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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Apr 25. 2024

'좋아요'의 시대, 우리는 왜 외로워질까

SNS 속 인간관계는 현실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을까

한 편집자를 만났을 때의 얘기다. SNS가 대화의 소재가 됐다. 최근 인스타그램 하는 출판인이 제법 많아 보인단 내 말에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SNS에서 '출판계'란 말을 쓰는데, 그 출판계의 중심에 대체 누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닌 건 확실하다.’ 솔직한 고백도 이어졌다. SNS을 들여다보면 1인 출판사를 성공적으로 꾸리거나, 탄탄한 인맥을 쌓는 편집자들이 눈에 띄어서, 이따금 소외감이 찾아온단 얘기였다.


 나 역시 SNS를 보며 소외감과 질투심에 불타올랐던 시기가 있었다. 인스타그램 속 누군가가 모임을 하거나 다정한 사람을 만나 방긋 웃는 사진이 눈에 띄면 말 못 할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나는 이렇게 외로운데, 세상 사람들은 전부 자유롭게  모임을 하고,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는구나. 다들 만날 친구가 저토록 많은 건가. 돌이켜보면 외로움이 폭발할 때였다. 9개월째 아이를 혼자 보며(남편이 아직 해외에 있을 때였다) 글만 주양장천 쓰던 시기였다. 성인과 대화하는 시간이 하루 20분 이내였다.


 아이러니한 사실도 있었다. 당시 가상공간 속 나외로움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간이었다. 브런치와 인스타그램을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게시물을 올리던 때였다. 팔로워도 한창 늘고 있었다. 이웃들과 ‘좋아요’와 다정한 댓글을 수도 없이 주고받았고. 외롭다는 말을 하니 누군가는 내게 되물었다. 글에 달리는 '좋아요'와 댓글 보면 사랑받고 인정받는단 느낌을 충분히 받을 텐데, 너무 많이 가져서 배부른 소리 하는 거 아닌가요.

 

 이따금 나도 스스로에게 되묻곤 했다. 눈앞에 진수성찬이 펼쳐진 상태에서, 밥 한 술 못 느낌에 시달리는 건 무엇 때문일까. 가상공간에서 행복하게 웃고 떠드는 인간인 내가 왜 현실 속 외로움에 떨고 있는지.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초연결시대를 산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스마트폰을 보면서 365일 24시간 누군가와 연결되는 세상. 이제 관계 맺기에 있어 물리적 거리는 큰 장벽이 되지 않는다. 어딘가로 이동하면서도 누군가와 얘길 주고받을 수 있으니까. 직접 만나본 적 없는 타인과 말을 주고받는 것 역시 SNS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 가상공간에서 상호작용을 나누다 보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찾아올 때도 있다. ‘좋아요’나 댓글 칭찬을 받으면 사랑받고 인정받는다는 충족감도 한 번씩 찾아온다.


 

그러나 ‘좋아요’의 세상이, 현실 속 관계 맺기의 완벽한 대체물이 될 수 있을까.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실 같은 가상공간 속 관계 맺기니까.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미지’를 통해 디지털 세상에서 펼쳐지는 변화를 예견한 바 있다. 디지털 매체가 등장하면서 원본과 크게 관련이 없는 이미지, 때로는 원본 없는 이미지가 곳곳에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가령 만화 속 미키마우스는 실재하는 쥐와는 큰 관계가 없다. 코카콜라 광고에 등장해 콜라를 마시는 귀엽고 순해 보이는 흰 곰도 현실 속 북극곰과는 다른 존재다. 


 최근에는 통신망을 떠돌아다니는 ‘이미지’가 더 널리 알려지는 일도 흔하다. 현실 속 쥐보다 미키마우스가, 현실의 북극곰보다 코카콜라 광고 속 흰 곰이 대중에게 익숙한 이미지니까. 디지털 시대가 오면서 진짜 같은 가상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가 중요한 것이 되었다. 디지털 세상 속 사람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실제 성격이나 성향, 하는 일의 의미나 가치보다 그 사람의 이미지가 우선순위가 된다. 세련되거나 근사해 보이거나 선해 보이는 이미지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사람 간 관계 맺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SNS 상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좋아요'와 다정한 댓글이 깊이 있는 관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엔 이 모든 것이 ‘관계 맺는 느낌'주고받기만 하는 피상적인 연결에 그친다. 가상공간 속 관계 맺기는 엄밀히 말해 상대를 마주하고, 눈빛을 주고받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완벽히 대체할 수 없으니까.  



  가상공간에 열중하면서 현실 속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퍼빙(Phubbing)이라는 말이 있다. Phone(전화기)과 Snubbing(냉대, 무시하다)의 합성어로, 실재하는 상대방을 앞에 두고도 스마트 폰에 집중하는 행위를 말한다. 상상해 보면 익숙한 장면이다. 가족이나 친구나 오래된 연인을 코앞에 두고도, 네모나고 작은 세계를 펼쳐드는 모습은 이제 흔한 풍경이 되었으니까.


  덕분에 눈앞에 존재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가 쓴 『고립의 시대』에는 퍼빙이 인간관계 만족도 저하와 관련 있다는 연구 결과가 등장한다. 미국 워싱턴의 한 카페에서 커플 단위로 담소를 나누는 100쌍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질문을 던져 봤다. 답변자 대다수가 스마트폰을 탁자에 올려두거나 한 손에 들고 있기만 해도 서로 간에 덜 가깝고 덜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단순히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소외되고 뒤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SNS를 지속하는, FOMO(Fear of Missing Out, 포모) 증후군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나만 뒤처질까 두려운 마음에 SNS에서 유행하는 장소나 음식 사진을 찍어 올리거나 습관적으로 SNS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나를 빼고 모두가 친구인, 세상에서 혼자만 친구가 없는 것 같은 두려움 ‘빔프(BOMP·A Belief that Others are More Popular) 증후군’에 시달리는 경우도 생긴다. 남들이 더 인기 있다는 믿음 속에서 ‘내가 소외되었다’는 느낌에 시달리는 것이다.



 초연결시대에 우리는 세밀하고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실 속 관계보다 가상공간 속 느슨한 관계에서 더 큰 응원과 격려와 지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관계의 충족감을 전부 채울 수는 없다. 누군가를 마주하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웃음과 눈물을 주고 받는 세계는 '좋아요'만으로는 대체 불가능하니까. '진짜 같은 가짜'는 결국 진짜는 아니니까.



-참고문헌-

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 웅진지식하우스, 2021

박정자, <시뮬크르의 시대>, 기파랑, 2019

노명우, <노명우의 한 줄 사회학>, EBS BOOKS, 2021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가상공간 속 인간관계에 대한 글을 올려보았습니다. 제 경우 최근에는 복직도 했고 원고도 틈틈이 써야 해서 예전보다는 SNS를 자주 하지 못해요.  브런치나 인스타그램에서 이웃분들과 마음껏 상호작용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많이 줄었고요. ((급하게 음식 먹어치우듯 허겁지겁 일상을 보내고 있긴 합니다)


그럼에도 이따금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SNS에서 사람들이 서로 안부를 주고 받는 세계에서 나만 뒤처지는 것 아닐까’란 두려운 마음이 종종 찾아오긴 합니다.  저 역시 현실 공간과 가상공간 사이에서 휘청거리면서 중심을 잡고 있는 입장이고요. 한편으로는 인터넷 공간에서 이웃분들이나 구독자분들과 관계를 맺으며 큰 힘을 얻은 적도 많아서, 이 글을 쓰는데 '대체 뭐가 맞는 걸까' 혼란이 오더라고요.


 잡담이 길었지만, 어쨌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는 5월 2일(목)에 글을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에(4월 말까지) 원고 마감이 있어서 다음 주에는 간략한 글을 올리거나 이미 출간한 책에 실었던 소재의 글을 조금 편집해서 발행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마음 편안한, 좋은 하루 보내시길 빌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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