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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Oct 03. 2020

곧 불혹(不惑)이 된다는데,  나는 여전히 매일 혹한다

내가 그렇게까지 훌륭해져야 할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

불혹이 코앞이지만 나는 매일 혹한다


어릴 적 나는 소문난 까탈쟁이에 울보였다.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울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먹는 음식이나 잠자리가 살짝 바뀌어도 울어대는 예민한 성격이었다. 나로 인해 엄마가 난처한 상황에 자주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죽하면 외할머니가 나를 집 앞 개천에 버리라고 반농담으로 말씀하셨을 정도였으니 보통 성격은 아니었던 듯하다.


 툭하면 울던 내 성격을 바꾸어놓은 것은 우습게도 '위인전'이었다.


  우리집에는 위인전 전집 세트가 한 질 있었다. 나는 매일 그 전집 세트를 읽었다. 책에는 이순신이나 에디슨, 헬렌켈러나 신사임당, 퀴리부인의 위대한 삶이 담겨 있었다. 위인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삶의 장벽을 이겨내고 위대한 삶을 일군 사람들이었다. 의지가 높고, 어떤 일에도 초연하고 의연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나같은 울보는 닿기가 힘든 인물들이었다. 나도 마음을 갈고 닦고, 끊임없이 공부해서 저런 훌륭한 사람들이 언젠가 될거야. 어린 울보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작은 일에도 툭하면 울던 성격을 점차 무디어지도록 단련시켰다. 초연하고 꿋꿋한 이미지가 나의 지향점이었기에 예민하거나 유난스러운 아이라는 평판은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감정기복이 크거나 욕심이 많은 성격도 고치고 싶었다. 나의 욕심이나 야망(?)이 타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잘 숨겨두었다. 취향이나 호불호를 크게 나타내는 일도 삼갔다. 욕심이 없고 의연한 이미지를 보여야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성격에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면이 있다면 그것을 갈고 닦아 반짝 반짝 윤이 나는 조약돌처럼 만들고 싶었다. 조화롭고 균형잡힌 인간이 되고 싶었다. 


 마음 속으로 부단히 노력했다. 남에게 질투가 나면 '그런 생각을 하면 안돼. 너는 능력도 없는데 왜 그렇게 유치하기까지 하니?'라며 스스로를 다그쳤고, 욕심이 많은 나를 발견하게 되면 '너는 그 욕심많은 게 문제야' 생각했다. 울고 싶어지면 이 정도 일에 우는 허약한 내가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고, 소심한 모습을  발견할 때면 대범하지 못한 나를 탓했다. '나'라는 사람의 장르를 되도록 위인전이나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종류의 인간형으로 바꾸고 싶었기에 머릿속 자기검열은 멈추지 않았다. 


 그토록 노력한 결과는 어떠할까. 내년에 마흔이 된다. <논어>에서 마흔을 불혹이라 칭한다. 불혹,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고 세상의 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뜻이다. 예전의 나는 마흔쯤 되면 왠만한 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썩 의연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마흔 살이라면 사회 경험도 어느 정도 쌓았을 것이고,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상태라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 나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열등감이나 세상의 욕망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벗어난 모습일 것이라 막연한 이상형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흔 살쯤의 나는 위인전에서 그리던 그 위인들과 비슷한, 조화롭고 균형잡힌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라 스스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웬걸. 마흔 살, 불혹이 코앞이지만 나는 매일 혹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아파트 가격이나 남들의 연봉같은 숫자에 매일 혹한다. 욕심과 열등감도 여전하다. 드라마 남주인공과 아이돌 가수들에 매일 마음이 빠져든다. 남편의 말에 화내고 아이에게도 때때로 욱한다. 감정은 매일 파도가 친다. 꿋꿋하기는 커녕 웬만한 삶의 장벽이 생기면 매일 울고 지고, 좌절한다. 이기적인 마음이나 사고방식이 딱히 이타적으로 바뀐 적도 없다.  


 마흔이 되어도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내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논어>가 쓰일 때에 비해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마흔이 젊고 혈기왕성한 나이가 되어서 그럴까? 나는 점차 그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아내다, <긴 목의 성모> 

  

<긴 목의 성모>(파르미자니노, 1534~1540)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모습을 그린 작품, <긴 목의 성모>라는 그림이다. 감상자들은 그림을 보는 순간, 제목의 의미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성모의 목이 백조처럼 길쭉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린 화가인 파르미자니노(본명은 Girolamo Francesco Maria Mazzola,1503~1540)는 성모를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 애썼다. 덕분에 성모의 목은 백조처럼 길쭉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목의 비례 뿐 아니라 성모의 손, 아기 예수의 인체 비례 역시 전반적으로 길어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성모의 포즈나 안겨 있는 아이의 모습도 안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파르미자니노가 인체비례나 안정된 구도를 몰랐거나 무관심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여진 형태를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작품 속 성모의 손이나 아기 예수의 신체가 길쭉하게 그려져 있다


 파르미자니노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미 르네상스 시기의 고전주의가 한바탕 예술계를 휩쓸고 간 이후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걸출한 인재들이 이미 엄청난 작품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양식을 본받아 이상적이고 완벽한 균형을 이룬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인체비례나 구도가 안정되고 균형잡혀 있었다. (라파엘로의 <성모자>와 파르미자니노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극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더 이상 미술이 목표로 할만한 지향점은 없어보였다.

 

<성모자> (라파엘로, 1505 ) 파르미자니노의 <긴 목의 성모>와 비교해보면 인체비례나 구도가 매우 안정적임을 알 수 있다.

 이 때 젊은 미술가 중 몇명이 완벽한 조화를 하던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포기하고 기발하고 새로운 착상을  택했다. 파르미자니노와 같이 인체를 위아래로 늘린 듯이 길쭉한 모양, 비뚤어진 원근법, 부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로 특이한 포즈나 현실과 동떨어진 색채 등을 특색으로 하는 미술 양식을 선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선보인 미술 양식을 마니에리즘(이탈리아어로 Manierismo)이라 부른다.


 마니에리즘은 시대적으로 르네상스 시기에서 바로크 시대 사이에 위치했던 예술양식으로, 그 탄생의 뒷편에는 시대적 배경도 있었다. 당시는 신대륙의 발견으로 상업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던 시기라 이탈리아의 부흥기는 막을 내리고 있었다. 유럽 전체는 종교전쟁으로 인해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비평가들은 당시의 불안정한 상황과 예술가들의 심리적 불안감이 마니에리즘 양식으로 표현되었다고 해석한다.


 마니에리즘 양식은 뒤이은 바로크 시대의 사람들에게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애초에 마니에리즘의 어원 자체가 '손'이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 'mano'에서 왔다고 한다. 창의성을 발휘하기보다 손재주를 부리는, 기교만 부각된 과장된 수법을 의미하는 사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인체비례나 구도가 굉장히 불안정하다는 점도 이러한 비판을 받는데 한 몫했다.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르네상스 미술 양식을 모방하는 듯 보이면서도 조화와 균형이 맞지 않는 마니에리즘 미술 양식이 다소 괴상해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선은 부정적 평가로 이어졌다. 후일 마니에리즘이라는 이름이 '관행을 유지하며 빠지는 권태로움', 현상을 유지하는 경향'을 뜻하는 '매너리즘(mannerism)'이라는 영어 단어로 이어지게 된 것 역시 이러한 부정적 평가와 관련이 있다.


마니에리즘은 왜곡된 형태를 그린 뻔하디 뻔한 예술 양식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파르미자니노의 그림을 다시 살펴 보자. 정통적인 화법을 피하고 싶어했던 화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성모의 길쭉한 목과 손가락, 포즈는 안정된 형태의 것이 아니더라도 특유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있다.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맞춘 아름다움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방식이 아님을 <긴 목의 성모>는 보여주고 있다.



울퉁불퉁하고 뾰족해도 돼, '나'라는 장르  


 마니에리즘은 균형잡힌 아름다움을 뽐내며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것이 아니다. 이전의 르네상스 시기에 그려진 작품에 비해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고 다소 비정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후대에 이르러 서양미술사의 큰 줄기가 되었다. 아니, 애초에 그 균형잡히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잣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보는 사람의 시각과 해석에 따라 충분히 의견이 갈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괴상하고 균형에 맞지 않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다. 낯설고 균형에 맞지 않은 것도 새로운 장르로 자리잡을 수 있다.


 나는 내가 동경했던 위인들의 생활방식과 태도, 그 조화롭고 균형 있는 것들이 어느 순간 나에게 의미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일단 위인들의 삶 역시 훌륭한 부분 위주로 편집된 것이었고 그렇게 조화롭고 균형잡힌 것만은 아니었다. 에디슨은 라이벌 테슬라에게 뻔뻔하게 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순신 장군도 아무리 인격적으로 성숙했을지라도 난중일기에 원균을 비난하는 내용은 남겼다. 신사임당이나 퀴리부인도 어쩌면 아이를 기르면서 몇번쯤 욱했을런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균형잡힌 인간이 되는데 관심이 있다기보다 '남들에게 훌륭해보이는 이미지'에 주력해왔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되도록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도 굳건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초연하고 꿋꿋한, 왠만한 일에도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했던 마음이 나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이다.  

  

마흔을 목전에 앞둔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내 장르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민하고 유난스럽고 툭하면 울던 그 아이도 '나'라는 장르의 일부분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욕심이 많은 점도 비뚤빼뚤한 사고 방식도 반드시 고쳐야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성격이 나쁜 것도 비정상적이거나 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 예민한 촉이, 비뚤빼뚤한 사고방식이 때로는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있음을 이제는 안다. 

 결정적으로 남들은 내가 훌륭하게 사는지 아닌지에 큰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는 편이지 남의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지는 않는다. 남에게 민폐만 끼치지 않는 정도에서 행동하면 충분했다. 끝도 없이 자기 검열을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내가 균형잡히고 성숙한 사고방식을 지닌 40대를 맞이 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렸다. 여든이 되어도 별로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그 때가 되어도 나는 여전히 혹할 것이다. 지금도 어떤 날은 내가 참 별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스스로의 마음과 정신상태가 울퉁불퉁하고 뾰족하다고 느껴지는 날도 있다. (사실 그런 날이 대다수다.) 그러나 울퉁불퉁하고 뾰족한 나라고 해서 반드시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듬을 필요는 없다. 조화롭고 균형 있는 인간형, 그런 것은 어차피 내 장르가 아니였다. 그 울퉁불퉁하고 뾰족한 그것이 '나'라는 장르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굳이 훌륭하지 않아도 돼. 훌륭할 필요 없어


 최근 들어 자주 되새기는 말이다.  나이 마흔, 불혹을 앞두었지만, 매일같이 혹하더라도 마음을 그냥 놓아두기로 했다. 울퉁불퉁하고 비뚤어지고 허약한 나라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내 장르를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성인군자나 위인이 될 필요는 없었다. 내가 훌륭하고 완벽해져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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