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처럼 굳어있던 가난 앞에서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우리 집은 어릴 적부터 가난했다.
정확히 말하면, 돈이 없었고, 그래서 부모님은 자주 싸웠다.
싸움은 욕설로, 물건 깨지는 소리로, 아주 가끔은 경찰차로 끝났다.
나는 그게 싫었다.
돈보다, 싸움이.
빈 통장보다 더 무서운 건 집안의 공기였다.
숨을 참게 만드는, 차가운 공기.
어린 나는 자주 도망쳤다.
옷장 안으로, 이불 속으로, 때로는 집 밖으로.
가끔 생각한다.
우리 집이 가난해서 불행했던 걸까.
아니면 불행해서 가난했던 걸까.
전후 관계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돈’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숨이 막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났다.
처음 받아본 월급은 72만 원.
그 돈으로 피자스쿨을 벗어나 도미노 피자를 시켰다.
작은 방에 앉아, 치즈가 쭉 늘어나는 피자를 한 조각 삼키며 생각했다.
“그래, 이런 것도 사람이 사는 거지.”
돈을 많이 벌진 못했지만,
그동안 참았던 걸 하나씩 해보았다.
어릴 땐 누군가 허락해야만 가능했던 것들을,
이젠 내 손으로 직접 할 수 있었다.
도미노 피자를 시키고, 스타벅스에서 톨 사이즈를 고르고, 기타를 배우고, 시나리오 학원에 등록했다.
그게 어른이 되는 일이라 믿었다.
모은 돈은 모래처럼 빠져나갔지만,
엄마 옆에서 사탕 하나에 숨만 꼴깍이던 애는 사라지고,
스스로 벌고 쓸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갔다.
그게 꽤 자랑스러웠다.
스무 살 이후로, 나는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는 어른이 되고자 했다.
6개월에 한 번, 30만 원짜리 펌을 했고
고심 끝에 월급 절반을 탈탈 털어 다이슨을 샀다.
작은 사치들이 나를 살렸다.
어린애 사탕 하나까지 때려가며 아껴봤자,
가난은 어차피 못 벗어난다는 걸 부모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난은 신분 같았다.
천민이라 낙인찍힌 순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양반 행세를 하긴 어려웠다.
그들과 같은 수입을 얻기도, 품위를 가지기도.
그래서 나는 자유로운 노비가 되고 싶었다.
춤도 추고, 엿도 사 먹는.
그래서 나는 자유로운 노비가 되고 싶었다.
누구 눈치도 안 보고, 세일 아닌 옷을 사보는 것.
엿을 사 먹듯 돈을 쓰는 자유.
그렇게 20대를 먹고, 쓰고, 벌며 탕진했다.
조금 더 나를 변호하자면,
나는 그동안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 돈을 썼다.
몇 년간 독립해 살며 생활비를 내고,
원하는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돈을 쌓기 시작했다.
내 삶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맞닿을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돈은 늘 나 하나의 몫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게 둘의 몫이 되는 순간이 왔다. 결혼.
그 안에는 식장, 집, 여행, 아이까지
무수한 금액표가 붙어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돈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결혼은 체념이자 결심이었다.
내 소비가 나 하나의 이야기를 넘어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전엔 나를 위해 펌을 했고, 다이슨을 샀고, 피자를 시켰지만
이제는 누군가와 지출을 관리해야 했다.
예전엔 1인 사업자였다면,
이제는 ‘남편’이라는 공동 대표가 생긴 셈이었다.
서로 다른 소비 습관을 받아들이고,
하나의 목표로 조율해나가는 일.
아이는 언제쯤 낳을까.
집은 어디로 가야 할까.
저축은 몇 퍼센트를 감당할 수 있을까.
돈은 이제 더 이상 나를 표현하는 언어가 아니라,
삶을 지속시키는 장치가 되었다.
그토록 멀리하고 싶던 ‘돈’이,
이제는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 되었다.
그리고, 싸움 끝에 손을 놓지 않던 부모님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