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지 않는 나의 사회적 가면이 부담스러울 때
밝고 명랑해보이는 얼굴. 현재는 세월의 흔적을 정면으로 맞았지만 스무살 무렵의 나는 그런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나는 자기 객관화의 화신이다) 순하고 착하게 생긴 얼굴이기도 했다. 길거리를 다니면 '도를 아십니까'무리가 표적으로 삼을만한 그런 상이었다. 이 얼굴 탓인지 대학에 입학하자 '밝고 명랑한 여학생 역할'이 나에게 주어졌다. 선배들의 말을 잘 따르고 적당히 털털하며 사람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는 그런 롤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마찬가지로 예전의 나 역시 비뚤어진 사고방식과 우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과방에서 선배들의 말에 까르르 웃다가도 가끔 이것은 가식이 아닌가 생각했다. 간혹 나의 밝은 이미지를 보고 관심을 표하는 남자가 있으면 내심 두려웠다. 내 우울한 성격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아마 도망갈거야. 속으로 자주 생각했다. 회피형 성격인 나는 결국 그 중 누구와도 사귀지 못했다. 내 얼굴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좀 더 화려하거나 인상이 세 보이는 얼굴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은 마음도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교사가 되자 세상은 나에게 다른 얼굴을 요구했다. 밝고 명랑한 여학생의 얼굴은 벗어던질 필요가 있었다. 사랑으로 충만하고, 이해심이 풍부하며 적당히 어른스럽고 도덕적 기준이 높은 사람.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이 원하는 교사의 얼굴은 그런 것이었다. 개인주의자였던 나는 그 이전까지 누구에게도 인생의 조언을 날려본 적도 없었고 지적도 해본 적이 없으며,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러나 이제는 좋든 싫든 남의 삶에 개입해야 했다. 학생들이 잘하면 칭찬하고, 잘못하면 충고를 해야 했으며, 조언을 필요로 하면 조언도 해주어야 했다. 그 중 어느 것도 나의 특기가 아니었다. 모든 직장인이 그렇듯 유능한 직장인 코스프레도 어느 정도는 필요했다. 이것 역시 초임교사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초기에는 출근길마다 교사 모드로 내 얼굴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 버거웠다. 내가 아닌 어른스럽고 도덕적인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만 될 것 같았다. 심지어 나와 비슷한 시기에 교사가 되었지만, 교사 역할이 천성적으로 잘 맞아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열등감과 자책감이 더해졌다. 수업 시간은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점심시간이나 체육대회처럼 아이들과 소통이 필요한 시간에는 어색한 말을 날리기 일쑤였다. 자연스러운 나와 '교사'라는 역할 사이의 간극이 무척 크게 느껴졌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고 10년 정도 경력을 쌓으니 그나마 덜 어색한 정도까지는 이르렀다.
결혼 후에 해외살이를 하게 되자, 이번에는 남편을 따라 해외에 온 '아내'와 한 아이의 '엄마'의 역할이 나에게 주어졌다. 이를테면 남편의 손님이 들이닥쳤을 때 척척 새로운 요리를 내오거나, 충실히 육아를 수행하는 엄마의 얼굴이 필요했다. 예상대로 나는 그 모든 일에 서툴렀다. 차라리 '유능한 직장인 코스프레'가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당황스럽고 난감한 시기의 연속이었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면 대체로 나는 내 사회적 얼굴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얼굴들이 나의 자아정체성에 심하게 어긋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진짜 얼굴이나 자아 정체성이 무엇인지 잘 알았던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 나의 얼굴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속의 인간관계에서 보여지는 내 얼굴이 때로는 가식이라 생각했었다.
위 작품은 오스트리아 화가 요하네스 검프(Johannes Gumpp. 1626~1728)의 <거울 앞의 자화상>이라는 그림이다. 작품 속 화가는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그의 앞에는 캔버스와 거울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화가가 자화상을 그리는 순서를 머릿 속으로 상상해보면 재미있다. 우선 화가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볼 것이다. (그림의 거울 속 화가의 시선을 살펴보면 현재가 이 '관찰 단계'임을 알 수 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 다음, 이번에는 시선을 캔버스로 돌린다. 잠시 전에 거울 속으로 비추어본 얼굴을 기억하며, 최대한 거울 속 모습과 비슷한 자신의 얼굴을 그려내는 과정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보고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거울 속에 담긴 자신의 얼굴을 머릿 속에 담은 다음, 이를 화폭에 담아내는 것이다. 즉 그림 속에는 3개의 서로 다른 얼굴이 존재한다. 그의 진짜 얼굴, 거울 속에 비친 얼굴, 화폭에 담긴 얼굴. 한 작품 안에 담긴 화가의 여러가지 얼굴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지게 되는 여러 가지 얼굴, 페르소나를 떠오르게 한다.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은 타인에게 보이는 개인의 외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개인의 사회적 역할이나, 배우에 의해 연기되는 등장인물을 뜻하기도 한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가면극에서 유래되었다. 당시에는 연극에서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며 배우들이 극을 연기했다. 이후 이 말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개인이 쓰는 가면을 의미하게 되었다. 개인을 뜻하는 영어 단어 person 역시 페르소나에서 비롯된 말이다.
페르소나라는 말을 분석심리학에서 쓰기 시작한 이는 정신의학자이자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프 융이었다. 융은 페르소나가 어릴 때부터의 가정교육이나 사회교육으로 형성되고 강화된다고 말하였다. 페르소나는 주위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가며 만들어지기 때문에 개인이 사회생활을 원만히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가령 교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할 때 나의 냉소적인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었다면 나는 학생들에게 수많은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엄마나 아내로서의 모습이 필요할 때 교사로서의 자아를 매번 꺼내들었다면, 남편과 아이가 도망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썼다가 벗는 것은 삶의 기술 중 하나인 것이다.
검프의 작품을 다시 살펴 보자. 거울 속 그의 얼굴과 캔버스에 담긴 얼굴 중 어느 것이 화가의 실제 얼굴과 더 닮아 있을까? 아니, 닮아있을 수는 있으나 그 얼굴들은 결코 그의 진짜 얼굴이 아닐 것이다. 나의 실체를 완벽하게 담아내는 얼굴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어쩌면 작품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세기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우리의 사회적 역할을 연극에 비유하며 페르소나를 이야기했다. 사람들의 실제 사회생활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이루어진다. 연극 무대에 배우가 서듯 우리는 사회적 상황 아래에서 일정한 역할을 연기한다. 사람들과 접촉하며 자신의 설정, 외모, 태도를 바꾸면서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상을 바꾸거나 통제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직장에서의 나와 가정에서의 나는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무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프먼은 모든 상황에서 한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정체성이나 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인간에게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다양한 상황에서 역할 연기를 하는 다양한 모습의 조합된 성격이라는 것이다.
나는 명랑한 대학생, 교사, 아내, 엄마로서의 내 얼굴이 죄다 나의 자아와 어긋난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나의 본성에 더 잘 어울리는 가면이 존재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본성에 꼭 들어맞는 얼굴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부터인가 깨닫게 되었다. 나의 단일한 자아를 항상 찾아 헤맸지만 그런 것을 찾기는 어려웠다. 명랑한 여학생도 나였고, 교사도 나였으며 아내나 엄마로서의 나 역시 존재했다. 필요할 때마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벗으면서 나는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하고 인간관계를 맺어왔다. 그런 행동들이 가식이거나 내 자아를 배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회적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행위들이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상적인 페르소나를 머릿 속에 담아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으나 내 머릿 속에는 완벽한 교사상, 완벽한 엄마상, 완벽한 아내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들어맞지 않는 스스로를 탓하고는 했다. 교사로서의 나는 학생들과의 소통이 부족하고, 엄마로서의 나는 지나치게 무뚝뚝하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아이들과 소통은 서툴러도 수업준비는 늘 열심히 하는 편이었고, 무심한 엄마지만 아이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배우들의 역할 연기에도 개성이 있듯이 나 역시도 역할을 수행할 때 나름대로 개성있는 연기를 한 셈이다. 개성있는 연기면 충분했다. '완벽하고 훌륭한 나'는 어차피 될 수도 없었고, 될 필요도 없었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한번 써보는 것이 늘 손해는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쓰게 되면서 나에게 어울리고, 내 본성에 가까운 가면은 무엇일까 고민해보게 된 것이다. 중동에 와서 어쩌면 나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통해 나에게 어울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나는 생각보다 '자유'로운 것을 좋아했고, 소주와 돼지고기를 좋아했으며 긴 치마보다는 짧은 치마가 더 잘 어울렸다(나는 단신이라 짧은 치마가 더 어울리는데 이 나라에서는 짧은 치마나 반바지는 금기사항이라 못입는다).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쓰면서 나의 본성이나 취향에 대해 많이 알게 된 셈이다.
가끔은 어울리지 않는 사회적 가면이 나를 짓눌러 숨쉴 틈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이 때는 색다른 페르소나를 찾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2020년에 이미 멀티 페르소나가 중요한 트렌드 용어로 등극했다. 최근에는 온라인이나 동호회 활동을 통해 본캐와 구분되는 부캐 활동을 통해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직장에 다닐 때 나 역시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내 본캐의 무게를 잠시 잊고 부캐로 살아갈 수 있었다. 어찌보면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활동하는 내가 숨쉴틈과 쾌감을 주는 멀티 페르소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온라인 공간에서의 내 얼굴이 딱히 나의 실제 모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곳에서의 나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아는 체하지만 실제의 나는 그런 모습과는 딴 판이다. -SNS 중독에 빠지면 '원래의 자신'과 'SNS 속 나'를 하나로 착각하며 생기는 멀티 페르소나의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도 사회적 가면과는 구분되는, 다른 나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현실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 역시 현실 속 인간관계와는 다른 새로운 바람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어울리지 않는 페르소나가 나를 짓누르고 부담스러운 사회적 역할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페르소나 때문에 '훌륭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는 경우도 존재한다. 당신은 굳이 완벽한 가면을 뒤집어쓸 필요가 없다. 늘 훌륭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가면의 무게가 무겁다면 가면을 벗고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나를 가면에 꼭 맞출 필요도 없다. 내 얼굴에 맞게 가면을 고치는 방법도 있다.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아예 내다버릴 자유도 있다. 세상과 타인의 부당한 요구가 빗발치더라도, 당신은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가면을 찾아나갈 기회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