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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Nov 24. 2020

가장 빨리 손절해야 할 인간관계

누군가 당신을 지속적으로 '형편없는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다면

대화를 ‘맞고 틀리고’의 게임으로 만드는 그의 화법     

      

 몇 년 전 일이다. 아끼는 동생 A가 연애상담을 해왔다. 객관적으로 조건이 나쁘지 않은 남자인데,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남자 친구와 대화를 끝내고 나면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든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 역시 풍부한 연애경험의 소유자가 아니라 별달리 조언해줄 말이 없었다. '원래 남녀 사이에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일이 많다, 서로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구태의연한 이야기로 연애 상담을 마쳤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우연히 A와 그 남자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남자 친구는 A의 이야기대로 든든한 직장과 성실한 성품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와 A 사이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A의 찜찜한 기분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되었다.      


 그는 대화를 대부분 ‘맞고 틀리고’의 게임으로 만들었다. 다른 사람이 X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X는 사실이 아니라며 반론을 제기하고 입증하는데 시간을 들였다. 심지어 본인이 항상 정답인 쪽에 서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처음 본 나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여자 친구인 A에게는 조금 더 가혹했다. 특히 A가 시사나 경제 관련 이야기나 주변 소식을 전할 때면 그는 A의 말 허리를 잘랐다.      


"아니야, 그건 내가 알려줄게. 너는 그 내용에 대해 잘 모르고 있네."     


그날의 대화에서 A의 남자 친구가 많이 한 말이다. 본인이 정답을 말하는 편이 되기 위하여 A를 ‘상식이 부족하고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 ‘생각이 짧은 사람’으로 몰아가는 말을 계속했다(솔직히 말해 연인에게 그런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가르기 위한 게임을 하는 것처럼 그는 그런 대화에 몰두했다. 그와 A 사이의 대화를 불편한 마음으로 들었다. 찜찜한 마음으로 그 날의 식사 자리를 마쳤다. 그날의 대화가 오랫동안 생각났지만 A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건네지는 못했다.  

     

결국 식사 모임이 있은 지 몇 개월 후 A는 남자 친구와 이별했음을 전했다.             




내면의 불안감은 사투르누스를 만든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 스페인의 낭만주의 시대의 화가다. 고전적인 미술의 시대를 마감하고 근대 예술의 시작을 연 예술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

 화가가 된 초기에는 밝고 산뜻한 로코코 풍의 그림을 주로 보여주던 그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화풍이 바뀐다. 나폴레옹 전쟁과 종교재판을 거치고, 청각장애를 갖게 된 후기로 갈수록 어두운 그림을 그린 것이 인상적이다. 특히 말년에는 ’ 귀머거리 집‘으로 불린 별장을 구해 방 벽 전체에 14점의 벽화를 그렸다. 옻칠을 하여 번쩍 거리는 벽에 직접 유채로 작품을 그려 어두운 색조의 그림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은 '검은 그림' 연작으로 불린다. 우울함과 기괴함, 인간에 대한 풍자, 사회비판 정신을 잘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고야의 초기작 <파라솔>(1777)과 후기작 <수프를 먹는 두 노인>(1819~1823).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의 검은 그림 연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1819~1823)이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1819~1923)


  사투르누스(Saturnus)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며 그리스 식 이름은 크로노스(Chronos)다. 제우스의 아버지이며 농업의 신으로 불리기로 한다. 사투르누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처치할 때 그로부터 “너도 네 자식 손에 죽을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예언에 극도의 두려움을 느낀 사투르누스는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아이를 잡아먹어버린다. 그러나 결국 몰래 살아 있던 막내아들 제우스에 의해 공격당하여 예언대로 쫓겨난다.

     

고야의 그림 속에서 사투르누스는 어둠에 둘러싸여 두 손으로 아이의 몸을 움켜쥐고 있다. 이미 아이의 머리를 먹은 후 팔을 먹고 있는 중이다. 기괴하고 끔찍한 장면을 담은 그림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사투르누스의 표정을 확대한 그림

흥미로운 것은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의 표정이다. 그는 잔인한 악마가 짓는 사악한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커다랗게 뜬 그의 눈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다. 아이의 몸통을 꽉 쥐고 있는 손짓, 아래로 처진 눈썹 등이 그의 두려움과 불안을 잘 보여준다.   


 고야의 사투르누스 그림을 보고 두려움에 차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타인에게 신체적・정서적 학대를 가하는 사람은 사실 '사악한 의도'로 무장한 사람이 아닌 경우도 있다. 자식을 끊임없이 잡아먹지만 안심하지 못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사투르누스처럼,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타인에게 몰두한다. 다른 사람의 자존감이나 에너지를 뺏고 조종해야만 일시적으로 안심한다. 누구보다 내면이 허약하고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이들인 것이다. 대체로 타인을 괴롭히고 억누르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해결하기 어려운 불안과 열등감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당신을 지속적으로 형편없이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더 우월하기 위해, 맞는 쪽에 서기 위해 지속적으로 상대방을 형편없는 이로 몰아 대는 사람이 존재한다. 사실 이 사람들이 ‘강해서’ 그런 특성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정답이어야 하고, 타인을 눌러야만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사람의 약점에 있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한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이 있어, 그것을 숨기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누르거나 ‘네가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상대방을 세뇌시킨다. 최근 들어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심리학 용어로 자주 불리는 현상이다.        


  나와는 먼 거리의 사람만이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인뿐 아니라 폭언을 쏟아붓는 직장 상사, 나의 자존감을 깎아 먹는 친구, 때로는 가족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너는 전부 틀렸고, 형편없다’는 주문을 지속적으로 듣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물론 모든 사람이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는 아니다.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타인을 세뇌시키고, 통제하며 군림하려는 이들이 가해자에 해당한다)    

  

 피해를 입는 쪽은 평소 자신이 한 말을 되새기고 후회하며 자책한다. 자신이 예민하고 형편없는 사람인지 의심하게 되고 상대방에게 사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과 신뢰감을 잃어가게 된다. 사실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가해자에게 존재한다. 가해자의 내면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들은 본인이 잘못한 상황에서도 온전한 미안함을 표현하지 않는다. 대체로 다툼을 상대방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일로 치부한다. 사과의 말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가 잘못하기는 했는데, 네가 먼저 나를 화나게 했잖아."     

"내가 잘못한 면도 있지만 너는 이런 점을 잘못했어. 그게 바로 너의 문제야."     

 

 만약 당신 곁에 이런 말을 자주 내뱉는 사람이 있고, 그 때문에 내가 힘들어지고 있다면 최대한 빨리 그의 영향력을 벗어나야 한다.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려다 당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될 수 있다. 가장 빨리 손절해야 하는 관계다.  


 사실 ‘인간관계의 손절’이 절대 간편하고 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관계는 그렇게 맺고 끊음이 간단하고 쉽지 않다. 그러나 내 자존감을 지속적으로 잡아먹는 사람만큼은 손절할 필요가 있다.  


 가해자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과 자격지심, 열등감이 많은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에 있는 불안과 열등감은 다른 사람이 해결해줄 수 없다. 자신의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때문에 당신을 망가뜨리는 가해자는 피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관계에 대한 ‘최선’이나 ‘책임감’을 추구하다가 내가 잡아먹히는 수가 있다.    


 물론 A의 경우 그나마 연인관계라 비교적 이별이 쉬웠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은 관계가 많다. 가족이나 직장 상사처럼 물리적으로 멀리 하기 어려운 인간관계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그 사람의 영향권을 벗어날 ‘결심’과 ‘준비’가 필요하다. 심리적으로 경계선을 긋거나 경제적 독립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것이 좋다. 그 단계를 밟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존감이 회복되고 마음이 단단해진다. 헤어질 결심, 혼자 힘으로 서 있을 용기만 가져도 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은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다. 당신을 형편없이 만드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당신을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누군가가 있다면 가장 먼저 피해야 할 상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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