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우리는 구 차장에게 불려 갔다.
뉴스에 보도 될 정도의 사건에 연루됐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잔뜩 긴장한 나와 달리 장춘자 계장은 구 차장을 기다리면서도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기다린 지 30분쯤 됐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구 차장이 들어왔다.
안 그래도 불그스레한 얼굴이 더 달아올라 있었다.
척 보기에도 화가 잔뜩 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구 차장은 우리, 정확히는 장춘자 계장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블랙을 쫓던 중이었습니다.”
장춘자 계장이 대답했다.
“아니, 범정 수사관이 그놈을 왜 쫓아? 우리가 쫓아야 할 건 정보라는 거 몰라?”
“블랙이 아주 중요한 정보를 쥐고 있거든요.”
“뭐? 무슨 정보?”
“아직 그것까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명확하게 확인되면 보고하겠습니다.”
“야! 장 계장. 이젠 나한테까지 숨기는 거야? 피아 식별 못 해? 응?”
구 차장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거기에 비례해 얼굴은 계속 붉어졌다.
저러다가 터지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숨긴다니요! 제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확실한 정보만 드리고 싶어서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뿐입니다.”
장춘자 계장은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구 차장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총장님한테 대판 깨지고 오는 길이야! 범정 수사관은 기밀이 생명인 거 몰라? 신분 노출이라도 됐으면 어쩌려고……. 좌우지간 한 번 더 사고 치면 이젠 국물도 없어! 알겠어?”
“알겠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장춘자 계장은 그렇게 말하며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네! 조, 조심하겠습니다!”
나도 일단 크게 외쳤다.
“알았으니까 자네는 목소리 좀 낮춰.”
구 차장 말에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면 이제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장춘자 계장이 넉살 좋게 물었다.
아무래도 장춘자 계장과 구 차장 사이는 보통의 상하관계와는 조금 다른 듯했다.
“나가 봐. 나가 보는데, 가서 정보 좀 물어와.”
구 차장이 말했다.
“무슨 정보 말입니까?”
장춘자 계장의 물음에 구 차장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요즘 여의도로 불법 자금이 들어간다는 소문이 돌아. 소문이 사실인지, 사실이면 누가 실탄을 쏘아대는 건지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장춘자 계장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구 차장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때 구 차장 비서로 있는 여자가 장춘자 계장을 불렀다.
여자의 이름은 이도연.
처음 여기 왔을 때 이름표를 보고 기억해 두고 있었다.
“계장님.”
“응? 무슨 일이지?”
장춘자 계장이 이도연에게 물었다.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이도연은 그렇게 말하며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형식적인 건데요…… 앞으로 안전하게 수사하겠다는 일종의 확약서 같은 겁니다.”
이도연은 조심스레 말했다.
말이 좋아서 확약서지 시말서나 다름없다는 걸 나는 바로 깨달았다.
그런데 장춘자 계장은 의외로 순순히 사인했다.
그러고는 이도연을 향해 말했다.
“차장님께 전해줘. 이런 데 한두 번 사인한 게 아니라고. 하하.”
나는 혼자 웃으며 나가버린 장춘자 계장을 대신해 이도연에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향했다.
“크게 혼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았네요.”
나는 장춘자 계장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차장님은 소심해서 그렇지 확실한 우리 편이니까.”
“우리 편이라는 건…….”
“정의의 편이라고 할까?”
장춘자 계장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면 정의의 편인 우리는 이제 뭘 하면 됩니까?”
내가 물었다.
“차장님이 지시했잖아. 여의도로 돈 들어오는지 알아보라고. 그러니 가야지.”
“그러니까 어디로?”
“세탁소.”
“세탁소요?”
그곳은 정말로 세탁소 간판을 달고 있었다.
<금일 세탁소>
나는 그 간판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금일 세탁소는 프랜차이즈도 아니었고 그야말로 오래된, 유물이 나올 것만 같은 외관을 한 옛날 세탁소였다.
을지로 뒷골목에 이런 세탁소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어서 들어가자고.”
장춘자 계장이 말했다.
“여긴 또 뭐 하는 곳입니까?”
내가 물었다.
“보면 몰라? 세탁소잖아!”
“안 믿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장춘자 계장 뒤를 따라 금일 세탁소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봐도 세탁소이기는 했다.
늙은 남자가 우리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했다.
그는 한 손에 낡은 다리미를 들고 있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장춘자 계장은 그 남자에게 인사한 후 천장에 걸린 옷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침이 없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나는 뒤를 따르며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진짜 세탁소.”
세탁소는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넓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많은 공간이 나왔다.
장춘자 계장은 그중 제일 끝에 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연히 나도 따라 들어갔다.
내 눈앞에 나타난 건 지하로 이어지는 긴 계단이었다.
“지하라니 영 기분이 안 좋은데요.”
내가 말했다.
“어제 일은 잊으라고.”
“아시지 않습니까? 전 영영 못 잊는다는 거.”
내가 대답하거나 말거나 장춘자 계장은 휘파람까지 불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무척 신난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잠시 후 밝혀졌다.
지하에 내려선 순간,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그곳은 신기하다는 말로는 다 설명하기 힘든 공간이었다.
지하인데도 대낮처럼 밝은 건 그렇다 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건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그것도 모두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마치 은행 창구처럼 생긴 공간에 앉아 있었다.
화면에 번호가 뜰 때마다 대기석에 앉은 사람들이 창구 앞으로 갔다.
말 그대로 은행과 같은 광경이었다.
“여, 여긴 대체 뭡니까?”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누군가는 여길 세탁소라 부르고, 누군가는 지하 은행이라고도 부르지.”
장춘자 계장이 대답했다.
“지하 은행이요?”
“말 그대로야. 딱 봐도 은행이잖아.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여기 들어오는 건 온갖 불법적인 일을 통해서 벌어들인 돈이라는 거지. 이른바 블랙 머니. 그런 돈이 여기를 통해서 지상으로 나가면 깨끗하게 세탁돼 유통되는 거야.”
“불법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규모로 버젓이 존재한다고요?”
“이게 현실인 걸 어쩌겠어. 우리나라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 중 이곳을 이용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걸? 그러니까 아직도 존재하는 거야.”
“신기하네요. 아니, 기가 차네요. 을지로 지하에 이런 곳이 있다니.”
“나랑 다니면 더 신기한 걸 많이 보게 될 거야.”
“사양하고 싶습니다. 이 정도로도 충분하거든요. 그나저나 여긴 왜 온 겁니까?”
“정치인에게 자금을 대려면 불법이되 깨끗한 돈이어야 해. 그러니 반드시 여길 거칠 수밖에 없지.”
“여기서 한 번 세탁한 다음 불법 정치 자금을 댄다는 거죠?”
“맞아. 그런 일이 있는지 여기 책임자를 만나 보자고.”
장춘자 계장은 그렇게 말한 뒤 거침없이 창구로 다가갔다.
그러자 경비로 보이는 덩치가 장춘자 계장을 막아섰다.
“차례를 기다리시죠.”
덩치가 말했다.
“아! 나는 금고지기를 만나러 왔어. 무전기로 전해. 춘자가 왔다고.”
덩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돌아서서는 무전기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러더니 곧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장춘자 계장과 나는 창구를 지나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늘어선 책상 사이를 지나 계속 들어가니 사무실 하나가 나왔다.
아무런 명패도 달리지 않은 그곳으로 장춘자 계장이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하하.”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키가 작은 남자였다.
잘 빗어넘긴 머리카락과 빨간색 나비넥타이, 그리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재킷이 남자와 잘 어울렸다.
“오랜만이네. 여전히 멋지군.”
장춘자 계장의 말에 남자는 씩 웃었다.
“앉으시죠. 같이 오신 분도 검찰 수사관?”
그가 내게 물었다.
“네. 신기탄입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한 후 장춘자 계장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
장춘자 계장은 나를 보며 남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은행의 금고지기야. 보통 박 주사라고 부르지.”
“아! 네. 반갑습니다.”
나는 박 주사를 향해 새삼 인사를 건넸다.
“저도 반가워요. 그런데 계장님께서는 연락도 없이 어쩐 일로 오셨을까요?”
박 주사가 물었다.
우리를 딱기 경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이런 곳에서 일하는 걸 보면 배짱이 보통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뭐든 말씀하시죠.”
“최근에 실탄 많이 준비해 간 경우가 있을까?”
“많이 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지…….”
“여의도 금배지들이 군침은 흘리는데 먹고 탈 나지는 않을 정도.”
“음. 그 정도라면 짚이는 데가 있네요.”
“그래? 어디야?”
“근데…… 이게 또 고객 정보라서……. 하하.”
박 주사는 슬슬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묻고 싶군. 그 고객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우리 쪽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가? 응, 어때?”
장춘자 계장은 협박처럼 들리지 않게 협박을 잘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협박은 대부분 통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 뭔가 오해가 있으셨네. 고객 정보라서 중요하긴 한데 계장님껜 오픈한다 이거였죠. 하하.”
박 주사는 대번에 태도를 바꿨다.
“그렇게 해주면 나야 정말 고맙고.”
장춘자 계장은 웃으며 말했다.
“사실 리얼엔터에서 딱 그만큼을 세탁해 갔어요.”
박 주사가 말했다.
“리얼엔터? 형우그룹 계열사?”
장춘자 계장이 확인하듯 묻자 박 주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급하다고 재촉하기에 짜증이 좀 났죠.”
“그게 며칠 전이었지?”
“딱 일주일 됐네요.”
“오케이. 고마워.”
장춘자 계장은 지체하지 않고 일어났다.
“차라도 한 잔 드시면 좋을 텐데.”
박 주사가 말했다.
“다음에.”
그 말과 함께 장춘자 계장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감사합니다.”
나는 박 주사에게 인사한 후 돌아섰다.
그때였다.
“신기탄 수사관님이라고 했죠?”
박 주사가 부르는 바람에 나는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네.”
“우리 계장님이 다른 사람도 다 데리고 오고 정말 신기하네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박 주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정말 신기했습니다. 이곳.”
나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향했다.
장춘자 계장은 저만치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를 따라잡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리얼엔터라는 곳에 찾아가실 거죠?”
“아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이번에는 노래방에 갈 거야.”
“네? 그건 또 무슨…….”
세탁소에서 노래방까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장소 변경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거긴 뭐가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마녀.”
장춘자 계장은 짧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