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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Aug 09. 2022

관심사에도 정답이 있나요

관심의 카테고리를 강요당할 때

관심의 카테고리에도 정답이 있을까



오랜 지인 A는 늘 주류 감성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의 관심사는 종종 바뀌었지만 늘 다수의 흐름을 따르는 편이었다. 최근 그의 관심 분야는 주식 투자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그런데 어째서 다른 사람들처럼 재테크랑 주식 투자에 관심이 없어?”


 기습적인 질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음...”만 반복했다. ‘글쓰기에 몰입한 뒤로 재테크에 대한 관심과 의욕을 다소 잃었다'라고 구구절절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길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그는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너 세상 보는 시야가 너무 좁은 거 아니야? 맨날 글쓰기만 하더니. 우리 나대라면 경제적 자유를 얻는데 관심을 가져야지. 주식 투자를 지속적으로 해야 된다니까.”

 

이어서 A는 주식투자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재테크에 관심이 없음 -> 세상 보는 시야가 좁다’로 급박하게 점프하는 논리를 지적해주고 싶었지만, 최근 들어 재테크 의욕뿐 아니라 말솜씨조차 잃은 나라서 잠자코 듣기만 했다. A의 설명은 5분 이상 계속되었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진 나에게 도움을 주려는 A의 선의는 이해하고 있었다. 금융 지식은 생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영역이므로 살아가는 데 중요한 분야라는 것도 잘 안다. 그렇지만 40대 초입에 들어선 모든 사람이 재테크에 관심의 집중을 쏟아야 하는 건지, 그게 정답인 건지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이에 재테크 분야에 관심을 줄인 내가 좀 뒤떨어진 사람인 건가'라는 불안감도 이어졌다.


 어떤 사회적 관계든 집단이든 ‘주요한 관심사의 카테고리’라는 게 있다. 대체로 이 카테고리는 나이대나 시대 상황에 따라 바뀌게 마련인데, 되짚어 보면 이 변화에도 주요한 흐름이 있었다. 내가 20대였던 시절에는 연애에 관심을 두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연애를 하지 않는 이들에게 ‘너는 어째서 사람 사귀는 데 관심이 없어?’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있었다. 30대 초반에는 결혼으로 그 관심사가 바뀌었다. 이후 비슷한 나이대의 관심이 재테크로 바뀌자 ‘너는 왜 재테크에 관심이 없냐’는 물음을 던지는 이들이 생겼다.


  A처럼 과거의 나는 이른바 ‘주류의 관심사’를 쫓아온 사람이었다. 물론 만남을 가지는 모임이나 집단마다 미세한 차이는 있었으나, 20대 때에 많은 이들이 그렇듯 연애나 커리어 쌓기에 관심이 많았다. 30대 초에 결혼을 했으니 관련 대화를 주변 지인들과 끊임없이 나눌 수 있었다. 그 이후에 다른 사람들처럼 재테크에 몰입한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시기 이후부터는 내가 속한 집단의 주요한 관심사와 내 관심사가 멀어지는 시점이 왔다. 육아와 살림을 하고 있었지만, 그 카테고리의 주제에 전혀 관심 없는 나를 발견했다. '재테크'나 '돈' 역시 내 인생의 주요한 관심사였지만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이 카테고리에서도 다소 거리가 멀어졌다. 아무튼 그 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든 주류와 먼 관심사를 가지면 때때로 이방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   


 그렇게 자신의 관심사와 내 관심사가 어긋난 이후로, A는 나를 만날 때마다 갖가지 조언을 건넸다. 재테크에 관심 두지 않는 나에게 ‘세상 물정에 어둡다’ 거나 ‘지금 우리 나이대에 그 주제에 관심 없는 네가 좀 특이하다’는 말을 꺼냈다. A의 말에 담긴 선의를 알고 있었지만, 원치 않는 조언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인간의 시점은 하나일까, 데이비드 호크니의 <와터의 더 큰 나무들>      



 영국의 팝 아트 화가이자 사진작가, 판화가이자 무대 디자이너이기도 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  ). 21세기에 생존하는 예술가 중 가장 다재다능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잉글랜드의 웨스트요크셔주에서 태어난 그는 브래드퍼드의 미술 대학을 거친 후 런던의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에서 수학했다. 학교에 재학했을 당시, 호크니는 신예 화가를 소개하는 전시회에 참여했는데 이때 뛰어난 재능을 보여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모습 @wikipedia


 학교를 끝마친 후 호크니는 1964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간다. 이곳에서 밝은 사람들과 야자수, 따사로운 햇살 등 이국적 분위기에 매료된 화가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 아예 미국에 정착해 캘리포니아의 생활과 사물, 장소를 주된 모티브로 삼아 작품을 만들어냈다. 매끄러운 표면과 빛나는 색감을 얻기 위해 그림 제작 방식을 아크릴화로 바꾸는 시도도 감행했다.


더 큰 첨벙( 데이비드 호크니, 1967) ⓒ David Hockney, Collection Tate, U.K.

 

1960년대 후반부터는 2인 초상화 시리즈를 그렸는데 주변 인물을 모델로 하여 다양한 습작을 거쳐 실물 크기에 가까운 디테일한 그림을 완성시켰는데, <나의 부모님>, <클라크 부부와 퍼시> 등이 그 대표작이다.


나의 부모님 (데이비드 호크니, 1977) ⓒ David Hockney, Collection Tate, U.K.


 1980년대에 들어와서 호크니는 3차원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실재를 2차원에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와 실험을 거듭했다. 전통적인 서양 회화는 투시 원근법을 통해 현실세계를 2차원에 재현하는 방법이 주류였다. 투시 원근법은 화가의 눈을 하나의 소실점에 고정시키고, 공간 속 물체가 보는 사람과 멀어질수록 작게, 가까울수록 크게 그려 원근감을 나타내는 방식을 말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역시 원근법을 이용해 그려진 작품이다. @The artist


호크니는 이러한 서구의 원근법적 전통에 도전하였다. 실제 인간이 어떤 공간을 관찰할 때에는 한 개의 고정된 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 눈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움직이며, 그에 따라 사물이나 풍경을 보는 시점도 계속 달라진다. 그는 이러한 방식을 회화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와 방법을 활용했는데, 특히 중국의 두루마리 회화에 관심을 가졌다. 두루마리 회화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종이를 펼치면서 그에 따라 관람자의 시점이 옆으로 옮겨가며 이동하고 변하기 때문이다. 호크니는 이러한 점에 힌트를 얻어 다(多) 시점의 포토콜라주와 풍경화를 제작하는 데 관심을 둔다. 


배꽃이 핀 고속도로(데이비드 호크니, 1986) 호크니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대상을 다양한 각도와 시점에서 찍고 이를 연결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포토콜라주 기법을 사용했다.

 

2000년대부터 야외로 나가 엄청난 규모의 대형 풍경화를 제작했는데 이를 통해 평면이 아닌 공간을 재현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시도로 제작한 작품이 2007년에 완성한 대형 풍경화인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 사진 시대를 위한 모티브에 관한 회화>이다.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 - 사진 시대를 위한 모티브에 관한 회화>(데이비드 호크니, 2007) ⓒ David Hockney, Collection Tate


그가 고향인 요크셔로 돌아와 제작한 그림인데, 캔버스를 무려 50개나 활용한 작품이다. 그 규모는 가로 12m, 세로 4.5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그림 속에는 봄이 오기 직전 새로운 싹을 틔우는 커다란 나무들이 자리해 있다. 화면의 가운데에는 거대한 나무의 가지가 복잡한 패턴으로 뻗어서 서로 얽혀 있다. 앞쪽에 펼쳐진 잡목림 뒤쪽에는 분홍빛의 또 다른 작은 숲이 배경으로 늘어서 있다. 왼쪽에는 길이 하나 나 있고 오른쪽의 집 두 채가 있는데, 작품의 규모가 워낙 큰 데다, 다양한 요소가 서로 얽혀 있어 한눈에 화면을 포착하기 어려운 그림이다. (하나의 소실점을 바탕으로 간단하게 풍경을 포착할 수 있는 작품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전시 모습 @ culture-hongkong.com


 

단순히 평면이 아닌 3차원과 유사한 깊은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화가는 직접 야외로 나가 50개의 캔버스를 채웠다. 각각의 그림이 정확하게 맞물리게 하며 하나의 완성작을 만들기 위한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 덕분에 감상자는 초점을 한 곳에 붙박아 놓지 않고 시선을 자유롭게 이동해 가며 거대한 규모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호크니는 원근법을 중시하던 서양 회화의 양식을 버리고 다양한 눈과 관점을 통해 자연 그대로를 표현하는 풍경화를 그려냈다.  


    

하나의 눈이 아닌, 다양한 초점으로    


  

 호크니의 작품을 보면 풍경에 대한 다양한 시점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눈이 움직이며 보는 방식에 따라 시점도 달라져 대상 역시 변화할 수 있음을 화가는 알고 있었다.  

 

 때때로 인간의 삶 속 관심사와 시점 역시 다양한 초점을 가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의 눈과 하나의 카테고리, 초점만을 강조하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도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자신의 관심사를 하나의 소실점으로 붙박아놓고 타인에게도 이를 강요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셈이다.    


 인간의 세계에는 물론 ‘대세’나 ‘주류’라는 것이 존재하게 마련이나, 모든 사람이 한 덩어리가 아니므로 모든 관심사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질 수 없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려운 각자의 초점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가끔 하나의 시선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묘하게 불편해지는 시점이 있다. 주류의 관심사에 관심이 없는 타인을 ‘세상의 시류에 뒤떨어진 사람’이나, ‘특이한 사람’ 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런 이들과 대화를 이어가다 어긋남을 느끼면 결국 나를 탓하고는 했다. 주류라고 불리는 관심 카테고리에 멀어진 내가 문제이며 특이한 인간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면 자신의 관심사가 ‘옳은 것’이며 ‘대세’ 따르라는 그들의 태도가 문제인 경우도 있었다. 관심의 카테고리를 하나로 모으라고 강요하는 그 태도를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부터는 날 탓하기보다 ‘그와 나의 카테고리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내가 틀리거나 뒤쳐진 게 아니라 그저 다른 것뿐이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세상도, 사회적 관계도, 관심사도 다양성의 총집합체다. 대다수의 관심사나 삶의 초점이 남들과 어긋난다 해도 괜찮다. 사람마다 삶의 소실점은 다를 수 있으니까.  



 


- 다음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 글은 8월 23일(화)에 발행합니다.


- 8월 14일(일)에는 책쓰기에 대한 글을 하나 더 써서 발행할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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