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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Jan 05. 2021

제 취향 좀 존중해주시겠어요?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들에 물음표를 던져야 할 때

누군가 나에게 취향을 바꾸라고 조언할 때   


   


야, 너는 만화책 좀 그만 읽어.
고등학교에서 사회 가르친다는 애가 인문 고전이나 사회과학서도 좀 읽어야지.
나이에 안 맞게 듣는 음악도 아이돌 노래가 뭐니
    

 

 수년 전, 나에게 이 말을 던진 지인 C는 여러모로 아는 게 많은 이였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인문 고전 아니면 사회과학서 위주의 독서를 했고, 다방면에서 풍부한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 C와 대화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많아 좋았다. 그러나 그는 내 독서 목록, 음악 취향 등을 다소 못마땅하게 여겼다. 가끔 C는 ‘자본주의 사회의 저급 문화를 무방비하게 즐기는 편협하고 얕은 안목을 지닌 대중’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움찔했다. 그 ‘편협하고 얕은 안목을 지닌 대중’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여섯 살 때부터 TV를 하루 6시간씩 시청하며 자라온 사람이었다.-부모님이 바쁘셨으니 별 수 없었다.- 공중파 방송이 애국가로 끝날 때까지 각종 만화, 드라마와 음악 프로그램을 두루 섭렵하며 지냈다. 학창 시절에 책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서울대 추천 도서’ 같은 것은 이상하게도 잘 읽지 못했다. 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전집 80여 편과 만화책을 읽는데 독서 시간을 할애했다. 음악 취향도 지극히 대중적이다. 주로 유튜브에서 ‘최신 아이돌 음악’, 음원 사이트의 'TOP 100’을 재생하여 듣는다. 현재는 막장 드라마 짤방을 보는 것이 삶의 낙이다.      


 어릴 때는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많았기에 이를 지적하거나 걸고넘어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 취향은 주변인들에게 좀처럼 이해받지 못했다. 아이돌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나이가 몇인데 철없어 보인다’는 말을 들었고, 막장 드라마를 보는 내 모습을 보고 ‘전형적인 아줌마 취향’이라며 혀를 끌끌 차는 이도 있었다. 한 번은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는 말을 인생 명언으로 던졌다가 만화 속 대사를 읊조렸다는 이유로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종종 ‘취향 후려치기’를 당하면서 억울함도 느꼈지만, 딱히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C한테는 더욱 그랬다. 일단 C가 여러모로 똑똑하고 아는 게 많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예전 글에서 한 번 밝힌 바가 있지만 ‘지적 이미지에 대한 목마름’이 내 안에 존재한다. 이 목마름을 뒤집어보면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부끄러움, 수치심 같은 것이 내  마음속 어딘가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물론 이 마음이 글을 쓰는 원동력으로 작용한 적도 많다-. 일단 서울대 추천 인문고전은 제대로 읽지 못했고, 어려운 책은 읽다 말다 하는 편이었다. 깊이 있는 지식을 제대로 쌓지 못한 내가 가끔 창피하게 느껴졌다.      


 ‘지식이 풍부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도 존재했다. 고백하건대 출판사 미팅을 가질 때도 이런 환상 때문에 쭈구리 마인드가 발동한다. ‘출판사 관계자 = 책 많이 읽는 사람 =교양인(!)'이라는 수식어가 머릿속에 박혀 있어서 나는 대체로 출판사 미팅 때 약간 위축된 상태로 가만히 있는 편이다(겉보기에는 그다지 티가 안 났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로 C가 취향을 바꾸라고 조언할 때에도 그럭저럭 수긍했다. '아는 거 많고 똑똑한 애니 쟤 말이 맞겠지’ 싶었고 ‘C는 인문서와 사회과학서를 통해 엄청난 삶의 진리를 쌓았을 테니 난 가만히 듣고 찌그러져 있어야겠다’라는 생각도 했다. 이런 생각을 했기에 C의 말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저 한없이 가벼운 내 취향을 부끄럽게 여겼을 뿐이다.       




예술이라는 분야에 물음표를 던지다, 마르셀 뒤샹의 <샘>  



   

  마르셸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은 프랑스 작은 마을 브린빌에서 공증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는 이미 예술가인 형제들이 있었다. 첫째 형은 화가였고 둘째 형 역시 조각가였다.     

마르셸 뒤샹(1887~1968). 예술가스러운(?) 모습이다 @Wikiart

 

 

원래 도서관 사서가 되려던 그는 파리의 쥘리앙 아카데미에서 미술 수업을 받으며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13년, 뒤샹은 회화 대신 <자전거 바퀴>라는 예술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등받이가 없는 원형 의자 위에 자전거 바퀴를 설치한 작품이었다. 물론 자전거 바퀴나 의자는 그가 새롭게 제작한 것이 아니었다. 뒤샹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상품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예술품을 창조하였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창조 방식이었다.  



<자전거 바퀴>(마르셀 뒤샹, 1913) @wikiart



 그리고 1917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샘>(Fountain)이 탄생한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샹은 독립 미술가 협회의 전시회에 이 작품을 내놓는다.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전시회였다.



<샘> (마르셀 뒤샹, 1917)  @wikiart


 

 누구나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정체는 '변기'였다. 뒤샹은 동네 철물점에 가서 자기로 만들어진 남성용 변기를 샀다. 그 후 변기에 R.Mutt라는 이름을 서명한 후 작품을 출품한다. 흰색 남성용 변기를 본 사람들은 경악했다. 주최 측은 전시를 거절했다.

이후 뒤샹은 ‘블라인드 맨’이라는 잡지에 R. Mutt라는 작가를 옹호하는 척하며 <샘>에 대한 글을 싣는다.

      

“변기가 부도덕하지 않듯, 머트 씨의 작품 <샘>은 부도덕한 작품이 아니다. 배관 수리 상점의 진열장에서 매일 보는 제품들일뿐이다.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하였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과 시각에 의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된 것이다.”     


 <샘>은 그냥 변기가 아니었다. 예술가가 선택하여 이름을 붙인, 새로운 가치를 지닌 예술 작품이었다. 뒤샹은 무엇을 새롭게 그리거나 만들어야 예술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이미 만들어진 것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변기가 만들어낸 매끈하고 우아한 곡선은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다.


<샘>(마르셀 뒤샹, 1917)  원본은 사진만 남아 있고 소실되었다. 이후 뒤샹은 복제품을 만들었으며 총 16개가 남아 있다.  @wikipedia




 뒤샹은 그다지 관련 없어 보이는 둘 이상의 사물을 결합하거나,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전에 없던 예술분야를 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기성품이라는 단어에 착안하여 이 새로운 예술분야에 레디메이드(Ready-mad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가 인쇄된 레디메이드 엽서에 콧수염을 그려 넣어 남성의 정체성을 부여한 작품, 'L.H.O.O.Q’(1919)를 발표하기도 한다. 그동안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않던 고전 중의 고전 , <모나리자>의 본질적 가치에 변형을 가한 작품이었다.      


<‘L.H.O.O.Q>(마르셀 뒤샹, 1919)  @wikiart

 

 당시 사회의 주도 세력인 부르주아 계층은 전통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예술 작품을 해석하며 그들의 취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뒤샹은 예술이나 유명 작품을 해석하고 창조하는 기존의 방식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일상적인 상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이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의 레디메이드 작품을 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수많은 물음표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이걸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예술이란 대체 뭘까?”

“예술가란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일까,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는 사람일까?”

     

 <샘>을 비롯한 레디메이드 작품들은 그동안 사람들이 당연하게 ‘그렇구나. 저게 바로 예술이지!’라고 생각하던 것들에 의문을 던졌다. 뒤샹의 시도로 20세기 현대 미술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사람들은 이제 예술가의 손재주보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발상에 주목하게 되었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던 예술의 고정관념에 물음표를 집어넣은 것, 뒤샹이 현대 미술에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물음표가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뒤샹의 작품을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무언가를 수용하고 감탄하는 느낌표(!) 보다 비판적인 사고 끝에 던지는 물음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사회에서 이른바 주류로 여겨지는 사고방식이나 지적 권위를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누군가의 취향에 대해 논할 때도 마찬가지다.      


  특정 나이대에 맞는 취향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렇다. 10대, 20대, 30대 등 나이에 따라 어떤 음악을 좋아해야 하고, 갈수록 성숙하고 진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따라온다. 나이 듦은 반드시 ‘성숙’과 ‘진중함’을 동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특정 연령대는 획일화된 문화를 좋아해야 정상이라는 편견이 우리의 무의식 안에 존재한다.         


 취향을 ‘좋고 –싫음’의 영역이 아니라 획일화된 등급이나 잣대 안에 가두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가끔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만을 ‘고급문화’나 ‘순수한 예술분야’로 취급하고, 다른 것들은 옳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는 이들을 본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심미안을 뽐내기 위해 타인의 취향을 ‘수준 낮은 것’으로 후려치기도 한다.     

 

 되돌아보니 C의 조언 역시 이러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C는 늘 인문고전이나 사회과학서 속에서 배운 지식과 논리를 강조했다. ‘인간에 대한 폭넓고 깊은 이해를 돕고 성찰을 키운' 고전을 사랑한 그의 취향은 훌륭하고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고전을 통해 배운 통찰력을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데 쓰지 않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 조언을 날리거나 자신의 우월감을 뽐내는데 쓰는 것이 아쉬웠다.

 아이돌의 음악에서 철학을 읽는 사람도 있고 만화 속 명언에서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사람도 존재할 수 있다. 고전이나 클래식의 가치도 후일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새롭게 변화할지 모르는 일이다. ‘어떤 문화를 사랑하느냐’ ‘어떤 책을 얼마나 많이 읽느냐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문화를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여 수용하느냐’ ‘비판적으로 사유하며 책의 내용을 내 것으로 읽어낼 수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사실 C보다 더 내 취향을 부끄러워한 것은 나 스스로였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C의 말에 큰 반박을 하지 못한 것, 나의 취향을 가벼운 것으로 취급하며 내심 부끄러워한 것은 모두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이나 등급 등 일관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취향을 ‘고급’과 ‘저급’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이 내 무의식 안에도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부끄러움이 오히려 줄었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앞으로 책을 더 많이 읽고 배우면 된다는 생각을 하면 충분했다. 무언가를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 하고 '반성하는' 수준까지는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지식이 풍부하고 교양 있어 보이는 인물의 의견이나 취향이라 해서 이를 무조건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의 의견이 '나'라는 인간에게도 타당한 진리인지 한번 더 생각해본다. 내 취향과 저 사람 취향은 다르려니 생각할 때도 있다.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고전이나 예술작품이라 할지라도 별생각 없이 받아들이지 않고, 물음표를 던지며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내 취향도 더 이상 창피해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만 않는다면(특정 취향이 범죄와 관련되어 있거나 타인의 인권을 침해할 경우에는 당연히 문제가 될 것이다)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니까. 나 역시 내 향을 즐기면서 세상에 물음표를 던지고, 나름대로 나만의 시야를 넓혀가는 중이다. 그것이 부끄러울 일은 아니었다.       


 이제는 내 취향을 아래로 내려보거나 나이에 맞게 바꾸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예전만큼 한껏 쪼그라들지는 않는다(물론 약간은 쪼그라든다). 대신 속으로 ‘응 그래. 네 취향은 네 취향, 내 취향은 내 취향’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게 교양 있고 점잖게 말해본다.



저기, 제 취향 좀 존중해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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