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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Sep 09. 2020

인생이 당신에게 어퍼컷을 날릴 때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묻는 일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인생의 어퍼컷을 연속으로 맞을 때   


며칠 전 아침, 아이는 깨어나자마자 심심하다며 엉엉 울었다. 6개월간 유치원에 가지 못하고 거의 매일을 집 안에서 버틴 아이다. 다음 학기도 온라인 개학이 확정되었다. 한낮에 40도가 넘는 이 나라의 땡볕 더위에 함부로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 답답하고 심심한 아이가 우는 일은 당연하게 느껴졌다.  

 

 우는 아이를 한참 달래는데, 그동안 나를 부여잡던 긍정의 끈 하나가 툭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의 나에게는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쓰기 위해 대략 5~6 시간 정도의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집필 중인 교양서 하나의 원고 마감이 이 달 말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저녁에 잠들고 나서 나에게 주어진 것은 3시간 정도가 전부였다. 글 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마지막 긍정의 끈을 붙잡고 여러모로 발버둥 치는 매일이었다. 밤잠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전날 글을 쓰다 새벽에 잠들어 3시간 정도의 취침시간만 가진 참이었다. 머리가 아프고 띵한 가운데, 아이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갈 곳 잃은 마음은 결국 자기 연민에까지 이르렀다. 

 

 6개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만 있었다. 외출은 최대한 삼가했다. 생필품 사는 것도 여의치 않은 날들이 꽤 있었다. 매년 우리 가족을 인간답게 버티게 해주는 한 달간의 한국 휴가도 이미  물 건너갔다. 좋아하던 돼지고기와 소주를 먹은 지는 10개월이 지났다. 같은 곳에 사는 누군가는 이 삶이 마치 '살아 있는 화석' 같다고 표현했다. 사람답지 않은 삶이 바로 이런 걸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나 외에도 70억이 넘는 전 세계 인구가 빠짐없이 겪고 있는 불행이라는 것을,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분명 알고 있었다. 더 나쁜 상황이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사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좋은 상황이야, 행운의 상황이야' 되뇌던 머릿속 긍정의 주문들이 그날만은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복받쳐오는 감정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이미 불행의 원인을 찾고 있었다. 남편을 따라 이 중동에 온 것이 애초에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일까? 중동에 오지 않았다면 전염병이 도는 6개월 중 단 며칠이라도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친구와 가족도 한국에 있으니 만약에 그랬다면 아이가 덜 외로운 아침을 맞을 수 있었으려나. 


  글쓰기를 무리하게 시작한 것이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해외에서 24시간 어린애를 돌보는 입장에 글 쓴다고 설쳐댄 것이 문제였나. 글쓰기를 한다고 아이를 방치하고 있고, 내 삶은 더욱 피곤해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어느 순간 생각은 멈추었다. 중동에 오지 않았어도, 글쓰기를 하지 않았어도 어쨌든 나는 이 코로나 시대를 맞이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충분히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은 이 빌어먹을 바이러스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언제 끝나지? 6개월 후? 1년 후?  그러나 이미 전 세계에 돌아다니고 있는 바이러스를 마냥 탓해보았자, 그 끝을 아무리 예상해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결론은 늘 그렇듯 허탈했다. 


 예전의 나는 인생의 모든 것이 통제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세상 일의 대부분은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행복도 불행도 내 의지와 노력에 따라 통제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행복은 내가 미친 듯이 노력하면 따라오는 것이라 생각했고, 불행은 노력과 의지로 상황을 통제하여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나의 노력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했고, 불행은 나의 실수나 잘못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석해왔다.  

 대체로 큰 실패나 시련을 거치지 않은 삶, 통제 가능한 삶 속에 살아왔기에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되짚어보면 운이 좋았던 나날들이었다. 어찌 보면 자신만만하고 어찌 보면 오만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이 통제 불가능한 나라에서 삶을 꾸리면서 기존의 신념은 완전히 뒤집혔다. 처음에는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주변 상황을 통제하여 상황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잠잠해지면 어느새 다른 걱정거리가 또 터지는 식으로 일이 밀려왔다. 아이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큰 변수였다.- 아마 앞으로 더욱 그러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의 어퍼컷을 연속으로 얻어맞자 비로소 알게 되었다. 행운도 불행도 나의 의지나 노력, 잘못이나 실수에 관계없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원인도 예측도 어려운 존재를 그리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derich. 1774~1840)는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의 작품이 히틀러의 사랑을 받아 나치의 선전도구로 쓰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나치의 패배 후 외면받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프리드리히는 어린 시절 어린 시절 가족의 죽음을 연이어 경험한 바 있다. 프리드리히의 어머니는 그가 7살이 되던 해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다음 해에는 누이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죽었다. 13세 때에는 스케이트를 타다 빙판이 깨져 남동생이 익사하였다. 17세 때에는 또 다른 누이가 장티푸스로 죽기도 했다. 어릴 때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프리드리히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자살 시도에 실패한 그의 목에는 평생토록 상처가 남았다. 이 때문에 수염을 길게 길러 상처를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 인생의 굴곡진 경험이 영향을 끼쳤던 것인지 그는 점차 자연의 숭고한 힘에 관심을 갖게 된다. 평생동안 수많은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는데 힘썼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818) @wikimedia

이 작품이 프리드리히의 대표작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다. 한 남자가 산 정상에 올라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가파른 바위를 넘어선 저 멀리 자욱한 안개가 보인다. 안개의 모습은 맹렬하게 움직이는 바다의 파도를 떠오르게 한다.  


특이한 것은 남자의 모습이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이라는 점이다. 만약 앞모습이 그려졌다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인간이 되고 자연은 그저 뒷배경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뒷모습이 담김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림의 주인공은 자연이 되었다. 거대한 자연이라는 주인공 안에 남자가 포함된 것이다. 신비하고도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나약하며 고독한 존재인지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프리드리히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인물의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작품 속 안개 바다를 보는 감상자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흔히 산에 오르는 것을 삶의 여정에 비유한다. 삶의 여정을 거치고 정상에 올라온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안개 바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위대한 자연의 힘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거스를 수 없는 풍파를 연상할 수도 있다. 인생의 풍파나 자연은 그 답을 찾기 어렵고 예상도 어려운 존재다. 안개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질문을 멈추고 하루쯤 더 버틸 힘을 비축해야 할  때 


인간은 의지와 노력으로 많은 것을 바꾸고 통제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신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자연의 힘, 또는 운명의 힘이라 불리는 것 앞에서 인간의 의지는 한없이 작은 것이 되기 쉽다.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나 자연의 힘이 불어닥치면 억지로 답을 찾기보다, 그저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는 그런 말을 우리에게 건네는 작품인지도 모른다. 


재난이나 전염병, 날씨, 사람 사이의 관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이 나의 의지와는 큰 상관이 없다. 이런 일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 물으려는 시도는 대부분의 우리에게는 무의미하다. 시련이 언제 끝날까 예측하는 일 역시 희망고문이 될지 모른다. 모든 일은 안갯속에 쌓여 있다. 끝날 일은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고, 될 일은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의지와 노력으로 끊임없이 밀어붙여도 결론이 나지 않는 일도 간혹 존재한다. 


그날의 나는 전 인류에게 닥친 불행의 안갯속에서 나름대로 그 원인을 찾아보려 하였지만 결국 아무런 답도, 해결방법도 찾지 못했다. 아니, 그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을 멈추고, 내 손에서 통제 가능한 일을 찾아보아야 했다. 그날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어쨌든 노트북을 꺼내 정해진 분량의 글을 썼다. 남편에게 글 쓸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며 주말에 혼자 차에 있을 시간을 얻었다.-나의 이해해주는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니 이것 역시 행운일지 모른다.- 아이가 밥 먹을 시간 동안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한 입 더 먹이고 글 한 줄 쓰는 것이 쉽지는 않으나, 어쨌든 한 줄이라도 더 쓸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수면시간이 부족하면 생각이 자꾸 비관적인 쪽으로 흐르는 것 같아 잠은 제대로 자기로 했다. 되도록 하루에 대여섯 시간 정도는 자기로 결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것뿐이었지만, 고작 그것을 하고 보니 삶이 아주 약간 나아졌다.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운명이 어퍼컷을 끊임없이 날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당신에게 찾아올 수도 있다. 비교적 운이 좋은 사람에게도 그런 시기가 한번쯤 오게 마련이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기 싫은, 영원히 잠들고 싶은 절망의 밤이 당신에게 찾아올지도 모른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 그런 시기를 맞고 있는 이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이 전염병이 여러 사람의 인생에 어퍼컷을 날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하고 이겨내라는 말을 나는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다. 나도 그런 의지와 노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니까. 하루는 희망에 들떴다가 다음 하루는 절망에 빠져 매일 버티는 중이니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내뱉지 못한다. 

 

 상황을 이겨내고 극복한다는 스토리는 위인전이나 자기 계발서에서 찾기 쉬운 이야기다. 위인전에 나오는 위인쯤 되어야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이다. 불행의 원인을 따져 묻지 않는 것. 내가 손댈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구분하여 손댈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작고 사소한 일에 집중한다면 하루쯤 더 버틸 힘이 생긴다. 버티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삶은 어차피 이겨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버티는 것에 가까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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