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랑선생 Oct 13. 2020

그들이 타인의 뒷담화를
일삼는 이유

그들의 인생이 핵노잼이라서요 

그들이 타인의 뒷담화를 하는 이유


 직장에 근무할 당시, 틈만 나면 친밀하게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세 명의 부장님이 있었다. 끝도 없이 나누는 이야기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옆자리에 앉아 있어 그 이야기를 들었던- 들을 수 밖에 없었던-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세 부장님이 나누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함께 근무하고 있는 직장 동료들의 뒷담화였다.      


 하루는 그 중 한명인 K부장님과 내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업무상 일처리 순서에 관련한 사안으로 부딪힌 일이 있었다. 심각한 갈등은 아니었으나 의견이 달랐다. 고집이 강한 분이었기에 약간의 실랑이가 오가다가 결국 내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 울기 직전이었다. K부장은 이야기했다. "어머,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내가 자기 울리기라도 한 것처럼. "     


 그 후 며칠간 나는 세 부장들 사이에서 대화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나는 그들 사이에서 "아이들 가르치기에는 심성이 유약한 사람" 정도의 판결을 받았다. 다행히 나를 둘러싼 뒷담화가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들의 뒷담화 대상은 쉽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금세 다른 사람의 뒷이야기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약간의 해프닝으로 일이 끝났지만 궁금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남의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 그 정도의 성의를 보이며 타인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흠집거리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외에서의 삶을 시작하고 나서 당시의 세 부장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 적이 있다. 당시의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이야기로 나눌 소재가 매우 부족했다. 육아, 살림에는 문외한이라 듣는 입장이 될 뿐,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내가 하는 이야기의 80% 정도는 주변인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00네가 이사 간 것 아세요. xx엄마는 운동을 시작했나 봐요, 류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좁은 교민 사회에서는 아는 사람들이 겹치게 마련이니 이런 대화는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남의 이야기는 그만하자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내가 알고 있는 지인의 비밀을 제3자로부터 듣게 된 일이었다. '사실 그 사람은 그런 비밀이 있대. '전혀 듣고 싶지 않은 종류의 비밀이었다. (TMI라는 말은 진심으로 이런 때 쓰는 말이었다.) 나 역시 비슷한 대화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움이 앞섰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하던 주변 이들의 일상 이야기 역시 이 좁은 사회에서 왜곡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00네가 이사 간 이야기는 비싼 집값에 돈 낭비하는 사람 이야기로, XX엄마는 운동을 시작했는데 왜 살이 안 빠지냐는 이야기로 변질될 가능성이 존재했다. 제3자에 대한 대화는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얼마든지 이상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나는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남의 이야기만 하는 내가 갑자기 속 빈 강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내 인생과 일상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새로운 일도, 재미있는 일도 없어 타인의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대화의 중심에는 내가 없었다. 

 이후 글을 쓰게 되고 집에 더 오랜 시간 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의 만남이 줄어들었다. 타인의 근황 토크를 할 기회도 시간도 대부분 사라졌다. 내 영역이 생기면서 타인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대화도 점차 끊기기 시작했다. 새로운 교훈을 하나 얻게 됐다.


내 인생이 핵노잼이면 남의 이야기만 주구장창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불행과 두려움이 만든 광기, <마녀사냥> 


<마녀 재판>(T.H. Matteson,1853)


 T.H. 매티슨(Tomkins Harrison Matteson, 1813~1883)의  <마녀재판>이라는 그림이다. 매티슨은 역사나 종교적인 테마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많이 남긴 미국의 화가다. 위 작품은 서구크리스트 사회에서 부끄러운 역사로 남은 마녀재판의 한 장면을 다루고 있다.      


 마녀는 중세 말기에 크리스트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는 이유로 처형된 존재들이었다. 당시 지배계층은 마녀 재판소를 마련하여 고발당한 사람이 마녀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처형을 결정하는 일을 맡겼다. 전 유럽으로 마녀사냥의 열풍이 불어 닥쳤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13세기에서 18세기에 걸친 마녀사냥으로 대체로 약 6만~10만 정도의 숫자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매티슨의 그림은 아수라장과 같은 마녀재판의 한 장면을 다루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림의 한 가운데 웃옷이 벗겨진 채 뒷모습을 보이는 여자다. 마녀로 고발 받아 재판을 받는 여성으로 보인다. 오른쪽 나이든 여성이 그녀의 등에 손가락질을 하며 재판관을 향해 무엇인가 설명하고 있다. 그녀가 마녀로 지목받은 여성에게서 찾고 있는 것은 마녀의 손톱자국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마녀의 등에 악마의 손톱자국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오라기를 걸치지 않은 여성의 몸에 무엇이든 상처나 흔적이 있으면 이것이 마녀의 손톱자국이라 주장하였다. 아마도 노파들은 젊은 여성이 마녀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람들은 마녀로 고발된 이의 몸에서 점이나 사마귀, 주근깨나 반점 등을 발견하면 이것이 모두 마녀의 손톱자국이라 간주했다.      

 

마녀로 고발당하는 사람들 중 마술을 부리거나 악마를 숭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보통 정치나 종교의 제도권에서 약간이라도 벗어나있는 사회적 약자들이 마녀로 몰리기 쉬웠다. 남편이 없는 과부나 50대 이상의 노인층, 여성 치료사나 산파 등이 마녀사냥의 주요한 대상이 되었다.      


 마녀사냥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원인은 사람들의 불행과 두려움에 있었다. 당시 유럽은 종교전쟁과 30년 전쟁, 좋지 않은 경제 상황, 페스트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농촌 사회가 두려움과 불행에 빠져 있었다. 부패한 가톨릭과 지배계층은 민중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 수많은 불행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싶어 했다.-인간은 항상 어떤 현상의 원인을 찾아야 안도하는 존재인가 보다- 마녀와 마법사라는 존재들을 만들어 불행의 원인으로 돌리고 이들을 처단함으로써 사회의 불만을 해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당시 지배 계층은 마법의 집회가 존재한다고 꾸며대며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였다. 평범한 사람들이 마녀가 되었다 손가락질 받으며 죽어간 사람들은 완전한 희생양들이었다. 매티슨의 그림 속 여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녀사냥은 불행과 두려움의 눈을 '마녀'라는 존재로 돌려 사람들의 안도시키는 잔인한 행위였다. 



자기 중심이 없을 때 우리가 빠지는 함정 


 마녀사냥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자신의 불행이나 괴로움, 권태와 외로움을 스스로에게 설명하거나 표현하기 힘들 때 어떤 행동 양식을 보여주는지 보여준다. 괴로움이나 권태에 빠진 사람들, 그중에서도 자기 중심이 없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자신의 외부로 눈을 돌린다. 여러모로 그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과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도 스스로의 불행과 두려움을 직면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다. 이 때 나의 내면이 아닌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뒷담화를 끊임없이 일삼는 사람들의 행동도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표적이 되는 것은 주로 타인의 행동이나 특성이다. 


 타인의 뒷담화를 일삼는 이들은 제3자의 작은 결점이나 단점을 지적하며 다른 사람들과 결속력과 연대감을 쌓고 친밀감을 쌓아간다. 내면의 외로움을 잠재우기 위한 행위다(그렇지만 이렇게 쌓은 친밀감은 '나 없으면 내 욕을 할까봐 마음대로 화장실도 못가는' 매우 부실한 것이라는 한계가 있다). 또한 남의 단점이나 불행, 비밀을 이야기함으로써 나의 불행과 권태, 슬픔 등을 잠시 잊을 수 있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타인을 잘못을 지적하며 나는 그렇지 않다는 순간적인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가령 사람들은 스스로가 게으르거나 형편없다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 깨닫고 있지만 이런 사실을 회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게으름과 형편없음을 지적하며 ‘나는 그렇지 않다’는 순간적인 안도감을 느낀다 (타인의 행동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악플러들의 심리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각 다른 이유로 보이나 결국 근본 원인은 같다. 불행하거나 심각하게 심심하거나, 괴롭지만 자기중심이 없는 그들의 내면에 있다. 뒷담화의 대상이 되는 희생양에 주요한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이 되었다고 자책을 한다거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안도하는 것이 무의미한 이유다. 어차피 그들의 불행과 권태와 두려움은, 또 다른 뒷담화의 대상을 찾기 때문이다.      

 

 뒷담화를 일삼는 사람들로 인해  나에 대한 오해나 루머가 일파만파로 퍼져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당연히 지적하고 정정해야 한다. 그러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오해를 완벽하게 풀려하거나 그들의 눈에 비친 내 이미지를 좋게 돌려보고 싶다는 기대감은 애초에 버리는 편이 낫다 . 근본적인 원인은 나의 잘못된 구석이나 그들의 오해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들의 불행하고 재미없는 삶을 바꾸기 전에는 뒷담화를 멈추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불어 뒷담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대화의 소재로 남의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의 이야기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 100% 도덕적인 인간이 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내가 남의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다면 불행하거나, 재미없거나 외로운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외부로부터 눈을 돌려 내가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을 먼저 궁금해 하는 것이 좋다. 내 이야기에 집중할 시점이다.      

이전 07화 인간관계를 망치는 최악의 착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