는 없지만 세상이 내게 외치는 말에도 영향도 받았다. 당시에는 미디어나 책에서 한결같이 ‘너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어라’ , ‘뭐든지 노력하면 된다’는 주문을 읊조렸다. 성공한 사람들이 TV에 나와 자신의 요령을 알려주며 이대로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고, 나도 노력하면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 생각했다.  


나쁜 건 아니었다. 단조로운 일상에 의욕을 심어줄만한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그 말을 받아들이고 나서 내가 보인 행동 방식이 문제였다. 무한의 가능성을 믿었던 나는 주로 두 가지의 극단적인 행동 방식을 취했다. 의욕이 넘칠 때는 폭주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자기 계발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에는 잠을 줄여가면서 이것저것 일을 벌였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힘이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에는 달리기 자체를 멈추고 무기력해졌다. 열정적으로 살지 못하는 나를 탓하며, 몸은 침대에 누워있거나 tv 시청을 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머릿속 괴로움이 가중되었다. 비율을 따지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간이 8이었고, 자기 계발에 박차를 가하는 기간은 2 정도였다. 어떤 시기에 속해 있어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어쩌면 무한대로 내 가능성을 믿었던 그 주문이, 꿈을 높게 가져야 한다는 그 말이, 네 가능성을 펼치라는 이야기가 나에게 독이 되었던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한대의 욕망과 혼란, 브뤼헐의 <바벨탑> 


 

바벨탑(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1563)


그림 한가운데, 거대한 탑이 서 있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닮은 탑의 모습. 구름에 닿을 만큼 높다란 건축물은 거대한 형상을 하고 있으나,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인다. 


 플랑드르 지역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Pieter Brueghel de Oude, 1527 – 1569년)의 작품, <바벨탑>이다. 브뤼헐은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농민 생활 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농부의 결혼식(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1568)
아이들의 놀이(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1560)

 화가는 당대의 사회적 상황을 비판하는 그림 역시 그렸는데, 시대 상황 때문에 직접적 방식보다는 종교적 소재를 활용해 이를 표현했다. 바벨탑 역시 이러한 특징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림 속 탑의 아래쪽을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가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림 속 탑의 모습은 군데군데 금이 가 있고 허술한 모습을 보인다. 


  위로 쭉 뻗어야 하는 탑은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다. 아래층을 채 완성하지 못한 상태인데, 위층을 쌓아 올리고 있어 공사가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건물의 한 부분이 무너져 내린 상태이고, 건물 안에는 미세한 균열이 자리 잡고 있다. 탑의 허술한 모습을 통해 언젠가 거대한 공사가 수포로 돌아가고 바벨탑이 무너질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바벨탑 이야기는 구약성경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노아의 아들 함의 자손들이 동쪽으로 이사를 하다 바빌로니아에 있는 평야에 이르러 정착한다. 그들은 한 가지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정착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탑을 쌓기 시작한다.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건축물을 짓는 것이 목적이었다. 벽돌과 역청으로 만들어진 탑은 층을 높여 갔다. 인간의 욕망도 끝없이 쌓여갔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신은 인간의 교만에 제동을 걸고자 하였다. 결국 그들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도록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었고, 탑을 쌓는 일은 중지되고 말았다. 말이 통하지 않자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래서인지 바벨은 히브리어로 ‘혼란’을 뜻한다)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오만함은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브뤼헐은 그림을 통해 당대의 사회를 그림으로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종교 개혁으로 구교와 신교(프로테스탄트) 간의 갈등이 심각했다. 권위를 내세우던 가톨릭과 새롭게 영향력을 뻗치던 신교 간의 갈등으로 민중의 삶이 혼란에 빠지던 시기였다. 


장님을 이끄는 장님(1568) 당시의 혼란한 사회 상황을 풍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플랑드르 지역을 식민지로 삼고 경제적·정치적 압박을 계속하고 있었다. 구교를 믿는 국가인 스페인은 플랑드르 지역의 신교도들을 탄압했다. 더불어 자치권을 박탈하고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가 이에 대한 네덜란드인의 반발이 크게 일어나는 시기였다. 이렇게 보면 브뤼헐은 펠리페 2세의 탐욕과 종교 간 분열이 언젠가 바벨탑처럼 파멸과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 예언하고 있는 셈이다.  

    


무한한 가능성의 주문이 좌절을 불러올 때  



 바벨탑의 이야기가 풍자하는 상황은 16세기의 네덜란드에만 적용 가능한 걸까. 21세기의 우리에게도 충분히 유효한 이야기 아닐까. 인간의 욕망이란 시대와 공간을 불문하고 나타나는 것이니까. 인간이 ‘하늘’에 닿을 탑을 쌓아 간다는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궁극적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 그것이 어쩌면 허술한 욕망의 탑을 쌓게 하고, 내실을 쌓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더더욱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는 시대다. 요즘은  많은 영상과 광고와 SNS가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성공하는 사람들이 꼭 하는 일'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사람들의 특징'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는 법' 등 인생의 승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준다. 누군가는 단군 이래 돈 벌기 제일 쉬운 시대라고 이야기하고, 기회는 잡는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미라클 모닝을 실천하거나 유튜브를 시작하거나, 주식이나 코인 투자를 해야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요는 비슷하다. 마음만 먹으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가능성을 펼쳐라. 기회는 충분하다.  


 목표지점이 무한대로 올라가면 어떤 일이 생길까.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루어도 더 높은 성과를 향해 달려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강박적인 자기 착취와 번아웃이 이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높은 성과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좌절해 아예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불안과 초조가 지배하는 건 비슷하다. 


 세상은 과잉 긍정의 세례를 퍼붓는다. 가능성에 도취되고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기 쉬운 시대다. 그러나 이따금 의심할 필요가 있다. 단군 이래 가장 많은 기회가 열려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지. 가능성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인지 -소수의 성공한 사람을 지나치게 자주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건 아닌지- 그 가능성을 펼쳐나가는 게 진정한 발전인지. 열심히 달리는 것은 좋지만 목표지점 없이 달리는 건 때로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각종 매체가 크나큰 성공만 비춰주며 작은 성취가 의미 없다는 이야기를 은근히 속삭이고 있는 것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도 있다. 많은 광고와 SNS 게시물이 '사회적으로 크나큰 성공 = 진정한 행복'을 불러올 거라는 무언의 명령을 말한다. 삶에 의욕을 갖는 게 나쁠 것은 없으나, 현실에 두 발을 디딘 목표와 노력을 시시한 것으로 여기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작은 성취를 이루기 위한 시도조차 멈춰버리기 쉬우니까. 성공한 사람들처럼 행복을 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의욕과 좌절이 오기 쉽다. 도처에 널린 기회를 잡지 못하는 나를 탓하거나 미워하기도 쉬워진다.  


허술한 욕망이나 허술한 힐링이 아니라, 현실에 발 디딘 목표가 필요할 때가 있다.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무한한 가능성을 외치는 세상에 속지 않고,  소소한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해 가며 앞으로 나아갈 필요도 있다. 어떤 분야든 몸으로 부딪히고 깨져야 가능한 일이다.   


 자기 확신과 긍정을 심어주는 말은 아름답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주문은 달콤하다. 그러나 긍정의 주문이 도리어 좌절이나 우울, 현실 회피를 불러올 수 있다면, 그 말은 의심하고 멀리 해도 좋지 않을까.   



다음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 글은 6월 28일(화)에 발행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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