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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죽은 자는 말이 없다(1)

by 최길성
모든 걸 아는 남자(브런치 축소).png

이수현은 내 기억 속 그 남자가 맞았다.

파티장 안쪽에서 비틀거리며 허둥지둥 나오던 남자.

그렇다고 해서 이수현이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었다.

원래 계획은 이수현을 직접 만나 추궁하는 것이었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죽은 자는 말을 못 하니까.

이수현은 예리한 칼에 정확히 급소를 찔려 죽었다.

누구 솜씨인지는 뻔했다.

하지만 블랙은 아무런 혼적도 남기지 않았고, 만약 우리와 마주치지 않았다면 이수현의 죽음은 미궁에 빠졌으리라.

나는 장춘자 계장이 치료받는 동안 경찰서에서 가서 여러 이야기를 해야 했다.

물론, 해야 할 이야기는 했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기 전 장춘자 계장이 신신당부했기 때문이었다.

“물어보는 대로 다 말해주면 절대 안 돼. 알았지?”

“신기탄 씨. 두 분이 범인이 아니란 건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건 그 집엔 왜 가신 겁니까?”

이런 질문에는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었다.

“검찰 수사관 공무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니까 그 공무라는 게 뭐였습니까?”

이런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검찰 수사관 공무라 함부로 유출할 수 없습니다.”

“이것 보세요. 검찰 수사관이면 미집자를 쫓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수현 씨는 전과조차 없는 사람이었는데 왜 검찰 쪽에서 관심을 둔 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수사 기밀이라 저도 말씀드릴 수가 없어 답답합니다.”

“하아. 그러면 다른 걸 묻겠습니다. 두 분을 공격했다던 그 인물과는 아는 사이였습니까?”

“아니요. 오늘 처음 봤습니다.”

“처음 봤는데 다짜고짜 칼을 휘둘렀다? 지금 막 사람을 죽이고 나오던 길에?”

“그건 제가 그 인간을 불러세워서 그런 겁니다.”

“그 사람이 살인범인 건 어떻게 알고 불러세운 겁니까?”

“그게 바로 검찰 수사관의 예리한 감이죠.”

“하아…….”

담당 형사는 간신히 화를 삭이는 표정이었다. 나라도 그랬으리라.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저도 처절한 격투를 벌였더니 온몸이 아프네요.”

“알겠습니다. 같은 나랏밥 먹는 처지라 봐 드리는 겁니다. 아시죠? 추가로 조사할 게 있으면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형사는 마지못해 나를 보내주었다.

나는 그 길로 곧장 장춘자 계장이 있는 병원에 갔다.

장춘자 계장은 한 손에 붕대를 감은 채 퇴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 빨리 왔군.”

“뭐 하시는 거예요? 벌써 퇴원하면 어떡합니까?”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냥 몇 바늘 꿰맨 거야. 어디 부러진 것도 아닌데 엄살 떨고 누워있을 시간 없어.”

“하지만 피도 많이 흘리셨고…….”

“그러면 자네가 몸보신 음식이라도 사주면 되겠네. 내가 장어 좋아하거든.”

“그런 거야 얼마든지 사드릴 수 있는데,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뭡니까? 며칠 쉬시면 좋겠는데.”

장춘자 계장은 대답 없이 주머니에서 핸드폰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처음 보는 핸드폰이었다. 게다가 잠겨 있지도 않았다.

“이게 뭡니까?”

“일단 자네가 가지고 있어. 퇴원하고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지.”

결국 나는 장춘자 계장의 퇴원을 말리지 못했다.

그는 약국에서 항생제를 한가득 받은 후 차에 올랐다.

이번에는 내가 운전하고 장춘자 계장이 조수석에 탔다.

“어디로 갈까요?”

내가 물었다.

“어디든 그늘진 곳에 좀 세워봐. 아무래도 차안에서 이야기하는 게 제일 좋겠어.”

장춘자 계장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SUV를 조심스레 몰아 병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다행히 양옆으로 높은 빌딩이 서 있어 짙은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내가 차를 세우자마자 장춘자 계장은 조수석 의자를 뒤로 젖히고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괜찮다고 우기긴 했지만, 그렇게 상처를 입고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런 불쌍한 눈으로 보지 마. 난 끄떡 없으니까.”

장춘자 계장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불쌍하게 보는 게 아니라 이해가 안 가서…….”

“그 핸드폰이나 꺼내 봐. 그거 이수현 거야.”

“네?”

나는 놀라서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수현의 핸드폰이라는 건 사건 현장에서 중요 증거물을 무단으로 가지고 나왔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장춘자 계장이라 해도 이런 무모한 짓을 할 줄이야…….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장춘자 계장이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 시간은 없고, 증거는 확보해야 하는데.”

“근데 이거 원래 잠금이 안 되어 있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돼 있었지. 근데 지문 인식이더라고. 그래서…….”

뒷말은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장춘자 계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죽은 이수현의 손가락을 들어 핸드폰에 가져다 대는 게 훤히 그려졌다.

나는 따지기를 포기한 채 다시 물었다.

“여기서 뭘 찾아보면 될까요?”

“뭐든. 메시지도 확인해 보고, 통화 목록도 보고 다 살펴봐. 살인과 관련한 게 뭐라도 나오면 좋으니까. 그동안 난 한숨 자고 있을게.”

장춘자 계장은 그렇게 말한 뒤 진짜 잠에 빠져들었다.

금세 고른 숨소리를 내는 걸로 봐서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쉽게 잠드는 편인 것 같았다.

아니면 그만큼 힘들었거나.

아무튼 나는 이수현의 핸드폰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메시지는 딱히 이상한 게 없었다.

친구와 주고받은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어머니와 주고받은 안부 메시지 정도가 다였다.

그러다가 문득 녹음 앱에 생각이 미쳤다.

이수현의 핸드폰은 통화 녹음이 가능한 기종이었다.

나는 녹음 앱으로 들어가 최신 통화 녹음 기록부터 뒤졌다.

역시, 있었다.

‘최 비서’라는 인물과 통화한 내용이 녹음돼 있었다. 이틀 전 기록이었다.

서둘러 장춘자 계장을 깨웠다.

그는 잠들 때 그랬던 것처럼 금세 깨어나 눈을 떴다.

“뭐 찾았어?”

장춘자 계장이 물었다.

“이거 같이 들어보시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녹음 파일을 실행했다.

- 이수현 씨. 일단 수고했어요.

- 최 비서님! 왜 이제야 연락하시는 겁니까?

- 바쁜 일이 많았으니까 그렇죠.

- 전 약속대로 했습니다. 그러니 약속 지켜주세요.

- 물론이죠. 곧 저희 직원이 이수현 씨 댁으로 찾아갈 겁니다.

- 왜요? 우리 집엔 왜 오는 겁니까?

- 그러면 그 큰 금액을 이체라도 해서 받게요? 뭘 모르는군요.

- 그게 무슨…….

- 계좌에 갑자기 거액이 들어오면 은행에서 수상하게 여깁니다.

- 아! 그, 그래서…….

- 네. 그래서 현금으로 드리려 하는 거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하나 부탁이 있습니다.

- 뭐죠?

- 큰 거로 한 장만 더 넣어주세요.

- 음. 그건 약속에 없던 일인데요?

- 생각해 보니 금액이 너무 적어요! 누구한테도 절대 이야기 안 하고, 특히 형우그룹…….

- 잠깐만요. 회사 이름은 잠꼬대 중에라도 절대 입에 담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 죄송합니다. 앞으로 꼭 그렇게 할 테니까 한 장 더 주시죠.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 네. 감사합니다!

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녹음 파일도 재생이 완료됐다.

나는 장춘자 계장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확실하죠?”

“확실해. 여기 나오는 최 비서란 인간, 실제로 형우그룹 비서실에 있어.”

“그럼 됐네요.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죽은 자 핸드폰은 할 말이 있었네요. 이걸 증거로 해서 보고하면 될 것 같은데…….”

“보고를 왜 해?”

“네?”

뜻밖의 말에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수현이 살인자고 그걸 교사한 인간이 형우그룹 쪽 직원이라는 게 확인된 상황이니 게임 끝난 거 아닙니까? 이제 법의 심판에 맡겨야죠!”

내 말에 장춘자 계장은 고개를 저었다.

“정보란 건 말이야, 그걸 언제 터트리느냐에 따라서 파괴력이 달라져. 정보는 쥐고 있을 때 힘이 생기거든. 하수는 정보를 얻는 걸로 만족하고, 중수는 그걸 얻자마자 쓰려고 하지만, 고수는 적당한 때를 기다리지.”

“그러면 이 정보를 가지고 뭘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지금 공개하면 형우그룹 쪽에선 분명 최 비서를 꼬리 자르기 용도로 쓸 거야. 그럼 우린 얻는 게 아무것도 없게 돼. 그러니 머리를 잘 굴려야지.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테스트인가요?”

나는 미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아니. 그냥 질문이야.”

장춘자 계장은 능구렁이처럼 실실 웃으며 대답했고.

“저라면…… 이 통화 내용을 가지고 최 비서를 압박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쪽 사람으로 만드는 거죠. 형우그룹에 관한 정보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오! 그거 좋은 생각인데?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네? 제가 말한 게 정답인 겁니까?”

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말한 것뿐인데, 장춘자 계장이 대번에 찬성할 줄은 몰랐다.

“이런 일에 정답이 어디 있어? 수사관의 감을 믿는 거지.”

“하지만…….”

“괜찮아. 좋은 생각 같으니까 그대로 해 보자고.”

“그, 그러면 어떻게 하죠?”

“최 비서에게 연락해야지. 물론 이수현 핸드폰으로.”

장춘자 계장은 그 말과 함께 내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최 비서라 저장된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 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 이태원에 있는 ‘우정’으로 저녁 7시까지 와.

카페 겸 바인 ‘우정’은 알고 보니 장춘자 계장의 단골집이었다.

사장으로 보이는 여자가 장춘자 계장을 보고 반갑게 인사까지 했다.

“계장님. 오랜만이네요? 근데 손은 또 왜 그래요?”

“17대1로 싸우다가. 물론 내가 17쪽이었지만.”

사장은 장춘자 계장의 썰렁한 농담에도 까르르 웃었다.

“안쪽 자리 비어 있어요. 앉아 계시면 늘 마시던 거 가져다드릴게요.”

“이 친구는 아이스아메리카노 부탁해. 괜찮지?”

안 그래도 카페인이 필요하던 참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일 정신없는 일의 연속이었던 터라 몰랐는데 이태원에 도착하고 보니 피로가 몰려왔다.

게다가 실제로도 몸이 아팠다.

블랙과 벌였던 격투의 여파가 이제야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피곤하지?”

장춘자 계장이 물었다.

“조금 그러네요. 계장님은 괜찮으세요?”

“진통제 때문인지 아직까진 심하게 아프지 않아. 뭐, 내일 아침엔 잔뜩 찡그리고 있겠지만.”

“그런데요, 계장님. 아까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블랙의 또 다른 별명이 검찰 수사관 연쇄살인마라고.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막 그렇게 물었을 때였다.

카페 문이 열리더니 평범한 회사원 차림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장춘자 계장이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최 비서야.”

“제가 데리고 올까요?”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최 비서를 보며 장춘자 계장에게 물었다.

“직접 움직이지 말고 손만 들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나를 발견한 최 비서가 잠깐 움찔하더니 멈칫멈칫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 순간이었다.

장춘자 계장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젠장. 저 인간, 꼬리를 달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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