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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Jun 30. 2020

불행 배틀은 위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바위를 굴려 올리는 중이니까요  

그건 위로가 아니라 불행 배틀인데요  


10여 년 전, 직장 사춘기를 한창 앓았던 무렵이다. 지인들의 조언이나 위로를 들어보고자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중 한 지인이 해준 위로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직장 다니면서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많은지 모르지?
그에 비하면 너는 얼마나 안정되고 편한 직업을 가졌니.
나만 해도 너무 힘들어. 
 네가 편한 입장이라는 사실을 좀 생각해봐.
그리고 힘내서 다녀. 직장 관둘 생각하지 말고

 

 조언을 해준 이는 이 말과 함께 '이 세상 물정 모르는 것아!'라는 식의 표정을 함께 날려주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들은 위로 중, 가장 위로가 되지 않았던 말이었다.


 살기가 쉽지 않고 마음이 지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위로가 필요한 이도 많다. 우리는 가끔 타인을 위로하기 위해 내가 가진 비슷한 종류의 어려움과 고민을 털어놓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네가 A라는 어려움을 꺼내놓는다면 나 역시 B라는 어려움을 꺼내놓을게.' 이런 식의 위로는 매우 흔하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처지라는 사실 때문에 '위로하는 자'와 '위로받는 자' 사이의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 도가 지나쳐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이와 불행 배틀을 벌이려는 사람들이 있다.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든 처지니 우리 공감하자'가 아니라 '네가 힘들다고? 내가 더 힘들어. 배부른 투정하지 마.'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 정도면 위로를 하려는 의도보다는 배부른 투정하지 말고 입 다물라는 의도가 강하게 느껴진다.   

 

  일상생활뿐 아니라 인터넷 댓글 게시판에서 비슷한 방식의 불행 배틀을 종종 발견한다. 한 인기 연예인이 우울증을 앓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이었다. 화려해 보이는 생활 속에서도 오랫동안 말 못 할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렸으리라. 떠나기 전 힘든 심경을 눌러 담은 유서를 읽으니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이 연예인의 죽음을 다룬 기사 밑에는 잔인한 댓글이 떠돌고 있었다.


 "돈도 많고 인기도 많은데 뭐가 그렇게 힘들었냐. 자살한 이유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우울증은 여유로운 사람이나 앓는 병이다. 돈 없어서 바쁘게 일해야 하는 상황이면 우울증 안 걸린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죽음 앞에 굳이 저런 의견을 인터넷 공간에 꺼내놓아야 했을까. 대한민국에는 의사표현의 자유가 있으니 그래,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조금 아려왔다.   




삶의 무게가 그를 짓누를지라도, <시지프스>  


<시지프스> (티치아노 베첼리오, 1548~1549)          @출처: 위키피디아

 

  바위를 이고 힘겹게 산을 올라가고 있는 남자가 있다. 엄청난 바위의 무게에 그의 머리는 한껏 눌려있고 온 몸의 근육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위 작품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1490~1576)의 <시지프스>다. 신들의 형벌을 받고 있는 시지프스라는 사내를 그린 작품이다. 시지프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코린토스라는 국가의 왕이었다. 그는 전령의 신이자 도둑질의 신(!)인 헤르메스에게서 도둑 기술을 물려받은 아우톨리코스의 소 도둑질을 잡아낼 만큼 훌륭한 지능을 가진 인간이었다.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신들의 시선으로 보면 똑똑하다기보다 교활해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시지프스는 제우스가 강의 신인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라는 처녀를 납치하는 것을 목격하고 아소포스에게 이를 알려 준다. 그의 행동은 제우스의 노여움을 샀다. 제우스는 시지프스를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보냈지만, 시지프스는 하데스마저 속이고 다시 지상으로 가 장수를 누렸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신들의 미움을 산다. 시지프스는 죽음 이후 저승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영원히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시지프스가 고생하여 바위를 정상까지 밀어 올려도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내렸다. 그러면 또다시 바위의 무게를 감당하며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시지프스는 성과가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힘든 일을 거듭해야 하는 최악의 형벌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어릴 때는 시지프스의 이야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보니 시지프스의 이야기가 다르게 다가온다. 형벌을 받는 시지프스의 모습은 어찌 보면 우리 각자의 인생 모습과 닮아 있다. 인생은 행복, 즐거움, 기쁨의 시간도 간간히 있으나 고통과 어려움의 시간이 그에 못지않게 길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엇인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우리는 매일을 묵묵히 살아나가야 한다.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며 정상을 향하는 시지프스와 닮은꼴이다. 


 <이방인>, <페스트>의 작가 알베르 까뮈 역시 시지프스의 모습을 인간이 처한 부조리한 삶에 비유하였다. 인간은 시지프스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부조리한 상황을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까뮈는 인생을 체념하며 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부조리한 조건을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고 삶을 꿋꿋이 버텨내는 인간의 저항 정신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바위를 굴려 올리고 있다 


 나는 까뮈처럼 대단히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주제는 못 된다. 대신 베첼리오의 <시지프스>를 보자 머릿속에 단순한 깨달음이 왔다. 우리 모두는 각자 시지프스로 살고 있다는 생각.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바위를 산 정상으로 들어 올리고, 떨어지면 다시 반복하여 굴려 올리고 있는 중이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지겹고 힘겨울 수 있는 하루하루를 애쓰며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간혹 어떤 이들은 자신이 지고 있는 바위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네가 굴려 올리는 바위가 내 것보다 작으니 너는 투정하지 마라.' 'A의 바위와 B의 바위 중 무엇이 더 무거운지 겨뤄보자'는 식으로 덤빈다.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이다. 자신보다 객관적으로 힘들지 않을 것 같은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을 향해 비난의 말을 던지기도 한다. 우울증에 걸려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젊고 힘든 일도 없는데 왜 그런 병에 걸리냐'라고 다그치고, 육아가 힘들다는 주부에게 '아이 한둘 키우면서 무슨 어려움이 그리 많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 예다. 

             <위로>(A. 킨들러. 1871)                                 @출처: 위키피디아 

 

 물론 습관처럼 본인의 어려움과 하소연만 늘어놓으며 내 기를 앗아가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피곤하다. 대개 이런 이들은 나의 어려움을 들어주지는 않고 자기 이야기만 거듭하여 서로 공감하거나 소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려움을 호소하는 상대가  '에너지 뱀파이어'가 아니라면 그의 고민에 귀 기울여주고 상대방이 지고 있는 바위의 무게를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나도 지금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어 힘들었는데, 너도 네가 처한 어려움에 참 막막하고 힘들었겠다' 정도의 위로로 충분하다. '너의 어려움은 객관적으로 작고 사소한 것인데, 내 것에 비하면 좁쌀만 한데, 대체 왜 힘들어하는 거니?' 이 말은 공감이나 위로, 그 무엇도 되지 못한다.


  '네가 참 힘들었겠네' 그저 이 한마디면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바위를 굴려 올리고 있는 시지프스라는 사실. 이 사실만 떠올린다면 따스한 위로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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