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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Jun 04. 2020

직장 사춘기가 왔습니다.

직장 5년 차에 온 권태기를 버틴 힘  

일한 지 5년 차 되던 해였다. 갑자기 직장 사춘기가 왔다. 업무에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달리던 4년 차까지의 시간들이 갑자기 부질없게 느껴진 탓이었다. 직장에서의 노력과 성과가 비례하지 않을뿐더러(사실 직장뿐 아니라 세상 거의 모든 일들이 인풋과 아웃풋이 비례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나의 열의는 과도한 업무만 더 맡게 되는 부작용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힘든 업무를 피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굴거나 직장 동료에게 민폐를 끼치는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편안하게 일하러 다닌다는 진실도 깨닫게 되었다. 책임감이나 업무능력, 열의를 키운들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아침시간이 특히 지옥이었다. 일을 나가기 위해 샤워를 하고 밥을 먹는 그 시간, 가슴이 턱 막혀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늙을 때까지 원하지도 않는 일, 별 성과도 없는 일을 하면서 지루하게 살다가 직장생활을 끝마치게 될 거라는 생각도 했다. 차라리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며칠 쉬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도 했다. 아무런 힘이 나지 않는 나날들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퇴사, 현명하게 직장 관두는 방법, 직업 바꾸는 방법 등을 검색란에 쳐보았다. 그러나 나는 내 직업이 가진 안정성을 버릴 만큼 용기가 있지 않았다. 배운 것이 이 짓(?)뿐인데 직장을 나가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주변에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정신이 없어서 직장 사춘기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조언했다. 다른 이들은 관두려면 서른 살 되기 전에 얼른 관두라고 이야기했다.  


어떤 조언도 정확한 답이 되지는 않았다. 그때 막연하게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무엇이든 딴짓을 해야겠구나. 직장일도 아니고 결혼과도 상관없는 그냥 순수한 딴짓'




 앙리 루소(1844~1910)라는 이가 있었다. 가난한 배관공의 아들로 태어나 세관원으로 살았던 사내였다. 그는 무려 22년간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그 일을 했다. 가난하고 피곤한 생활이 길게 이어진 삶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사회에서 가진 세관원이라는 공식적 역할 외에 그만의 특별한 삶이 있었다. 루소는 화가였다. 전문적으로 미술학교에서 교육을 받거나, 높은 가격에 작품을 팔며 화려한 삶을 살았던 화가는 아니었다. 루소는 '일요화가'라 불렸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고 익혀 일하지 않는 주말마다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기에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이었다. 그가 그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정확한 정보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확실한 것은 그는 세관원으로 일하는 동안 꾸준히 그림을 그렸고, 그것이 루소가 가진 자부심의 밑바탕이 되었다. 

 

나 자신: 초상-풍경(1890, 앙리 루소)

  루소가 44세 때 그린 자화상이다. 여전히 세관원으로 일하던 시기였지만 그는 자신을 당당한 화가로 표현했다. 그의 손에는 팔레트가 들려 있고 팔레트 안에는 사별한 두 아내의 이름인 '클레망스'와 '조세핀'이 적혀있다. 그림의 배경에는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여러 나라의 국기를 매달고 닻을 내린 유람선이 보인다.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파리 한복판은 꽤 휘황찬란한 배경이다. 그러나 이런 배경 속에서도 중심에 가장 크게 자리 잡은 것은 화가인 앙리 루소 자신이었다. 화가인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꿈(1910, 앙리 루소) 

루소는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지 않은 화가였다. 그러나 그는 이국적인 환상의 세계, 특히 열대림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꽃과 나뭇잎이 가득한 숲, 열대림에서 싸우는 고릴라와 인디언, 물소를 습격하는 호랑이 등을 그려냈다. 프랑스를 벗어난 적이 없었던 그는 국립 식물원의 온실을 거닐면서 어떻게 식물들을 그려야 할지 구상했다고 한다. 비례나 원근법이 완벽하게 지켜진 그림은 아니었으나 신비한 분위기를 지닌 작품들이었다. 


 루소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화가가 아니어서 그림 그리는 기술 자체가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림 속 인체 비례가 맞지 않고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던 낯선 화풍을 구사했기에 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해 49세에 비로소 직장을 관두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그의 작품이 가진 독특한 매력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천재화가 피카소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루소는 환상의 세계와 원시성을 독창적으로 표현한 화가로서 재평가받게 된다. 




 루소는 생전에 성공한 화가의 삶을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랫동안 '일요화가'로 살았기에 아마추어 화가로서 설움을 당하기도 했다. 22년간 지속한 세관원으로서의 삶 역시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말마다 빠져들 수 있는 그림이라는 세계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세계였다. 세관원이라는 직업과 전혀 관련 없는 취미였으나 '그림'이라는 딴짓은 그에게 특별한 삶을 선사했다.  


  직장 사춘기를 맞은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나는 루소처럼 대단한 예술가도 아니었고 뛰어난 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직장 사춘기가 온 그때부터 일에 대한 열의를 조금 내려놓고 열심히 '딴짓'을 찾아다녔다. 직업과 상관없는 공부를 하거나, 동호회를 해보면서 내가 좋아하고 즐길만한 일을 찾아보았다. 가급적 나와 완전히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했다. 직장에서의 지루한 나를 잊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모든 취미나 동호회 활동이 꾸준히 이어지지는 않았다. 공부를 해서 자기 계발에 성공한 것도 아니었고, 동호회도 나가다 말다 하다 그만두었다. 그러나 확실히 업무가 아닌 다른 일에 몰두하자 직장 사춘기에서 슬금슬금 벗어나기 시작했다. 동호회에 나가서 더 열심히 취미생활을 즐기기 위해 일을 빨리 끝냈고, 취미를 유지할 돈을 벌려면 직장을 다녀야 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싫은 일을 해도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다. 


 딴짓 중 가장 효과가 있었던 것은 글쓰기였다. 인터넷을 뒤적이며 딴짓을 찾아다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을 집필하는 일을 우연히 시작하게 되었다. 특별한 자격 없이 우연히 시작한 일이었는데도 이 일은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낯선 나라에서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도 이 글쓰기는 큰 위안이 되고 있다. 밤에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상상하며 낮 동안의 지겨운 집안일과 육아시간을 그럭저럭 버티게 되었다. 자유가 거의 박탈된 지금 생활에서도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행위가 글쓰기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권태기의 직접적인 해결책은 '끝내기'다. 직장 사춘기도 마찬가지다. '퇴사'라는 처방이 가장 직접적인 치료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때의 나는 직장을 나와 돈을 벌만한 다른 재주가 딱히 없었고 직업을 과감히 벗어던질만한 용기도 부족했다. 더구나 직장에서 하는 열 가지 업무 중 아홉 가지 정도는 다 싫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정도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어서 버티는 쪽을 선택했다. (심지어 일을 쉬고 있는 지금은 그때 일하던 나의 모습과 매달 들어오던 월급이 가끔 그리워지기도 한다. )


 직장이든 가정생활이든 진절머리 나는 상황이 닥쳐오면, 그런데 당장에 관둘 수 없고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이라면 나는 '딴짓'을 권하고 싶다. 무엇이든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선택하면 된다. 그것을 위안으로 삼아 조금 더 직장에서 버틸 힘이 생길 수도 있고, 우연한 기회에 직장 외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지금 현재의 상황을 잊기 위해 당장 몰두할만한 딴짓이 필요하다. 쓸데없어 보이는 딴짓이라도 때로는 쓸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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