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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유퀴즈온더블럭' 출연 수사관의 가장 보람된 일

by 최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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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람들의 몫이라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지 두 달 반이 지났다. 방송에 나간 뒤 삶이 달라진 게 있다면, 우선 구내식당 사장님이 나를 알아보고 다른 사람들 눈치 보며 특별한 반찬을 슬쩍 얹어 주신다는 것(^^). 그리고 근무하는 검찰청 근처에 사시는 분이 아내의 인터뷰를 보시고 성경 [시편] 필사본을 주고 가셔서, 난생처음 성경 필사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필사가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다.


다른 방송사 두세 곳에서도 출연 제안이 들어오긴 했다. 하지만 본업인 수사관 업무에 지장을 줄까 싶어 모두 고사했다.


[유 퀴즈 온 더 블럭] 섭외를 받고 나서 가장 보람된 일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볼 것 같아 여러 답을 준비해 두었다. 연쇄살인마 유영철의 피해자 가족을 도왔던 일일까? 아주 유명한 대기업 회장님의 팔짱을 끼고 교도소에 수감하러 갔던 일일까? 여러 가지를 떠올리다 결국 아주 오래전 원주 귀래면의 '사랑의 집' 장 00 목사를 수사하던 일을 생각해 두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방송에서는 그런 기습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내 녹화가 끝난 직후 김석훈 님이 같은 자리에서 녹화를 진행했다. 김석훈 님은 2012년 6월 [궁금한 이야기 Y]에서 ‘원주 귀래면 사랑의 집 장 00 목사 사건’을 다룬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그 사건을 수사하던 팀원이었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특정인을 방송으로 다룬 사람과 그 사람을 수사한 사람이 12년 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것이다.


장 목사 사건은 [궁금한 이야기 Y]와 최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도 소개된 바 있다. 24년차 수사관으로서 내게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이었을까? 오늘은 방송에서 하지 못한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수사가 시작되자 ‘사랑의 집’에 남아 있던 네 명의 장애인들은 전국의 보호기관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말기 암 환자였다. 그들은 최소한의 법적 정체성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서류상으로는 존재가 지워진 상태였고, 본인조차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로 자신을 증명할 수 없었다.


공소가 제기되고 형사재판이 진행되면, 이들이 피해자로서,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했다. 수사팀은 이들에게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그 임무가 내 몫이었고, 무엇보다 신속히 해결해야 했다.


주민등록을 만들려면 우선 지문을 채취해야 했다. 문제는 네 명 모두가 전국 각지 보호시설로 흩어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지문채취 도구를 챙겨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다. 길고 긴 여정이었다. 부디 예상처럼 쉽지 않으리란 예감이 빗나가길 바랐다.


처음에는 가까운 지역부터 시작했지만 곧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달려야 했다. 연이은 운전과 쉽지 않은 지문채취. 말 그대로 정신적·육체적 한계를 시험하는 시간이었다. 거의 40시간을 운전하고 지문을 채취했다. 휴식이라고는 차 안에서 잠깐 눈 붙이는 게 전부였다. 몸이 부서질 듯 피곤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사회에서 오랫동안 버려진 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정확한 이름을 갖게 하고 싶었다.


지문채취는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들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지문채취 용지의 정확한 위치에 찍으려는 순간 손이 뒤틀려 엉뚱한 데 찍히기 일쑤였다. 열 손가락 모두 찍어야 했기에 가져간 수십 장의 용지는 금방 동이 났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장애를 가진 이들이라 마지막 순간에 손이 돌아가고, 손가락이 꺾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지문을 찍는 것보다 울음을 참는 게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졸린 눈을 비비며 세 사람의 지문을 겨우 채취했다.


마지막 목적지는 전라남도 광주였다. 거기엔 가장 상태가 심각한 장애인이 있었다. 몸은 물론 목도 가누기 어려웠고, 손가락마저 이리저리 비틀려 있었다. 그의 손을 잡으려 하면 허공에서 흔들렸고, 간신히 손가락을 맞잡아도 지문이 거의 닳아 사라져 있었다.


손가락에 잉크를 묻혀 눌러봐도 또렷한 무늬는커녕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때 느낀 건 허탈함이나 피곤함이 아니었다. 그의 손을 몇 시간이고 붙잡고 있으면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문이 다 닳아버린 손은 그가 겪어온 고통과 학대의 증거였다.


결국 광주경찰서 과학수사대의 도움을 청했다. 첨단 장비와 숙련된 수사관들이 달라붙어 겨우 지문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단순히 수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들의 존재를 법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증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문을 받아낸 뒤부터는 비교적 수월했다. 주민등록번호를 생성하고, 법적 절차를 거쳐 이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등록시키는 일은 40시간을 전국 돌며 지문을 채취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말기 암 환자였던 여성분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봤다. 사진 속 얼굴은 내가 손을 잡아 지문을 찍던 그분이 맞았다. 잇몸이 다 보이도록 환하게 웃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분에게 이 세상은 과연 천국이었을까, 지옥이었을까. 고통스러웠던 그날들을 기억이나 할까.


방송에서는 가장 보람된 일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결국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답해 버렸다. 글의 효용이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난생처음 성경 필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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