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니

윤종신

by 이지은

편의점에서 집어 든 미지근한 율무차가 식으면서 목구멍을 천천히 타고 흘렀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던 맛이었다. 질색하던 그 율무차.

‘왜 또 이걸 집었을까.’


삼겹살집에서 ‘오백원’이라 불리던 친구가 내뱉은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첫사랑은, 그냥 첫사랑으로 남겨둬야 하는 거 아니냐?”

입이 가벼운 친구는 굳이 혜란 얘기를 꺼냈다.

새로 사귄 남자친구가 증권사 다닌다, 잠실에 집이 있다더라—

듣는 것마다 속이 뒤틀렸다.


머리가 지끈거려 고깃집을 나왔다.

밤공기 속에서 말보로 레드를 꺼내 물었다.

그녀는 담배 냄새를 몹시 싫어했다.

찡그린 얼굴로 “또 피웠지?” 하던 그 표정이 지금도 선하다.


그녀의 새 애인은 담배를 피우지 않을까.

그 긴 시간, 혜란은 어떤 사람을 만났을까.



우리는 서로 좋아했지만, 연애라 부르기 전 그녀는 유학길에 올랐다.


인천공항 출국장 앞에서,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져 가던 날,

처음 가본 공항 한복판에서 엉엉 울었다. 콧물까지 훌쩍이며.


거의 십 년이 지난 겨울, ‘오백원’의 연락으로 열린 동창회에서 다시 만났다.


혜란은 베이지색 코트에 샤넬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고, 내년에 귀국할 거라 했다.

친구들은 ‘완전 귀티 난다’며 혀를 찼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른넷.

망원동 옥탑방에 사는 나와,

해외 대학 박사에 곧 돌아오는 혜란은 어쩐지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먼저 연락한 건 혜란이었다.


“밥 한 끼 먹자.”

짧은 말 한마디였지만, 나는 며칠을 그 말에 들떠 있었다.



봄,

혜란은 완전히 귀국했다며 다시 밥을 먹자 했다.

우린 이자카야에서 맥주를 마셨다.

양배추 절임과 야키토리를 사이에 두고, 가벼운 얘기를 주고받았다.


오래된 목제 의자에 앉은 혜란이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겉으론 착해 보였지만,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은 안다.

그 눈빛은 사냥 직전의 눈빛이었다.


“혹시, 지금… 여자친구 있어?”


짙은 조명 아래, 그녀는 입술을 살짝 적시며 웃었다.

나는 숨이 턱 막혔고, 온몸이 먼저 반응했다.


우리는 서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숨결처럼 얽힌 감정과 기억, 욕망과 여운이 공기 중에 퍼졌다.



그날 밤, 우리는 나란히 망원동 골목을 걸었다.

선선한 바람, 낡은 가로등, 여름 전의 밤 공기였다.


“택시 불러줄까?” 내가 물었고,

혜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네 집 가깝다며. 잠깐 앉았다 갈게.”



방은 좁고 오래됐지만, 그녀는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

미국은… 겨울이 너무 건조하더라.”


오랜 시간 미국에서 지낸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수척해 보였다.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 건넸다.

음악도 TV도 없었지만, 조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캔을 다 마시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캔 입구를 어루만졌다.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도 나를 보고 있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이 몸 안에서 천천히 꿈틀거렸다.

심장은 어지럽게 뛰었고, 한순간 모든 생각이 멎었다.

무너짐이 아니라, 아주 오래 멈춰 있던 시간의 재생 버튼을 누른 듯한 시작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잠들지 않았다.

그저 같은 침대에 누워,

서로 스쳐가는 손과 눈빛,

천천히 겹쳐지는 숨결 속에서

조용히, 한 계절을 열었다.



“이상하다. 그냥 자고 싶지가 않네.”

그녀가 말했다.


“그럼, 그냥 이렇게 누워 있자.”

내가 대답했다.


혜란은 잠시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6개월을 만났다.



사실, 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건 나였다.

혜란의 부모님이 나를 보자고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 찼다.


“부담 안 가져도 돼. 좋은 분들이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내 안의 알량한 자존심은 그 말을 거부했다.


“너무 이르지 않아? 우리 아직… 얼마 안 됐잖아.”

말을 뱉고 나서도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혜란은 조용히 웃었다. 눈가가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마주하지 못한 시선들이, 좁은 방 안을 서늘하게 휘돌았다.


그녀에게 내 상황을 전부 말할 순 없었다.


학자금 대출을 갚은 게 작년이었고,

모아둔 돈도 없었고,

결혼이란 말은 아직도 부담스러웠다.


말하자면, 도망친 쪽은 나였다.

이유는 많았다.

부모님, 형편, 미래, 결혼.



하루는 내 옥탑방에서 혜란이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박사까지 마친 그녀가 쪼그려 앉아 먼지를 쓸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낯설었다.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엔 ‘여기에 있어도 될까’ 하는 망설임이 어른거렸다.


혜란은 위스키를 홀짝였고, 나는 소주를 마셨다.

안주로 꺼낸 닭발을 보던 그녀가 “이거, 나 잘 못 먹는데…”라며 젓가락을 집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른다섯, 결혼은 아무래도 현실이었다.


정읍에 홀로 계신 어머니가 김장을 하고, 명절이 다가오면 고단한 일상이 반복될 이 풍경은 그녀에게 어쩌면 미국보다 더 낯설 것이다.


더구나 혜란의 부모님은 모두 대학교수였다.

두 집안의 차이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듯했다.


“나, 아직 준비 안 된 것 같아.”


그 말만 남기고 그날 이후 연락을 끊었다.

답장은 없었다.

혜란은 나보다 훨씬 어른이었다.



시간은 꽤 흘렀다.

처음 한두 달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술도 마시고, 일도 하고, 친구들도 만났다.

‘잘한 선택이야.’

자기 위안도 몇 번은 했다.


그러다 오백원이 말했던 남자 얘기가 떠올랐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던 중,


우연히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그녀의 사진이 떠올랐다.

노란 스탠드 불빛만 켜진 방에서, 내 무릎 위로 흘러내린 담요가 미지근했다.

손끝이 차가워질 때까지 화면을 눌렀다.

사랑에 물든 혜란의 모습은 예전보다 훨씬 예뻤다.


흰 셔츠, 부는 바람,

그녀 옆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

화면 속 팔 한쪽이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그 부드러움에, 나의 몇 년이 무너졌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 온몸이 경직되었다.



며칠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손가락은 멈췄다.

결국 다시 화면을 켰다.


그녀 옆에 기대 앉은 남자의 팔이, 무심하게 그녀 어깨에 닿아 있었다.

그 그림자에, 나는 쓸데없이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내가 찬 거였다.

내가 등을 돌린 거였다.

혜란은 아무 잘못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아플 줄은 몰랐다.



문득, 우리가 싸울 때 혜란이 날카롭게 소리치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혼자 감당하려 해.”

나는 배려라 생각했다.

그녀는 거리라 말했다.


어느 날, 그녀의 계정이 비공개로 바뀌었다.

팔로우는 그대로였지만, 더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제야 실감했다.

나는, 그녀의 삶에서 완전히 지워졌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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