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아버지 손에 들려온 통닭은
작고 바삭한 희망 같았다.
우리는 통닭 봉지를 보는 순간,
어미를 본 참새처럼 짹짹거리며 달려들었다.
기름냄새에 들뜬 우리와 달리,
그날의 아버지는 말수가 적었다.
한 손으로는 허리춤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통닭을 지켜 들고 계셨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통닭은 단순한 야식이 아니었다.
고단한 하루를 견뎌낸 사람만이 들 수 있는,
작은 위로의 증거였다.
서른이 된 지금,
직장생활은 ‘익숙한 괴로움’이라는 말로 정리된다.
참는 것이 업무의 절반이고,
나머지는 감정을 눌러 담으며 견디는 일이다.
하루에 열 번쯤은 웃고,
스무 번쯤은 무언가를 꾹꾹 삼킨다.
참지 않아도 될 말을 참고,
하지 않아야 할 웃음을 억지로 흘린다.
그렇게 하루를 넘기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에는
이름 붙이기 힘든 감정들이 질척하게 따라붙는다.
월급은 그런 인내의 대가다.
단순히 시간을 판 대가만은 아니다.
말하지 못한 울컥함,
무시당한 자존감,
돌아서서 터진 한숨 같은 것들—
그 모든 조각들이 숫자로 환산돼 계좌에 찍힌다.
어쩌면 우리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자신을 떼어내며 견디는 연습을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는 말은 부드럽지만,
실제로는 늘 날이 서 있다.
매일 얼굴을 바꿔가며 마주하는 사람들 중,
예의를 갖춘 이는 늘 소수다.
처음부터 반말을 내뱉는 사람,
상대가 사람이라는 걸 잊은 채 요구만 쏟아내는 사람,
설명도 듣지 않고 불쾌함부터 표출하는 사람.
그들의 감정은 내 책임이 아님에도
그 화살은 언제나 내 쪽을 향한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왜 내가 이 말을 들어야 하지?
분명히 내 잘못이 아닌데,
상처는 왜 항상 내 몫일까.
머리로는 안다.
‘그 사람의 감정은 그 사람의 몫’이라고.
하지만 감정은 늘 이성보다 느리게 반응한다.
참았던 말은 가시가 되어 목에 남고,
억지로 눌러 담은 감정은
밤이 되면 목소리를 얻는다.
어느 날은 사람이 싫어졌다.
누군가의 부탁에도 움츠러들었고,
어디선가 들리는 웃음소리에
나만 겉도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사람을 상대한다.
웃고, 사과하고, 설명하고, 이해하려 애쓴다.
그게 일이니까.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럴수록 문득 떠오른다.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
아무에게도 감정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무례한 사람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
감정이 닳지 않는 고요한 삶.
고양이와 소파에 기대 하루를 보내는 상상을 한다.
어디에도 가지 않아도 되는 삶.
불쾌한 상황에 웃지 않아도 되는 자유.
가끔은 나와 다른 출발선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부럽다.
물려받은 배경이든,
스스로 만든 능력이든,
그들은 ‘선택’이 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매일을 ‘버텨야만 하는 삶’으로 살아가는데,
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물론 안다.
누구의 삶도 완벽하진 않고,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것도.
그래도 꿈꾸고 싶다.
계획이 없어도 괜찮다.
단 하나,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삶’**이라는 문장만큼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
그게 꼭 백수가 아니어도 좋다.
하지만 지금처럼 감정과 자존감을
매일 조금씩 깎아가며 살아야만 하는 삶이라면,
가능한 오래는 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내가 바라는 건
지극히 단순한 것들일지도 모른다.
충분히 자고,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누구의 말에도 상처받지 않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삶.
그 소박한 평범함이
이토록 간절할 줄은 몰랐다.
우리는 왜,
서로에게 예의를 기대하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
그 질문이 입안에서 맴도는 어느 저녁,
나는 퇴근길 편의점에서 고양이 간식을 집어 든다.
아버지가 통닭을 들고 집에 돌아오셨듯,
나도 조용한 위로 하나를 들고 집으로 간다.
고양이는 나를 반긴다.
세상의 소음을 잠시 잊을 수 있는 방 안.
감정의 날을 세우지 않아도 되는 공간.
그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
이 조용한 하루가,
아주 오래 지속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