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직전 직장에 청첩장을 돌릴 때쯤이었다. 일하는 직장의 A 부장님이 긴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불렀다. 부장님이 꺼낸 이야기의 주제는 뜻밖에도 '요리'였다.
“태선생이 요리를 잘해야 돼. 그래야 남편이 기가 살아나서 바깥에 나가 사회생활도 잘할 수 있고, 부부간의 화목도 도모할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부터 요리를 잘 배워둬.”
부장님의 진지한 표정과 눈빛이 ‘이것은 너를 위해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야'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가고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아이를 낳은 후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참으로 여러 사람들에게서 셀 수 없이 많은 충고와 조언을 듣게 되었다. A 부장님의 조언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다양한 영역의 조언들이었다.
“애는 그렇게 기르면 안 돼. 너무 의존적이 되어서 자기가 나중에 힘들어져 ”
“자기, 머리 왜 잘랐어. 긴 머리가 더 어울리는데 다음부터는 길러라.”
“둘째 낳으면 훨씬 좋아져. 낳을 수 있을 때 빨리 낳아. 다 생각해서 하는 얘기야. 나중에 고생하지 말고”
나의 머리스타일부터 육아 방식, 둘째의 출산까지 걱정해주는 지인들의 조언 폭탄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들 역시 A 부장님과 마찬가지로 나를 진심으로 위한다는 표정과 눈빛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째서 나를 위해 해 준다는 저 말들이 불편할까. 내가 조금 비뚤어진 것일까. 저것은 나를 위한 말일까 오지랖일까. 어떠한 결론도 머릿속에서 내리지 못한 채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만 있었다.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19세기 베를린의 한 잡지에 실린 프로크루스테스의 캐리커처(작자 미상) @출처: 위키미디어
도끼를 허리춤에 찬 한 사내가 침대를 향해 몸을 숙이고 있다. 침대에 눕혀져 있는 사람은 공포의 비명을 내지른다. 눕혀져 있는 사람의 키에 비해 침대가 지나치게 작아 보인다. 침대틀을 한참 넘어선 다리가 버둥거리고 있다. 도끼를 찬 사내는 침대에 눕혀 있는 이의 다리를 억지로 누르며 침대틀에 대어 보는 중이다. 그의 얼굴이나 표정을 알 수 없기에 공포가 가중된다. 그림의 위쪽에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는 '잡아늘리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거인 악당이었다. 그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 근처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강도짓을 했다. 그는 먼저 지나가는 나그네를 불러 쉬어 가라며 권유하여 자신의 쇠침대에 재운다. 그리고는 한밤중에 침대에서 잠이 든 여행객을 꽁꽁 묶어버린다. 피해자의 키가 침대보다 길면 발이나 다리를 그만큼을 잘라내고, 반대로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려서 죽였다. 어떤 사람도 키가 침대의 길이에 딱 들어맞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잡혀온 사람 모두가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의 악행을 멈춘 것은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였다. 테세우스는 크레타 섬의 미노타우로스(인간의 몸에 얼굴과 꼬리는 황소의 모습을 한 괴물)를 없애 명성을 얻었으며 후에 아테네의 왕이라는 위치에 오른 인물이다.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집에 묵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프로크루스테스가 사람들에게 했던 방법 그대로 그를 죽였다.
수많은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들이 그러하듯 프로크루스테스의 이야기 역시 갖가지 의미로 해석되었다.심리학에서는 자신의 기준이나 생각에 맞추어 타인의 생각을 바꾸려 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횡포와 아집, 독단 등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 부른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일정한 틀에 맞추어 개인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재단하는 국가 정책이나 사회의 분위기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비유하는 논객도 있다.
오지라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방법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자신의 기준대로 타인의 행동을 재단하고 통제하려는 사람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일명 오지랖을 부리는 오지라퍼들이다. 그들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기준으로 개인의 행동을 재어본 다음 조언을 날린다. A 부장님의 조언과 아이를 낳은 후 나에게 쏟아진 수많은 조언이 불편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나는 결혼한다고 해서 특별히 요리에 힘을 기울일 생각이 없었고, 머리를 기르는 것보다 자르는 것이 편했다. 둘째는 애초부터 낳을 생각이 없었으며 아이는 내 의지대로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오지라퍼들은 나의 선택과 행동방식이 옳은 방향이 아니라며 내 말을 따르라는 은근한 강요를 보내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오지랖이 대체로 친밀한 관계 아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애정이나 관심이라는 이름 아래 조언을 날린다. 때문에 이것이 애정 어린 조언인지 오지랖인지 혼란이 올 때가 있다. 심지어 오지라퍼들은 악의를 가진 나쁜 사람인 경우가 드물다. 나를 위한다는 선의에서 충고를 아끼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오지랖과 애정 어린 조언을 어떻게 구분할까? 간단하다. 내가 원하지 않는 순간에 원하지 않는 조언을 보내는 경우는 오지랖이다. 올바른 애정은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 내 삶의 방식에 대한 존중이 깔리지 않았다면 이것은 나에 대한 애정이 없거나, 나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어긋나 있다는 뜻이다. 내 방식을 존중하지 않는 충고를 수시로 날린다면 그것은 오지랖이 맞다. 때로는 자신의 판단기준이 옳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통제력을 과시하기 위해 오지랖을 부리는 이들도 있다.
오지라퍼는 분명 나쁜 이들은 아니다. 다만 자신과 타인의 경계선이 희미한 유형의 사람들일 뿐이다. 우리나라는 특히 개인주의 지수가 낮은 사회라 오지랖이 발동하기 쉽다. 개인주의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은, 각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행동의 자유와 고유의 영역이 존중되지 않고 나와 남의 경계가 불분명한 편임을 뜻한다.
'나=너=우리'라는 생각 아래 오지라퍼들은 타인의 영역을 쉽게 침범한다. 오지랖을 당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타인의 눈길이나 오지랖에 신경이 쓰여 자유로운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나와 타인이 같은 집단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같은 기준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은 타인의 자유와 행복을 깎아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지라퍼들은 보통 이 사실을 잘 모른다.
그래서 오지라퍼들에게는 '나'와 '그' 사이에 명백한 경계선이 있음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야박하게 들릴 수 있으나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한마디면 충분할 수 있다. 너와 나는 하나의 자아를 가진 것이 아니며 너의 기준이 나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지속적으로 알려 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공격을 시도해도 뚫기 힘든 성(城)이라 인식하면 굳이 그 성을 함락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성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린다. 오지라퍼들의 말에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네요"등의 말, 고개를 끄덕거리는 미지근한 동의는 당신을 함락 가능한 성으로 보이게 만든다. 애초부터 가벼운 동의도 보내지 않는 편이 낫다. (물론 상호작용이 중요한 인간관계에서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은 따로 있다.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을 이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자세다. 그들의 이야기를 되풀이하여 곱씹으며 '내 방식이 이상한 건가' '내가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인가'헷갈리는 순간, 오지라퍼들은 단숨에 내 삶의 영역을 함락한다.오지라퍼들은 언어라는 형태로 조언을 날릴 뿐, 조언에 뒤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가령 요리에 대해 조언한 A 부장님은 나에게 요리를 직접 가르쳐주거나 요리 학원비를 대주지 않는다. 둘째를 낳으라고 하는 사람들은 내가 낳을 둘째를 키워주지 않을 것이고, 헤어스타일에 대해 조언한 지인이 내 미용실 비용을 대주는 것도 아니다. 책임져주지 않을 사람들의 무책임한 발언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 내 삶의 방식이 맞다는 믿음이 때로는 필요하다.
원하지 않는 조언을 일삼는 이들을 멀리하자. 오지라퍼들은 오늘도 당신이 자신의 영향권 안에 들기를 원하며 한 마디를 던진다. 그 영향권 안에 들어가지 않고 한 발짝 물러나 있어야만 애정 어린 오지랖이 멈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