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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Aug 04. 2020

'자학'보다 '자뻑'이 필요한 순간

불행한 겸손주의자보다 행복한 나르키소스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겸손함이 자기 비하가 될 때


어릴 때 나는 학교에서 받은 성적표나 상장을 엄마에게 잘 보여주지 않는 아이였다. 성적이 형편없어 혼날까 봐 숨긴 것은 아니었다. 웬만큼 자랑할 거리가 아니면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글짓기 상장도 제법 큰 대회에서 받아야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뒤늦게 성적표나 상장을 발견하고는 나를 별난 구석이 있는 애라 생각했던 것 같다. 성취에 연연하지 않는 특이한 아이라고 여겼던 듯도 싶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공적'으로 '크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되짚어보면 스스로에 대한 기대 수준이 상당히 높고 욕심도 많았다. 그 기준을 맞추기 위해 아등바등 지내려 노력한 결과, 인생에서 몇 번의 성과를 이룬 적도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높은 기대치는 동전의 양면처럼 열등감을 불러왔다. 당연하게도 나는 스스로 세운 높은 목표를 대부분 이루지 못했고, 이 때문에 괴로워했다.

-생각해보니 열등감은 나에 대한 과도한 기대치와 우월감에서 시작한다는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내가 이룬 성과가 소박하다 생각하면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만큼 멋지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나보다 높은 성과를 거둔 누군가가 있으면 질투심에 잠 못 들기도 여러 번이었다.


 이런 사고 과정의 종착점은 대체로 자기 비하였다. 내가 세운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스스로를 후려치고 탓했다. 여기에 겸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더해졌다. 겸손한 태도를 유지한 채 남들이 인정할만한 목표를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이것밖에 못하다니 너에게 실망이다."

"더 열심히 해야 돼.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해야 해"

 스스로에게 되뇌며 나를 몰아세우는데 마음을 썼다. 작은 성과에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자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멋지다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더 큰 성취를 이루어야 비로소 드러내 놓고 세상에 잘난 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눈에 띄는 목표를 이루기를 열망했고, 덕분에 행복하지 못했다.



자기애의 대명사가 되다,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Narcissus)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양치기 소년이었다. 어느 날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에 반한 요정은 무관심한 그의 태도에 화가 나 질투의 여신에게 간청을 했다.  


"나르키소스가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동시에 그 사랑에서 즉시 깨어지도록 해주세요."


이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르키소스는 샘에 들렀다 물속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대상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보았지만 당연히 닿지 못했다. 사랑에 빠진 소년은 결국 지쳐서 샘에 빠져 죽고 만다. 그가 죽은 자리에는 수선화(꽃말이 자기 사랑, 신비, 자존심으로 나르키소스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가 피어났다.

나르키소스(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1597~1599)                     @ 출처: 위키피디아  

 

 위의 작품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1610)의 <나르키소스>라는 그림이다. 카라바조는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 순간의 나르키소스를 그렸다. 그림에는 다른 배경이나 등장인물이 없다. 스포트라이트는 오로지 나르키소스에게 향하고 있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한껏 숙인 자세와 그 밑에 맨살이 드러난 무릎이 눈길을 끈다. 반쯤 벌린 입과 눈 홀린 듯 헤어나오지 못하는 시선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정을 보여준다. 물속에 비친 어두운 모습이 곧 다가올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사랑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도 모르고 죽음을 앞둔 나르키소스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지는 그림이다.  


 자신과 사랑에 빠졌던 나르키소스는 자기애(Narcissism)를 의미하는 용어로 정신분석학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이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생각에 빠져 자기 자신에게만 에너지가 향하는 사람,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이들을 나르시스트라고 부른다.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강해 다른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우에도 심각한 나르시시즘의 한 증상으로 본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에 존재하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 탓에 우리는 나르키소스를 '자뻑'의 대명사로 여기게 되었다. 자기애의 부정적인 의미, 자기중심적인 어리석은 성향이 '나르키소스'라는 이름 안에 담기게 된 것이다.

 


행복한 나르키소스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우리 부부는 아들의 성취에 항상 칭찬을 곁들여 주었다. 뒤집기를 처음 했을 때는 '잘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로봇이나 퍼즐 조립을 다하면 '멋지다'며 박수를 쳐주었다. 아이는 칭찬 세례를 받으며 으쓱해했다. 아이에게 한껏 칭찬을 해주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아들에게는 똥만 잘 싸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 제대로 된 칭찬을 해준 적은 없었다. 더 열심히 겸손히 지내라고, 너는 아직 멀었다고 몰아세우기에 급급했다.


 한국 사회는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자뻑에 빠진 나르키소스는 한국 사회에서 사랑받기 어렵다. 무언가 아는 체하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나댄다'며 지적하기 바쁘다 유아기 때 부모에게 그토록 칭찬 세례를 받고 자신감 넘치던 아이들도 학교 생활을 거치고 나면 무엇을 이루어도 태연한 척, 대단하지 않은 척해야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조용해진다. 누군가 운을 띄워주기 전에 나에 대한 자랑을 먼저 늘어놓는 것은 금기사항에 가깝다. 특히 사회생활을 할 때는 적당한 겸손은 필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겸손의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은근하게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는 것은 사회생활의 중요한 기술이다.   


  '겸손함의 미덕'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을까. 의문이 생긴다. 물론 적당히 겸손한 태도는 아름답다. 나 역시 지나치게 잘난 척하거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겸손한 태도를 과도하게 요구하다 자기 비하와 열등감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태도는 진정한 겸손도 아니었다. 겸손을 가장한 자기 학대에 가까웠다. 나조차 나를 칭찬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공적인 성취에 끊임없이 목말라했다.


 자기 중심적인 성향으로 남들을 괴롭히거나 피해만 입히지 않는다면  '현대판 나르키소스'- 자기애성 인격장애자가 아닌 적당한 자기애 소유자를 이렇게 명명하고 싶다-도 나쁠 것은 없었는데, 왜 그리 스스로에게 엄격했을까. 자뻑에 빠진 사람, 눈치 없는 사람, 잘난 체 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사랑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기 칭찬에까지 인색해져 버렸다. 이른바 '관종의 시대'가 도래했는데도 말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로 나를 대하는 태도를 조금 바꾸었다.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자뻑'의 시간을 나름대로 가지기로 했다. 가지각색의 이유로 스스로를 칭찬해주기 시작했다.


 작년 한국 휴가를 갔을 때, 혼자 미술 전시회에 간 일이 있다. 아이를 낳고 6년 만에 처음으로 간 전시회였다. 서울시립미술관을 향하는 덕수궁 길을 걸으며 "나는 미술 감상을 즐기는 문화인이구만"이라는 자뻑에 잠시 빠졌다. 집에 돌아가 다시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전시회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기분은 좋았다.  

 한 달치 가계부를 빼곡히 정리하고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재테크로 돈을 수천만 원 번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가 '합리적인 경제인'이라는 생각에 뿌듯함이 밀려왔다. 아이가 방바닥에 흐트러놓은 아동용 퍼즐 100여 피스를 다 맞추고는 '역시 난 집중력이 좋다'며 속으로 칭찬해주기도 했다.

  

 가장 자주 자뻑에 빠지는 시간은 글을 쓰는 때다. 가끔 커피숍에 가서 노트북을 꺼내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들으며 글 쓰는 나의 모습에 괜히 어깨가 으쓱거린다(물론 지금은 코로나로 실행 불가능이다).

'글 쓰는 나, 지금 좀 멋진 것 같은데?'

 예전 같으면 이런 유치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곧바로 겸손 레이더를 작동시켜 '뭐해, 빨리 겸손해지지 않고! 그냥 노트북에 글 좀 쓰는 걸로 잘난 체를 하다니' 이런 식의 자기 검열 시간이 즉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저 멋진 나에 잠시 심취했다.


 불행한 겸손주의자보다 행복한 나르키소스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남들이 늘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나라도 '멋진 나'를 발굴하고 칭찬해주며 사는 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니 '자기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은 욕이 아닌 듯싶다. 가끔은 자뻑의 시간을 가져야 살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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