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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Aug 01. 2024

쉽게 무기력에 빠져든다면   

완벽주의를 벗어나는 방법

제주도 여행 일정을 전날 취소한 적이 있다. 십여 년 전쯤이던가. 불현듯 홀로 제주도 여행을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즉시 항공권을 끊었다. 일주일 뒤에 출발하는, 2박 3일 여행에 맞는 일정으로, 즉흥적인 선택이었다.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던 그 순간만큼은 설렜다. 제주의 푸르른 풍경을 여유롭게 즐기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러나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행 준비에 맹렬히 매달려야 하는 순간이 오자마자, 마음속 게으름뱅이가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다. 이 게으름의 화신이 속삭였다. 여행 2~3일 전의 네가 (그러니까 미래의 네가) 일정 짜기랑 준비를 완벽히 해줄 거야. 그 막연한 생각으로 버틸 때까지 버텼다.   


 대망의 여행 이틀 전날이 왔다. 이제 피할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온 거다. 2박 3일간 묵을 숙소도 알아봐야 했고, 여행 동선도 제대로 세워야 할 차례였다. 이런저런 옷가지며 세면도구, 충전기 등등을 캐리어에 욱여넣는 과정도 거쳐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통과의례를 제대로 거칠 수 있을지 의문이 솟았다.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이제 게으름의 속삭임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바뀌었다. 이미 망했어. 이 여행은. 준비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이미 시간이 늦어버렸다고. 언제 숙소를 끊고 여행 짐을 다 꾸린단 말이야. 벌써 이 여행은 어그러진 거야.

 내 손가락은 어느새 항공권 취소 버튼을 향해 있었다. 항공권 취소 위약금도 물어야 했으나 상관없었다. 그렇게 10년 전의 나는, 제주의 푸른 하늘과 산, 너른 바다의 풍경을 감상할 기회를 단번에 포기했다.  


 가끔은 의문이 찾아온다. 십여 년 전 나는 왜 여행 취소란 선택을 한 걸까?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걸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니 여행 출발 이틀 전이었으니 그때부터 열심히 여행준비를 해도 충분했을 터였다.


 결국 게으름이나 무계획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는 ‘완벽한 여행계획을 미리 짜놓아야 한다’는 그림이 있었다. 그 완벽한 그림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여행 준비를 회피했고, 그 모양새에서 100분의 1 정도 일이 어긋난 순간, 여행은 이미 끝난 거라 판단해 버렸다.   


  이렇듯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생각은 이따금 나를 무기력으로 밀어 넣곤 했다.  여행 취소 정도야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양극단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당시에는 내 인생까지 엄격한 틀로 판단했었다. 내 삶은 이미 망가졌고, 어그러진 삶의 모양은 어떤 방식으로도 되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시기. 지금은 많이 벗어났지만, 무기력에 빠져 있던 순간이었다.

  

             




 우리 머릿속 어딘가에는 양극단의 버튼이 있다. ‘참/거짓’ , ‘전부/전무(全無)’ ‘흥/망’ ' 선/악'으로 나와 내 주변 상황을 가르는 버튼. 사물을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서양의 논리적 전통에서 시작된, 이른바 이분법적인 사고다. 


 이분법의 사고에도 장점은 있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문제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 명료함이 스스로를 괴로움에 밀어 넣을 때가 있다.


 자신에게 너그럽지 못한 이들이 대체로 이분법의 프레임과 강박에 갇혀 있다. 자신의 삶이 기대에 못 미치거나, 소중하게 여기는 한 가지를 상실하면, ‘내 인생은 실패작’이라 여기기 쉽다. 성공이나 완벽이 아니라 생각되면 다른 선택지는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실패 도장을 찍어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우울감이 심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스스로의 모든 경험을 나는 유능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이 경우 그는 ‘내가 어떤 일에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할 경우, 나는 실패자다’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스스로를 괴로운 상황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WIKIART



이런 사고방식은 위험한 상황을 불러오기도 한다. 작년 수도권의 한 백화점에서는 칼부림 사고가 있었다. 범인은 20대의 청년이었다. 청소년 시절 그는 특목고 진학을 희망했지만 실패했다. 특목고와 명문대에 입학한 형제와 다른 인생 경로를 걷게 된 것이다. 일반고에 진학한 그는 “이런 시시한 일반고는 안 다닌다”며 자퇴를 했다. 국립대에 진학했으나 조현병이 발병했고,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결국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    

  

 가해자에게 동정이나 연민을 던질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가 품었을 머릿속 프레임을 떠올려보면 안타까운 면이 있다. 어째서 20대의 젊은이는 특목고 진학 실패를 '시시한 인생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여긴 걸까. 특목고에 가지 못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선택지, 크고 작은 실패의 경험 중 하나일 뿐인데.


 이처럼 이분법적 사고는 좁고 얕은 시선을 가져올 수 있다. 생각의 범주가 두 가지 가운데 하나에 얽매이다 보니, 사고의 폭은 그만큼 제한된다. 세상을 극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그 간극만큼 세상을 오해하기 쉽게 만들고 위험한 상황을 불러올 때도 있다. 


 타인과 세상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린 주장을 한다고 판단하기 쉽다. 사람을 내 편과 또는 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협력과 연대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새로운 생각이나 시선의 탐색에도 어려움이 생긴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주변 사람 대다수를 ‘나에게 상처 입히는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가끔 존재한다. 상대가 자신에게 조금만 무심하거나 한 가지 측면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경우, '나쁜 사람', '가해자'로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관계의 빌런도, 그 피해자도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대다수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드라마 속 캐릭터처럼 완벽히 착하거나 나쁜 사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조금씩 기쁨과 상처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는다.





 이렇듯  양극단의 사고방식으로 괴로움에 빠질 때 유용한 이론이 있다. 컴퓨터과학 분야에서 시작된 퍼지(fuzzy) 이론이란 것이다. 퍼지(Fuzzy)는 영어로 '애매한', '흐릿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인데, 말 뜻 그대로 퍼지식 사고는 "예" 또는 "아니요"처럼 명확한 구분 대신, ‘정도’를 살피는 사고방식, 불확실성을 수용하는 생각이다. 흑과 백 사이에 존재하는 회색의 지대를 인정하는 것이다.      


 가령 “오늘 날씨는 덥다"라고 말할 때, "덥다"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상대적인 판단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24도가 더운 것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30도가 더울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따스한 인간관계의 온도가 누군가에게는 답답한 것일 수 있다. ‘젊다’ ‘나이 들었다’의 의미를 가를 때에도 사람마다 그 나이의 기준이 다르다. 퍼지는 그런 애매하고 모호하며 경계로 나누기 어려운 것들을 인정하는 자세를 말한다. 흑백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회색 영역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퍼지식 사고는 나를 괴롭게 만드는 사고의 틀을 전환하도록 도와준다. 가령 상대를 판단할 때 ‘나를 상처 입히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문제에 있어 유독 무심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면, 객관적이고 입체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다.


 퍼지식 사고는 무기력에서 헤어 나오는데도 큰 도움을 준다. 오늘 여행 준비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더라도 ‘오늘 좀 게을렀지만 준비를 10%라도 했으니 괜찮다.’ 식으로 생각을 전환하면,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고, 다음 단계를 밟아나가기 수월해진다. 유연한 사고와 너그러운 마음이 자존감 회복과 일의 진행에도 도움을 주는 셈이다.

     


 삶은 늘 선과 선 사이의 불온하고 흐릿한 것 것들, 경계선에 발 딛은 것들, 애매한 것들의 스펙트럼 안에 존재한다.  스펙트럼을 받아들이면, 자유롭게 삶을 유영할 수 있다.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해서 적어보았습니다. 저는 타인을 판단할 때는 극단적 사고를 많이 하진 않는데, 스스로에게 이분법적인 판단을 해서 성공과 실패에 엄격해질 때가 있어요.


 제가 미리 생각해 놓은 완벽에 가깝지 않으면 아예 모든 걸 회피해 버려서, 게을러지거나 무기력해질 때가 있기도 하고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생각이 좀 더 유연해져서 그런지 조금씩 그 엄격함을 내려놓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씩 괴로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학생들 가르치면서도 요즘 아이들이 ‘성공/실패’ ‘흥/망’ ‘옳다/그르다’ 식의 생각에 조금 더 엄격하단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 사실이 가끔은 좀 안타깝습니다.      


 이틀 전까지 제주도 휴가를 다녀오고 이런저런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오늘 글은 좀 거칠고 급하게 쓴 면이 있어요. 다음 주부터는 짧은 방학이 끝나 개학이기도 해서, 정신없이 글을 적었네요;;; 죄송하단 말씀드립니다.      


다음 글은 8월 8일(목)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그 전이나 그 후에 글을 발행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더위 조심하시길요 : )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유랑선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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