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만나요

아이유 -금요일에 만나요

by 이지은


재혁과의 소개팅은 봄 한가운데, 오후 다섯 시였다.

회사 선배가 반쯤 밀어 넣은 자리였다.


솔직히,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에 지쳐 있었고,

애쓰는 내 모습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너 혼자 영화 그만 좀 봐.”


선배의 반 협박 섞인 말에 마지못해 나갔지만,

그를 마주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네이비 니트에 연청바지, 단정하게 접힌 바짓단, 검은색 반스 운동화.

과하지 않은 꾸밈 속에 세심함이 묻어났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흙내음이 깊게 퍼졌다.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향을 따라갔다.

모르는 사이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저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


익숙한 인사였지만,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던 순간만은 오래 기억됐다.


카페에서 메뉴를 고르던 그가 물었다.


“혈액형이 어떻게 되세요?”

뜻밖의 질문에 웃음이 터졌다.

“요즘은 MBTI가 대세 아니에요?”

그는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줄 이어폰을 끼고, 도어락 대신 열쇠를 쓴다고 했다.

광고회사에 다닌다 했고,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며 일본에서 사온 도시락통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은 그거 모으는 재미로 살아요.”

“이상하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귀여운데요.”

말하고 나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조용히 웃었고, 나도 미소를 지었다.


그날 밤, 누워서 알았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모든 게 조금 달라졌다는 걸.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괜찮은 하루였고, 아니, 아주 괜찮은 시작이었다.


‘잘 들어가셨어요?’

메시지를 보내려다 망설였다.

결국 잠에 들려던 찰나, 그의 톡이 도착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엔 제가 밥 살게요 :)”


심장이 두 번쯤 뛰고 나서야 답장을 보냈다.

‘다음’이라는 말에 마음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말투와 표정까지 떠올렸다.


연락은 꾸준히 이어졌다.

‘오늘 도시락에 깻잎 쌌어요.’


별거 아닌 대화에도 하루가 환해졌다.

그와의 대화는 매일 조금씩 나를 움직였다.


수요일쯤, 그가 물었다.

‘이번 주말, 시간 괜찮으세요?’


주말엔 이미 약속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금요일을 제안했다.

‘금요일은 어때요?’


답장은 금세 왔다.

“좋아요. 금요일이 더 좋네요 :)”


그 말이 좋았다.

그날 이후 금요일은 평범한 주말 전날이 아니었다.

거울 앞에 오래 머물며, 조금 더 다듬고 싶어지는 그런 날이 되었다.


흐린 하늘 아래, 여의도 한강공원.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마치 같은 방향에서 걸어온 사람들처럼.


그는 에코백에서 작은 보냉가방을 꺼냈다.

유부초밥 도시락과 복숭아빛 매실차가 담긴 텀블러였다.

뚜껑을 열며 말했다.


“이 도시락통, 후쿠오카에서 샀어요. 두 번째로 마음에 드는 거예요.”


“그럼 제일은요?”


“그건… 여자친구 생기면 쓰려고요.”


나는 말했다.

“그럼 저 주세요.”


그가 웃었다. 나도 웃었지만, 속마음이 튀어나온 것 같아 마음이 어수선했다.


도시락을 먹는 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어색하지 않았다.

참기름 냄새,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칼, 천천히 흐르는 시간.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좋았다.


발이 미끄러질 뻔한 찰나, 그의 손이 내 손목을 감쌌다.

“손이 차네요.”

나는 조용히 손을 빼지 않았다.


말없이 함께 걷는 그 시간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금요일만 기다렸어요.”


평범한 말이었지만, 그가 말하니 다르게 들렸다.

그와 함께여서.


그날 이후, 카톡 알림이 울릴 때마다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오늘은 도시락 안 쌌어요.’

‘오늘은 좀 춥네요. 따뜻하게 입고 나와요.’


그 말들이 고백 같았다.

하지만 고백은 오지 않았다.


세 번째 약속은 일요일 저녁.

작은 영화관, 그리고 후암동 한적한 골목 술집.

마가리타 두 잔. 잔 가장자리를 감싼 소금이 반짝였다.


“마가리타는 처음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저도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에요.”

나는 미소 지으며 잔을 들었다.


잔 가장자리를 감싼 소금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라임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재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눈빛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그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천천히 긁었다.

컵받침이 살짝 밀려났다.


“전에, 오래 사귄 사람이 있었거든요.”

말이 끊겼다.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가 떴다.


“결혼도 준비했는데… 사랑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는 걸, 그때 알았어요.”


정적이 흘렀다. 무언가 말할 듯한 숨소리만 남았다.


“그때 이후로, 누군가를 온전히 믿는 게 두려워졌어요.”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나도 모르게 방어막을 쳤나 봐요. 그게 습관처럼 남아서… 잘 안 사라지더라고요.”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잠깐, 손이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멈칫했다.


“그래서 지금도… 시작하는 게 무서워요. 다시 상처받을까 봐.”


말이 끝난 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술잔 옆으로 비친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죄송해요.”

그의 입술이 거의 닫힌 채로 움직였다.


나는 마가리타 잔을 들었다.

짠맛과 시큼함이 처음과 달랐다.


과거를 품은 사람과 시작할 수 있을까.

시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 경계에 서 있었다.


고백 아닌 고백 이후 연락을 끊은 건 오히려 재혁이었다.

그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나는 문제를 피하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화가 났다.


톡 알림이 울릴 때마다 기대와 실망이 반복됐다.

오월의 봄은 깊어졌고, 매일 새로운 꽃이 피어났다.

도시는 날마다 새 페인트칠을 입은 놀이동산 같았다.


그가 말한 ‘작년 봄’이라는 시간은 내 머릿속 햇살과 겹쳤다.

아무 일 없던 봄이라 여겼던 계절이 누군가에겐 그렇게 끝나 있었구나.

잠시 숨이 막혔다.


그가 없는 일상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길,

카페에 혼자 앉아 유부초밥을 먹던 날도 있었다.

매실차는 시지 않았고, 그날 바람은 여전히 비슷했다.

그게 문제였다.

계속 같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금요일 아침,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매실차 가져갈게요.”


가슴이 흔들렸다.

단정하게 접힌 도시락 보자기처럼, 조심스러운 마음이 느껴졌다.


답장을 여러 번 썼다 지웠다 했다.

겨우 한 줄을 보냈다.



“응, 괜찮아요. 유부초밥, 또 먹고 싶었어요.”


그날 그는 여전히 향기롭고 단정했다.

그의 웃음에 이끌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고,

어쩐지 모른 채로 남기도 했다.

서두르지 않기로, 한 걸음씩.


한강 다리를 지나며 그가 말했다.

“그날 이후로, 제가 다가가도 괜찮을까 계속 고민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지은 씨가 없으니까

금요일이 지나가긴 하는데… 그냥 흘러가더라고요.”


나는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강물 건너편 유람선 불빛이 스르륵 흘러갔다.

멈춰 있던 금요일이,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만나는 금요일은 기다림이자 설렘이 되었다.

일주일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지고,

그와 함께하는 순간만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엔 여전히 불안이 있었다.

그가 꺼낸 과거의 그림자가

어쩐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서둘러서 상처 주는 건 아닐까.”

“내 마음이 그를 버텨줄 수 있을까.”


나는 내 마음을 다독이며 그를 조금씩 더 알아갔다.


조용한 저녁, 소소한 대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의 손길에, 목소리에

내 마음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다른 봄들과 달리, 이번 봄은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맞는 하루하루가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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