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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Jul 11. 2024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힘든 당신에게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는 삶  

 온라인 독서모임을 할 때의 일이다. 유명한 저자의 인지도 높은 책을 다룬 날이었다. 총평의 시간에 한 분이 말했다. 남들이 모두 이 책 ‘훌륭하다’, ‘좋다’고 말하는데,  난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전 이 책 별로거든요. 그런데  그런 말하면 나만 특이해 보일까 봐, 호응 못 받을까 봐 말을 삼켜요. 


생각지 못한 얘기였다. 뜻밖에 다른 구성원들이 그 말에 호응했다. '실은 나도 이 책을 열렬히 좋아하진 않았는데 말 못 했다 ‘며 고개를 끄덕이는 도 있었다.      


 그분의 용기 있는 고백을 곱씹어 봤다. 남들과 달라 보일까 봐 솔직한 느낌을 내뱉지 않는다는 말.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비슷하다.  '남들에게 특이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삶의 모토인 양 안전하게 굴 때가 있다. 별로라 느낀 것도 다수의 취향이면 마음에도 없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좋아하는 척한다. 하고픈 일도 대세가 아니면 그냥 참고하지 않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남들 몰래 할 때도 있지만 -


  사회생활에 임하는 자세도 그렇다. 오랜만에 직장에 복귀하며 지인에게 작은 바람을 털어놨다.  ‘주변에 원만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일하며 특이하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고 싶진 않다’는 작은 소원. 그 말을 들은 상대가 놀란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대답한다. “아니, 욕심이 너무 큰 것 아니에요? 그냥 일에 적응하는 것도 힘든데 원. 만. 이라고요?” '원만'이란 단어가 외계어인 양 그는 힘주어 말했다. 내가 만든 자기 검열의 성벽이 너무 높고 견고하단 얘기도 덧붙였다.  


 상대가 말한 성벽이 뭘까 생각해 봤다. 비정상, 특이한 인간, 괴짜, 예민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내면의 규칙이 아니었을까. 글 쓰면서 튀어나오는 내 자아와 사회생활하는 자아가 충돌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글쓰기세계에서는 특이한 발상이나 표현이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내 일터에서는 '특이하다'는 평판이 부정적 의미로 통할 때가 많으니까.  

 

 실수나 잘못을 두려워하는 경향도 있다. 실수를 한번 하면 남들에게 이상해 보일까 봐 소심해지거나 전전긍긍할 때도 많고. 가끔은 아는 사람이 없을 때에도, 직장이 아닌 곳에서도, 심지어 홀로 있을 때조차 스스로를 검열하다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내 느낌이나 취향이 특이해 보이려나? 줄 안에 안전하게 서 있어야 하는데, 바깥에 서 있는 거 아닐까?


 한참 생각을 이어가다 문득 갑갑함을 느낀다. 아무도 날 가두지 않았는데, 어딘가 갇힌 느낌이 들어서. 



타인의 시선도 감옥이 될까?


 타인의 시선에 매인다고 생각될 때,  ‘파놉티콘'(panopticon) 떠올린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구안한 원형 감옥의 이름이다.  ‘한눈에 전체를’(pan) ‘들여다본다’(opticon)는 뜻의 라틴어의 조합어로 만들어진 말이다.


  감옥의 구조는 간단하다. 중앙에는 원형 감시탑이 있고 그 둘레를 빙 둘러싼 감옥시설이 있다. 중앙은 간수의 감시 공간이고, 바깥쪽은 죄수의 밝은 방이다. 중앙의 감시탑은 조명을 어둡게 하고, 주변 수감자들의 방은 밝게 한다. 간수는 죄수의 일상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시할 수 있다. 



벤담이 이야기한 파놉티콘의 구조와 감옥의 모습



 파놉티콘 구조의 핵심은 뭘까. 감독관과 수감자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다. 감독자는 한눈에 수감자 전체를 감시할 수 있다. 수감자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이 감시당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언제나 감시의 시선 속에 있다는,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품는다.


 설령 감시자가 자리에 없을 때라도 동일한 감시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감시체제 아래에서 수감자들은 철저한 정보의 대상이 된다. 정보를 소통하는 주체가 되기 어렵다. 


 한쪽은 언제 어디서든 감시가 가능하나, 다른 한쪽은 감시가 불가능한 상황.  수감자는 감시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스스로를 감시한다. 감시의 내면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벤담의 파놉티콘 개념은 20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언급하며 더욱 유명해졌다. 푸코는 자신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을 현대 감시체제의 핵심이라 얘기했다.


그에 따르면 학교나 병원, 공장이나 군대에는 규율이 있다. 이곳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면 규율에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시점에만 규칙을 지키지만, 간이 지날수록 감시의 내면화가 이루어진다. 생각의 틀도 규율에 맞춰진다.  


이때 대놓고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권력 행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규율 권력이 작용하는 것이다. 대한 지식이나 담론이라 불리는 것들, 권위를 얻은 규칙, 언뜻 강요로 보이지 않는 것도 '부드러운 권력'으로 힘을 발휘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좌)의 모습과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한 장면


 그래서 파놉티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현대인들은 겉보기에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어떠한 통제와 억압도 없이. 그러나 내면을 살펴보면 온갖 통제와 규율에 훈련된, 보이지 않는 시선에 갇힌 순한 죄수일 수도 있다. 

  



 시선에서 벗어나 나다운 삶을 찾으려면  


 타인의 시선이라 생각한 것들 -규칙, 지식, 다수의 취향-을 그대로 따라 살다 보면 스스로에 대한 정보를 통제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는 데 소극적이 된다. 자신의 행동 어딘가가 튀지 않는지, 남들과 다르지 않은지 끊임없이 검열하는 일도 벌어진다. 그렇게 규격화된 삶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이유 없는 갑갑함을 느낄 때도 있다. 삶이 거대한 파놉티콘에 갇힌 듯 느껴지는 것이다.  


 과한 자기 검열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설적이게도 감옥 안에 있는 날 깨닫는 게 우선순위일 수 있다. 어딘가에 갇혀 있음을 먼저 깨달아야 비로소 그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으니까.  

 

 푸코가 언급한 '낯설게 보기'도 좋은 방법이 된다.  다수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권위가 부여된 지식이나 맥락을 의심해 보는 방법이다. 


 이 낯설게 보기를 위해 내가 자주 쓰는 방식은 질문하기다.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근사하다고 찬사 받는 책이 나에게도 훌륭한 텍스트인 걸까? 내가 좋아하다 생각한 연예인이나 영화나 그림이 진정 내 취향인 걸까? 그저 남들과 비슷하게, 안전하게 집단에 소속되고픈 마음으로 추종하는 게 아닐까.  질문하고 의심하다 보면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타인의 시선이나 생각, 다수의 취향이 반드시 옳은 건 아니란 깨달음이다.   


 

  이 ‘질문하기’의 과정은 흥미롭지만 가끔은 고단하다. 세상과 다수의 말대로 사고하고 따르는 게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방식이니까. 내 게으른 뇌가 부지런해질 이유도 없고, 에너지도 절약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질문 없는 삶을 살다 보면 슬며시 또 다른 질문이 고개를 쳐든다. 게으르고 납작한 삶을 따라가다 나란 존재가 휘발되는 건 아닐까. 결국 질문하고 의심하고 곱씹어보는 내가 다시 등장한다.   

 

피곤한 과정이지만 별 수 없다. 

나답게 살아가는 일에는 언제나 분투가 필요하니까.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자기 검열에 대한 글을 써봤어요. 오랫동안 구상도 했고 조금씩 써보기도 했지만 계속 완성을 못했던 글이에요. 타인을 의식하는 삶, 자기검열하는 삶을 파놉티콘에 빗대는 게 지나치게 과격한 비유 아닐까? 싶어 망설였거든요. 늘 그렇듯, '너무 다듬어지지 않는 글을 발행하나?' 싶어서 고민하기도 했고요.(이것 역시 과도한 자기 검열이겠죠?) 


 그렇지만 역시 써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글을 올려 발행해 봅니다. 여전히 자기 검열을 많이 하고 주변의 취향과 의견을 따라가는 게 제 주된 모습이지만 ㅎㅎ 그래도 제 자신에 대한 글을 쓰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스스로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글쓰기가 나다운 것, 주체적인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한 가장 좋은 도구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다음 글은 7월 18일(목요일)에 발행하려 합니다. 좋은 한 주 보내시길요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유랑선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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