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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Apr 11. 2024

스타벅스에 가면 일이 잘 되는 이유  

'다정한 무관심'이 필요한 순간   

  요구한 적 없는 조언을 듣는 순간. 한결같이 머리가 아득해지는 때다. 몸무게가 늘어난 시기에  ‘너 요즘 심각해. 다이어트가 필요한 외모인데’식의 충고를 동료에게 듣는다거나, 애인 없던 시절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니 이런 방식으로 이성친구를 구하라’는 방법론을 지인에게 들을 때 그랬다.      


 선을 넘나드는 질문에도 머뭇대곤 했다. 내 수입이나 남편의 연봉으로 찍히는 숫자, 우리 집의 주거 형태(예컨대 자가냐 전세냐의 질문)를 물어오는 상대가 있었다. 내가 먼저 정보를 꺼낸 경우야 상관 없었다. 어느 정도 친해진 관계여도 뭐 그래,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인이 다짜고짜 개인정보를 캐물으면, 그 기습 공격에 우물거리곤 했다. 타인의 개인정보를 캐내거나 필요 이상의 조언을 건네는 게, 사람 사이의 정(情)을 나누는 행위며, 온기를 건네는 일이며, 친밀감 쌓기인 건가. 가끔은 의문이 떠돌았다.       

  


 



 해외살이를 오랫동안 버티지 못한 이유 중에도 그 ‘거리감’이 있었다. 내가 살던 해외에서, 한국인들이 모인 사회는 넓지 않았다. 좁은 세상에서는 만인의 생활 정보가 곳곳에 떠돌게 마련이다. 누가 어디로 이사했다는 소식, 어떤 집 아이에게는 사춘기가 왔다는 얘기, 누구는 어디에서 김장을 했으며 누구는 어디에 투자했다는 정보. 타인의 이야기가 밀물처럼 밀려오곤 했다.   


  타인의 생활 정보를 모아 실용적인 지식을 빚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단순한 오지랖이 아니라, 진심으로 누군가와 온기를 주고받는 따스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이 TMI의 파도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무엇보다 좁은 거리감에 지쳤다. 모두가 지나칠 만큼 가깝다는 것. 서로의 관심과 시선이 서로에게 향해 있다는 것. 모두가 함께 깃발을 꽂고 공유지 위에 서 있는 느낌. 거리감은 내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 거리감과 감각이 버거울 때면 홀로 동네 스타벅스나 커피빈으로 향했다. 날 모르는 타인이 가득한 공간에 앉아, 노트북을 마주하면 묘한 위안이 찾아왔다. 낯선 타인 속에서 숨 쉬는 느낌. 적절한 농도의 외로움이 찾아오면, 비로소 안도했다.






 인간관계에 상대에 대한 관심을 긍정적인 것으로, 무관심은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이분법이 있다. 그러나 무관심이 냉담함과 매정함의 발현이기만 한 걸까. 적절한 무관심도 때때로 다정함과 예의가 된다.  

    

 도시의 삶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홀로 지하철을 탔다고 생각해 보자. 스타벅스에 혼자 앉아 작업을 하는 장면을 떠올려봐도 좋다. 문득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당신을 빤히 응시한다. 당황스러울 것이다. 차라리 스마트폰을 바라보거나, 아래로 시선을 향하는 상대의 무관심이 고맙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멜은  '대도시적 무관심'이라 말한 바 있다. 대도시는 내적·외적 자극으로 북적이는 곳이다. 길을 돌아다닐 때면 수많은 사람과 부딪히고 만난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만 해도 수십 명이다. 수많은 타인에게 신경을 분산하고 깊은 정서적 관계를 맺다가는 모두가 금세 지쳐버리고 말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좌석 차> (1965). 호퍼의 작품들은 쓸쓸하게 느껴지는 한편 감상자에게 묘한 위안을 건넨다. 현대인에게 익숙한, 대도시적 무관심을 표현했기 때문 아닐까.

 

이렇게 외부 환경의 변화나 자극으로 휘청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도시인들은 적당한 무관심을 장착한다. 지하철이나 횡단보도 앞에서 건너편에 있는 상대를 빤히 쳐다보지 않고 핸드폰을 응시하는 게 그 예다. 무관심은 대도시의 자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방어기제에서 발현된 행위다. 동시에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상대를 적절히 배려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적절한 무관심 속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스타벅스나 커피빈 같은 커피숍이다. 커피숍에서 옆 자리 사람들이 나누는 내밀한 대화가 들려도, 상대의 작업이 무언지 궁금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심한 태도를 유지한다. 집안에 홀로 있거나 독서실에 앉아 있는 것에 비해서는 폐쇄적이거나 적막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적당히 개방되어 있지만 사적인 개인 공간을 지킬 수 있는 커피숍에 가서 작업을 한다. (물론 카페에서 공부나 작업을 한다는 이유로 주변에 결례와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논외로 치겠다. )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자신의 저서 『공공장소에서의 행동』에서 제시한 시민적 무관심, 예의 바른 무관심(Civil inattention)도 비슷한 맥락의 얘기다. 시민적 무관심은 공공장소에서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 상대를 응시하는 것도 아니고, 외면하는 것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디쯤에 해당하는 시선 처리를 일컫는다.


 공공장소에서 모르는 상대를 뻔히 응시하는 건 명백한 결례다. 아예 보지 않고 무시한 것도 결례에 해당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에게 눈길을 한 번 정도 주되, 재빨리 그 눈길을 거두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시선 처리를 한다.

    

 최근에는 인터넷상에서 ‘예의 바른 무관심’ 필요하단 얘기도 나온다. 인터넷 공간에는 연예인이나 셀러브리티의 개인 정보가 끊임없이 올라온다. 유명인들의 SNS 댓글창에는 살을 빼서 자기 관리를 좀 하라거나, 이런저런 이성을 만나라는 등의 조언난무한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것이 그들의 업(業)이고 의무이며, 그걸 통해 돈을 버는 것이니 감내해야 한다는 논리도 떠돌아다닌다.


 연예 기사를 들락날락하며 시간을 보내는 나 역시 마냥 당당한 입장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조언은 전혀 날리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의문이 솟는다. 자신의 정보를 무한정 노출하고, 과도한 조언이나 비난을 듣는  유명인의 업(業)인 건가. 무분별한 비난과 오지랖 감내하기’가 화폐 가치로 환원 가능한 건가. 적절한 관심과 무관심의 배율을, 대중도 고민해야 할 때 아닌가.

 







상대를 향한 관심과 무관심의 적절한 조합은 뭘까. 여전히 명확한 답을 모르겠다.  


답 모를 문제가 머릿속에 한 가득이지만, 홀로 커피숍에 들르는 습관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좁은 거리감에 지칠 때도 가지만, 극도로 외로울 때도 커피숍에 들른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며 안도한다. 적당한 무관심을 장착한 채로.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상태로.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인간관계에서의 거리감에 대한 글을 써봤습니다. 사람 사이의 적절한 거리감 유지가 쉽지 않은 과제란 생각을 자주 해요.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외로움에 치를 떨 때(!)는 ‘누구라도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도는데, 사람에 치인다고 느낄 때는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게 됩니다.  상대에 대한 관심과 무관심을 적절히 배율하고, 사람 사이의 적절한 거리감을 조절하는 게 평생의 숙제이지 않을까? 자주 생각합니다.          


 그리고 죄송한 말씀을 드리게 되었어요. 다음 주 목요일에 줌으로 하는 강연이 있어서(교사분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입니다) 정신머리가 없을 게 예상되어 글을 발행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다음 주인 4월 25일(목)에 <책 쓰는 마음>이나 <다정한 교양> 브런치북에 연재글을 발행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드립니다.  (다음 주에 글을 발행하지 못해 죄송하단 말씀도 다시 한번 드려요)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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