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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May 02. 2024

"너 T야?"란 질문에 숨은 의미

MBTI는 왜 관계 맺기의 기준이 된 걸까  

 어릴 때부터 혈액형을 밝히는 걸 꺼렸다. AB형이었기 때문이다. 혈액형을 묻는 질문에 AB형임을 밝히면, 이런 말을 듣곤 했다. “AB형은 천재 아니면 돌아이(?)라는데?” 알다시피 나는 천재가 아니고, 그 사실을 파악한 상대가 던지는 시선엔 의문이 담겨 있었다. 얘 평범해 보였는데 혹시 돌아이 쪽인가란 질문. 안타깝지만 나는 돌아이도 아니어서, 상대를 실망시키곤 했다. 


최근엔 혈액형이 뭐야? 란 말은 유행 지난 질문이 되었다. 대신 “네 MBTI는 뭐야?”란 질문이 대세를 이룬다. 심리학자 칼 융의 심리 유형론을 기반으로, 미국의 브릭스 마이어스 모녀가 개발했다는 성격 검사다. 이 대세 검사는 16개의 분류로 인간의 성격을 유형화한다. 이 틀 안에서 찾아낸 내 MBTI는  INTP다. (가끔 변하기도 하지만) 

 

MBTI 유형분류(좌, @브레인 미디어)와 내가 속한 유형인 INTP의 특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 . 내 성격에 해당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과학적 타당도에 의한 의문이 떠도는 검사지만, 가끔은 이 MBTI 분류가 마음의 위안을 건네기도 했다. 나라는 인간의 특성 중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왜 간단한 것도 늘 복잡하게 생각하는지, 귀찮음에 자주 종속당하는지, 실용적인 지식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과 동떨어진 정보에만 흥미가 가득한 건지,  몇 가지 특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워서, 자기혐오의 감정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내 성향을 두고 가졌던 의구심이 MBTI를 보며 풀리는 느낌이었다. 고백건대 내 성격 유형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삼은 적도 있다. 그래, 내가 친구들에게 연락을 잘 안 하는 건 의지나 애정 부족 탓이 아니야(이걸로 과거에 욕을 제법 먹곤 했다) 이건 내 타고난 기질 때문이라고 따위의 문장을, 마음속으로 외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자기 위안이었다.   

 

뻔뻔한 자기 위안의 과정을 몇 번 거친 적도 있으나, 최근엔 INTP 중 T라는 걸 은근히 숨기게 됐다. 최근 유행하는 밈 중 하나가 ‘너 T야?’라는 질문이니까. MBTI에서 T는 사실 기반으로 이성적 사고를 주로 하는 ‘사고형(Thinking)’을 의미한다. 반대 지표는 F(Feeling), 감정형이다. 감정형들에 비해 사고형인 사람들은 타인의 고민에 위로나 공감보다 문제 해결을 이야기하고 냉정한 충고를 건넨다는 얘기가 있다. 그래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로 몇몇이 건네는 밈이다. 


  ‘F는 공감 능력이 높고, T는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명제에도 의문을 제기하고 싶긴 하다( 일단 이 명제의 진실 여부를 따지려면 ‘공감 능력’의 정의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판을 굳이 듣고 싶지 않기도 해서,  MBTI 얘기가 나오면 말을 아낀다.   


  한편으로는 MBTI 정보의 홍수 시대에 의문도 생겼다. 과학적 타당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나 유사과학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혈액형 검사나 MBTI검사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니까. 사람들은 왜 자신과 타인을 끊임없이 유형으로 분류하려 하는 걸까. 


 




 인간은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 노력한다. 그래야 상대가 내게 안전한지, 친밀감을 쌓을 수 있는 유형인지 그 여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사회생활을 하는 건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다. 타인이 어떤 말과 행동을 보이는지 세심히 살펴본 다음, 상대를 이해하고 성격 됨됨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눈과 귀와 뇌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복잡한 인지적 과정을 거치지 않는 방법은 하나다. 유목화다. 상대를 직업이나 혈액형, 경제 계층, 출신 지역 등으로 분류해 그 틀 안에 넣어서 판단할수록, 보다 효율적으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상대의 행동 예측도 간편해진다. 가령 경상도 출신인 사람을 보았을 때 ‘이 사람은 무뚝뚝한 성격일 가능성이 높겠군’ 정도의 판단을 한다거나 군인을 만난 경우 보수적이거나 애국심이 강할 것이라 지레짐작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누구나 처음 본 상대를 마주할 때 그를 어떤 집단으로 유목화하려는 경향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만남의 횟수가 잦아지거나 상대를 더 알게 되면 고정관념이 깨질까? 그러기 어렵다. 사람의 머릿속에 고정관념이 한 번 형성되면, 상대의 행동을 고정관념에 들어맞게 살펴보려는 충동이 일어나기 쉽다.  경상도 출신인 사람이 다정한 말투를 구사한다거나, 군인이 보수적이지 않은 행동을 보일 경우, 그런 행동은 주의 깊게 보지 않고 최대한 무시하기 쉽다. 원래 인지하던 사실과 새로 인지하게 된 사실 사이에 부조화가 일어나면 누구나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고정관념에 맞는 사례에 주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시한다. 이런 방식으로 고정관념이 강화된다. 





 

 최근 들어 출신지역이나 성별, 직업만큼 MBTI가 관계 맺기의 중요한 척도가 됐다. MBTI를 통해 나와 친밀감을 쌓을 수 있는 상대인지 판단하거나 상대가 보일 행동을 추측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대세 검사의 간편함이 때로는 문제가 된다.  타인에게 벽을 세우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가령 “너 T야?”라는 질문에는 ‘T는 이성이 강해서 감정 표현 능력,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만약 상대가 그 예측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이를테면 다정한 위로 등을 하면 – 그 증거는 무시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더구나 사람에게는 '내집단 편향'의 경향이 있다. 내가 속한 집단을 우호적으로 판단하고 다른 집단은 배척하려고 하는 편애 경향을 보이기 쉽다. 만약 내가 T의 입장이라면 T에게 조금 더 우호적인 마음을 품게 되고, 대척점에 있는 감정형인 사람에게 이질감을 느끼는 식이다.  


 그 이질감이 때로는 상대를 배제하는 배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종종 'MBTI 중 어떤 유형은 나와 맞지 않아 유형은 미리 거른다'라고 말하는 댓글이나 게시물이 눈에 띈다. 자기 이해와 타인 이해의 도구로 쓰이던 성격 검사가 나와 다른 유형을 가진 사람을 '거르는’ 도구로 쓰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그 집단 구성원의 틀로만 보려는 경향이 편견이나 차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화제가 되었던 한 카페의 채용 공고문이 그 극단적 예다.


직원 자격에 mbti 유형 안내를 넣어 화제가 되었던 한 카페의 구직 공고문 



 

MBTI로 지원 자격을 까다롭게 제한하는 이 구직 안내문은, 재미로 하던 성격 검사가 재미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배제로 이어지는 지점을 보여준다.  특정 집단의 틀에 사람을 집어넣다 보면, 뇌는 효율적으로 움직이겠지만 개인에 대한 이해나 관용은 멀리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MBTI 검사의 대세 등극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상대를 빠르게 분류하고 판단해야 하는 환경 속에 진화해 왔으니까. 그러나 인지적 게으름을 끊임없이 고집하고 자기 합리화하는 건 다른 문제다. 내 생각의 틀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안길 수 있으니. 


 어쩌면 16가지 성격 틀을 파악하는 것보다 다른 명제를 되새기는 게 먼저일지 모른다. 우리의 뇌는 게으름을 추구하고 때로는 실수를 저지른다는 사실. 내 실수와 게으름을 인정해야 비로소 열리는 시야와 관점이 존재하니까. 




최근에 마감도 있고, 어제 저녁 학교 강연을 다녀와서 오늘 새벽에 정말 급하게 글을 썼습니다. ㅠㅠ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 버스에서 이 글을 수정하다가, 버튼이 잘못 눌려서 미완성된 글을 한 번 발행했었어요. (잘못 올린 것이니 바로, 급하게 삭제를 했습니다) 제 스마트폰 액정과 기능이 요즘 맛이 간(?) 상태여서 벌어진 일이랍니다. ㅠㅠ  혹시 찾아와 읽어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혼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ㅠㅠ 


이렇게 글 발행에 실수를 하고, 원고 마감도 밀려 있고, 출근도 해야 하고, 똥줄도 타고 그런 날이면 '글 쓰는 거고 뭐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어디로 도망을 가고 싶다'는 마음도 들긴 하지만 그래도 도망은 가지 않는 게 저의 신조니까, 글 발행을 먼저 해봅니다. 


다음 글은 5월 9일(목)에 올리려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읽어주시는 분들, 여유롭고 즐거운 연휴 보내시길요!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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