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에서

장범준-노래방에서

by 이지은

단편소설- 노래방에서


고영은 예고 없이 문예창작 수업에 나타났다.

2학년 2학기, 낯익은 얼굴들로 가득한 강의실에 처음 보는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은 어쩐지 낯설었다.


마흔 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학과는 곧 ‘고영’이라는 이름으로 술렁였다.

예쁜 외모 때문인지 누군가는 그녀가 항공서비스과 복수전공생이라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편입생이라고 했다.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소문은 언제부턴가 살며시 번져갔다.

생채기 위에 올라온 물집처럼.


창가 쪽 자리에 앉은 그녀를 향해 몇몇 선배들의 시선이 조심스레 기울었다.

나는 그 시선들이 불편했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시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느릿하게 흔들렸다.


고영은 늘 혼자였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어울렸다.

쉬는 시간마다 이어폰 한쪽만 꽂은 채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고영이 최근 읽고 있는 책은 ‘표백’이었다.


책상 아래로 길게 뻗은 다리, 리듬 없이 까딱이는 흰 운동화, 곱슬거리는 단발머리 아래로 조용히 감긴 눈동자.

책장을 넘기다 멈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햇살에 닿은 옆얼굴은 유리처럼 맑고 날카로웠다.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어딘가 빛을 발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름 하나밖에 모르는 그 사람을 자꾸만 눈으로 좇았다.



고영은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필기구는 가지런했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손목에 낡은 전자시계조차도 그녀만의 조용한 우주를 이루는 한 조각 같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습관, 제목을 적는 펜 색, 펜을 바꾸는 타이밍까지—

나는 어느새 그녀의 자잘한 패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관심이라기보단, 반복된 관찰에 가까웠다.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장면들이 저장되었다.

고영은 입술을 다문 채로 미소 지었다.

그건 마치 나만 아는 농담 같았다.


수업 시간마다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얼굴, 가장 오래 바라보게 되는 사람.

그게 늘, 고영이었다.



어느 날, 교수님은 함민복 시인의 시를 칠판에 적었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한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묘하게 마음에 닿는 시였다.

필기하려던 순간, 옆자리 고영의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한 줄 맞춤, 곧고 또렷한 글씨, 펜을 따라가는 손끝이 유난히 고르고 단정했다.


그 순간, 하나의 문장이 조용히 마음속에 내려앉았다.

‘말랑말랑한 힘’.

고영의 고요한 눈빛과 겹쳐졌다.

단단하지 않지만 꺾이지 않는,

고요하지만 묘하게 흔들리는 그런 사람.



쉬는 시간, 고영은 창가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이어폰 한쪽만 꽂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이젠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나얼의 「귀로」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장면을 오래 바라봤다.

그녀가 눈을 뜨는 순간, 그 공기가 사라질까 봐.


그날 이후, 나는 노래방에 가면 늘 「귀로」를 불렀다.

솔직히 꽤 연습도 했다.

언젠가 그녀 앞에서 한 번쯤은 부르고 싶었다.



학기 말, 고영이 우리 과로 전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멍하니 창밖만 바라봤다.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아니면 멀어질까.

가슴 한구석이 조용히 흔들렸다.


금요일 오후, 과대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지금 다 같이 노래방인데, 지훈아 너도 올래? 고영도 같이 있어…”


“우리 과 가수는 뭐니 뭐니 해도 정지훈이지.”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말에 나는 리모컨을 받았다.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귀로』.


전주가 흘러나오고, 마이크를 쥔 손이 조금 떨렸다.

고영이 듣고 있을까. 나를 알아보긴 했을까.

그녀의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노래방에서 돌아온 밤, 나는 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니, 목이 조금 뜨거워졌다.



그 후로, 우리는 자주 마주쳤다.

복도, 편의점, 구내식당.

서로 목례로 스쳤다.


나는 여전히 멀찍이서 바라보았고,

그녀는 여전히 조용했다.

내 시선이 닿을 때면, 아주 잠깐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 있었다.

그게 착각인지 아닌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고영이 정문 쪽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심장이 갑자기 빨라졌다.

나는 무심한 척, 방향을 틀어 그녀와 마주쳤다.


“안녕.“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고 떨렸다.


고영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얼마 후, 그녀가 타과 남학생과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나보다 훨씬 크고, 까무잡잡한 사람이었다.


그 소문을 들은 뒤, 나는 그녀를 피하게 되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고르던 중, 모자와 마스크를 쓴 여자의 눈썹 선이 익숙했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려던 찰나, 누군가 조심스레 내 등을 건드렸다.


모자와 마스크를 벗자, 익숙한 이마선과 눈썹이 드러났다.

조금 자란 머리칼, 편안한 옷차림.

고영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살짝 웃으며 그녀가 먼저 인사했다.


“혹시… 시간 괜찮으면, 저랑 노래방 가실래요?”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말문이 잠시 막혔다.


“…어?”


고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귀로 불렀던 거 기억나요. 저 그 노래 좋아해요.“



우리는 함께 노래방으로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콘크리트 위러 늘어지듯, 떨림이 길게 이어졌다.


책자를 넘기고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마이크를 쥔 손끝이 약간 떨렸다.

고음에서 조금 갈라졌지만, 후회는 없었다.


노래가 끝나자, 고영이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떨려요? 나도 그래요.“


그 말이 질문인지, 고백인지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나왔을 땐 바람에 섞인 아카시아 향이 코끝을 스쳤다.



늦은 새벽, 방 안은 조용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바닥을 길게 흘렀다.

나는 조용히 흥얼거렸다.


“이젠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노랫말이 천천히 공기와 섞이며,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창문 밖 바람에 실려 온 아카시아 향이 방 안을 조용히 감싸 안았다. 그 향은 그녀의 숨결처럼, 오래도록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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