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야 할 때
가수 이효리가 모교의 졸업식에서 한 축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 기대고 위안 받으려 하지 말라. 그냥 ‘인생은 독고다이’라고 생각하라는 얘기였다. 슈퍼스타가 건넨 담담한 조언에 마음이 끌렸다. '인생 독고다이'라는 말이 어쩐지 마음에 와닿았다.
무소의 뿔처럼 인생길을 홀로, 단단하게 걸어가고픈 욕구가 내 안에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 일상생활에서 나는 남들 취향을 기웃대며 주로 따라다니는 쪽이다. 무엇보다도 평점 신봉자다. 인터넷에서 맛집을 찾을 때는 무조건 평점부터 찾아본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살 때도 그렇다) 특별한 음식 취향도 그다지 없는 데다 '맛있음'의 허들도 낮고, '아무거나 먹자' 주의이긴 하지만, 허기진 순간 들어간 음식점에서 예상외의 맛없음을 경험하고 싶진 않다. 적어도 손해 보진 않겠다는 마음으로 평점을 확인하는 편이다.
그러나 철썩 같이 믿던 평점도 날 배신할 때가 있다. 낯선 곳으로 주말여행을 갔을 때였다. 점심으로 갈 음식점을 고르는 때였는데, 늘 그렇듯 별생각 없이 가장 가깝고, 평점 높은 곳을 찾았다. 평점이 무려 5점 만점에 4.8점이었다. 후기도 칭찬 일색이었다.
그러나 도착해 한 입 먹은 음식은 기대 이하였다. 반찬으로 나온 나물은 시들했다. 달아야 할 반찬은 짰고 적당히 짭짤해야 할 듯싶은 반찬은 싱거웠다. 이거 뭐야. 평점 조작인 건가. 내 입맛이 이상한 건가. 주변을 슬금슬금 둘러봤다. 다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조용히 입을 닫고 나도 맛있는 척하면서 음식을 먹긴 했다. 아무래도 음식이 괜찮은 것 같다며 자기 세뇌도 해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음식은 내겐 맛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크고 작은 선택을 거듭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대한 착각일 수 있다. 인간 세계에는 사회적 영향(social influence)이란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사회적 영향의 대표적인 현상이 다른 사람의 특정행동을 따라 하는 동조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처럼 사람들은 타인의 머리스타일이나 옷을 따라 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자신의 선택이 적절한 것인지 확신이 없거나 정보가 부족할 때 타인에게 동조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학의 개념에도 밴드웨건 효과라는 게 있다. 밴드웨건은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에 행렬을 선도하던 악대차를 말한다. 악대차가 연주하며 지나가면 무작정 뒤따라가는 군중들을 비유해서 붙은 말이다. 남들이 줄 서는 맛집, SNS에서 유행하는 음악과 밈, 천만 영화가 인기를 끄는 것, 모두 밴드웨건 효과의 예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정답이 명백한 상황에서도 타인의 오답에 동조하는 경우가 생길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애쉬는 선분실험이라는 걸 했다. 실험은 간단하다. 한 자리에 실험 참가자를 7~9명 모아놓고 물어본다. 기준 선을 왼쪽에 보여주고, 오른쪽의 A.B.C. 선 중 기준선과 똑같은 길이의 선분이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정답은 몇 번일까? 당연하게도 C다. 질문의 답을 구하는 건 너무도 쉽다. 그러나 함정이 하나 있었다. 실험참가자 7~9명 중 순수하게 참여한 사람은 1명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연기자란 사실이었다. 순수한 실험 참가자를 제외한 연기자들은 답이 A나 B라고 말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순수하게 실험에 참여한 사람은 응답을 하기 위해 마지막 자리에 앉아 있다. 연기자들의 오답을 다 들은 다음, 대답을 하는 상황이었다.
실험이 시작되면 실험 협조자(바람잡이)들은 정해진대로 오답을 말했다. 진짜 실험 참가자는 처음엔 어이없는 답에 웃거나 놀라거나 웃었지만, 자신이 답할 차례가 다가오자 머뭇거렸다. (아마 내가 잘못된 건가 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스쳤을 것이다.) 연구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올바른 답은 C인 것이 명확하지만 여러 차례 비슷한 실험을 했을 때 끝까지 자기 주관대로 맞는 답을 한 참가자는 25%에 불과했다. 질문의 답은 명확했지만, 많은 이들이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타인의 눈치를 보며 신념을 바꾸었다.
애쉬의 선분실험은 개인이 다수의 집단에 어떻게 동조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동조가 개인의 신념과 의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말해준다. 또 다른 질문도 던질 수 있다. 사람들은 왜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상황에도 동조를 할까. 보통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될까 두려운 마음이 있다. 계속 다른 답을 이야기하면 집단에 직접적인 도전을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배척에 대한 불안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집단으로부터 인정받고 거부당하지 않게 행동해야 배척당할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애쉬의 선분실험을 통해 다양한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집단 따돌림에 침묵하는 방관자가 왜 생기는지, 단체로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행태가 어째서 일어나는지 그 메커니즘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집단에서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 가까운 사람이 권유해서,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라, 때로는 나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답이 아닌 것을 택할 때가 있다. 내게 맞지 않는 부적절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늘 그렇듯 내 주관과 신념대로 살아가는 건 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타인의 생각과 세상의 의견에 늘 반기를 들자는 얘기는 아니다. 한결같이 나답게 사는 길을 찾겠다고 외칠 수도 없는 일이다. 일단 나부터도 두리번대며 주위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가끔은 오롯이 내게만 집중해 나에게 타당한 진리를 찾아갈 필요가 있다. 평점 5점짜리 맛집의 요리가 내게도 맞는 맛을 가진 건지, 남들이 좋다고 하는 여행 코스가 내게도 행복을 선사해 줬는지, 유명한 작가의 책이나 철학자의 가르침이 내게도 적절한 것인지. 몸소 경험하고 내 느낌을 찾아야 답을 찾을 수 있는 일이다. 모든 사람의 답은 각자 다르니까.
주변에서 진리인 듯 말하는 명제에도 가끔은 딴지를 거는 게 좋지 않을까. ‘내 말만 따라 하면 100% 성공한다’, 따위의 주문이 널리고 ‘자존감 높은 사람이 행복하다’는 명제가 가득한 세상이니까. 주변의 이야기를 듣는 데에도 거름망이 필요하다. 더없이 소중한 가족이나 친구가 권유한 것이 내게는 맞지 않을 수 있다. 모두가 안정감이나 행복을 준다고 말한 길이 내게도 적합한 행복과 안정감을 주지 않을 수 있다. 훌륭하고 멋져 보이는 사람이 건네는 조언이 내게는 타당하지 않은 말일 수도 있다. 타인에게는 보석 같은 진리라도 나에겐 개소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의심하지 않으면, 낯설게 보지 않으면, 나라는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 타인의 평점은 높지만 내겐 맞지 않는 음식만 실컷 맛보다가 인생이 끝나버릴 수 있다. 몸소 경험해 보며 내게 맞는 행복과 만족의 데이터를 평소에 차근차근 쌓아놓아야 할 이유다.
그래서 인생 독고다이라는 말의 의미는 의미심장하다. 이 담담한 조언은 인간관계를 전부 끊어야 한다거나 남의 말을 듣지 말고 아집 속에 살아가라는 얘긴 아닐 것이다. 내게 맞는 길은 그저 내가 오롯이 찾아가야 한다는, 주변의 말에 늘 의존할 수는 없다는, 모든 사람은 결국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외롭고 쓸쓸하지만 당당한 진리 아닐까.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동조현상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무조건 제 느낌과 직감을 믿고 혼자 결정을 하는 편이에요. (이럴 때는 주변 얘기를 많이 듣는 편이 아니고 일부러 조언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일상생활에서는 튀지 않고 무난하게, 남들과 비슷비슷하게 지내는 게 모토라 주변 눈치를 꽤 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왜 그럴까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어제까지 원고 마감을 하나 끝내느라 정신이 약간 없었어서ㅎㅎ(일정 때문에 마감을 제 때 못 끝내서 아직 전체 원고의 절반만 집필하고 편집자님께 보내드렸네요;;;) 글 발행 시간이 조금 늦었어요. 원고 집필 때문에 지난 주에는 이웃분들 글도 충분히 찾아가 읽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네요.;;; 지금부터는 약간 더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찾아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다음 글은 5월 16일(목)에 발행하려 합니다.
Cf. 독고다이는 원래 '스스로 결정하여 홀로 일을 처리하거나 그런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일본어 잔재어입니다. 순화해서 쓰는 게 좋지만 어감을 그대로 살리느라 그냥 사용했음을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