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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Jun 13. 2024

17세기의 인스타그램 인증샷, 네덜란드 정물화  

과시욕의 오랜 역사 

 언제부터인가 ‘고급지다’란 칭찬을 여기저기서 보고 듣는다. 연예인에게 '고급스럽게 예쁘다’라는 칭찬을 건네거나 , 근사한 물건이나 값비싼 취미를 가진 사람에게 ‘고급진 취향이네’란 찬사를 덧붙이는 식이다. 존경이나 동경, 부러움이 담긴 찬사지만 가끔 의문이 든다. 원래 ‘고급스럽다’는 말은 물건의 품질과 등급을 따질 때 붙는 말 아닌가 싶어서. 


 사물에 붙이는 형용사든, 사람에게 덧붙이는 관용어건 간에, 많은 들이 ‘고급 인간’으로 보이길 원한다. 호텔에서 값비싼  디저트를 먹는 장면이라던가. 몰고 다니는 외제차 마크, 명품 가방이나 시계를 은근히  드러낸 SNS 사진 속에 그런 욕망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요런 것들. 

 

 역시 '보여주기식 욕망'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십여 년 전쯤에는 좋은 동네의   아파트에 입주해 살아보는 게 꿈이자 희망이었다. 고층 아파트의 근사한 뷰를 즐기거나 반짝이는 아파트에서 좋은 기능을 누리고픈 마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새 아파트에 입주해 풍요와 행복을 누리는 나’를 전시하고 싶은 마음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열 살 무렵. 학교에서 일부러 두껍고 어려운 세계명작 소설을 꺼내  친구들 앞에서 골라 읽는 소녀가 나였다. 그 작은 소녀의 허영심이 30대까지 숨 쉬고 있던 것 아닐까. 가끔 생각해 본다.




  지금은 부(富)에 대한 보여주기식 욕망에 대해서만큼은 많이 겸손해졌다. 중동에서 해외살이한 경험 덕분이다. 쇼핑몰이나 백화점에서 명품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고 다니는 석유부자를 보는 일이야 일상이었고, 현지 고등학생들이 비행기 일등석을 아무렇지 않게 끊어 유럽으로 수학여행 갔다는 얘길 들은 적도 다. 그런 경험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어마어마한 부자를 보며 절로 수그러들고 움츠러드는 식의 겸손함은 아니다. 그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 후 찾아오는 담담함 같은 거랄까.


 그러나 종류는 달라졌다 해도 여전히 날 보여주고 드러내고픈 욕망은 품고 있다. 두터운 책을 아무렇지 않게 읽으며 유식한 사람이란 걸 뽐내고 싶은 마음, 꽤나 심오한 고민을 하는 생물체란 걸 드러내고 싶거나 고급 취향을 가졌단 걸 보여주고 싶은 욕망 뭐 그런 종류의 것 말이다. ‘고급 인간’으로 자리매김하고픈 욕망은 내 안에도 있다. 


    


 

빌렘 칼프, 뿔 술잔이 있는 정물화, 1653 @wikiart


 은 장식이 덧씌워진 술잔의 광택이 빛난다. 유리잔의 투명함, 가재의 매끄러운 표면과 붉은빛, 테이블에 깔려 있는 고풍스러운 질감의 천, 싱싱한 과일의 촉촉함까지 놀랍도록 생생하다. 생명이 없는 정물을, 생동감을 화폭에 담아낸 화가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던 빌렘 칼프(Willem Kalf, 1619~1693)라는 예술가다. 화가는 빛과 그림자를 능숙하게 사용하며 정교하게 사물을 그려낼 줄 알았다.  


 특히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건 주로 '값비싸고 진귀한 것들'이다. 반짝이는 은식기와 진귀한 해산물과 식재료, 동양에서 온 청화백자처럼 값비싼 사물을 자주 그렸다. 이런 면에서 빌렘 칼프를 프롱크 정물화의 대가라고 일컫는다. 


 프롱크는 네덜란드어로 '장식'과 '겉치레'를 뜻하는 용어다. 즉 프롱크 정물화(Pronkstilleven)는 실제의 취향이나 취미와 상관없이 ‘보여 주기’를 위해 그려진 호화로운 그림을 뜻한다. 귀한 꽃이나 이국의 산물, 값비싼 식기, 고급스러운 유리잔, 은식기 등을 소재로 호화로운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명 말, 생강 항아리가 있는 정물, 1669  @wikiart


 이 화려한 그림이 유행하던 17세기의 네덜란드는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는 국가였다. 조선 기술의 발달과 뛰어난 항해 능력을 바탕으로 해상 무역의 중심 국가로 성장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식민지 경영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유럽 최초의 근대적인 금융 시스템을 구축한 것도 이 작은 나라였다. 종교적 개방성으로 신교도나 유대인들이 해외에서 이주해 와 상공업에 종사하며 부를 쌓는 중이었다. 


 국제무역과 상공업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신흥 부유층은 자신의 부를 주변에 과시하고 싶어 했다. 21세기의 현대인은 외제차나 호텔 디저트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지만, 17세기의 네덜란드인은 자신의 집에 손님을 초대해 은근히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곤 했다.  특히 집 거실의 따스한 벽난로 근처에서 차나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때 벽난로 근처에 걸린 그림이 대화의 소재가 되었다. (그래서 옛 서양화 중에는 그림이 변색되어 색깔이 변한 경우가 많다. 그을음이 올라오는데도 불구하고 벽난로 위에 작품을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화려한 꽃병, 고급스러운 은쟁반, 사냥한 죽은 짐승(당시에는 사냥 역시 돈이 많이 들어 부유층이 즐기는 행위였다), 사치스러운 이국의 산물을 소재로 한 정물화가 인기를 끌었다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 집주인의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지위 은근히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집에 초대받은 손님은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한 마디씩 이야기를 던지는 것이 예의였다. 심오하고 격조 높은 화두를 건네며 대화를 나누는 게 중요해서, 정물화 화가는 애초에 그림을 그릴 때 대화 주제로 적합한 것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Banquet_Still_Life Adriaen van Utrecht,1644 @wikiart

 


 흥미로운 건 이 격조 높은 대화의 주제가 삶의 '덧없음’과 ‘부질없음’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생에 죽음이라는 끝이 있음을 잘 알았다. 네덜란드인의 대다수가 겸손과 절제, 청렴을 강조하는 종교적 가르침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죽음에 이르면 부유함도, 책으로 익힌 해박한 지식도, 감미롭게 귀를 감싸는 악기의 선율도 끝이 난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롱크 정물화는 충돌하는 두 가지 가치를 담고 있다.  ‘호화로움’과 그 ‘호화로움의 덧없음’이라는 이중의 의미. 그림 속 싱싱한 과일은 곧 시들어 버릴 운명을 암시한다. 반짝이는 유리잔과 고급스러운 도자기는 언젠가 사라질 부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서적 역시 대단한 이론과 지식이라 해도 죽음과 함께 끝을 맞이함을 뜻한다. 이런 면에서 프롱크 정물화는 집주인은 자신의 교양과 철학을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가장 호화로운 사물을 배치하면서  호화로움의 덧없음과 공허함을 강조한 그림. 그 그림이 또다른 '보여주기'의 수단이었다는 것. 아이러니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이다.  



Willem kalf, Still life with an quamanile fruit and a nautilus cup, 1660

  

 이런 면에서 화려한 SNS 인증샷이 범람하는 21세기에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는 흥미로운 메시지를 건넨다. 스스로를 과시하고픈 인간의 욕망은 시대 불문 존재한단 사실 말이다.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랜만에 글을 남깁니다. 


 오늘은 그림을 다룬 글을 발행해 보았습니다. 제가 그저께 마감한 원고가 서양의 정물화와 경제사를 엮는 내용이라, 시간이 충분치 않은 지금 그나마 손쉽게(!)(사실 쓰는 과정이 전혀 손쉽지 않았지만) 남길 수 있는 글이라서 이 글을 발행해 올립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예전보다는 '날 내비쳐 보여주고픈 욕망'은 예전에 비해 많이 사그라졌어요. 그래도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이니까 스스로를 과시하고픈 욕망이나 드러내고픈 욕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느끼곤 합니다. 가끔은 글을 쓰다가도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질 때가 있어요. 글을 쓰는 것 역시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고 싶은' 내 과시욕으로 이어가는 행위 아닐까?란 질문을 이따금 던져 보게 됩니다. (특히 명화에 대한 글을 그런 의문을 품게 되네요.) 그렇지만 이런 제 욕구를 잘 들여다보면서 글의 좋은 소재를 얻을 때도 있습니다.  


 오랜만의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글은 다음 주 목요일, 6월 20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오후 보내시길요 ^^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유랑선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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