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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sta Seo Nov 10. 2019

오래된 도시로 떠난 여행

전북 정읍

사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은 구경이 목적인 여행에 비해 훨씬 더 생기를 준다. 생기 있는 ‘삶을 고양하기’ 위한 여행으로 니체는 두 종류의 여행을 말했다. 하나는 과거의 위대함을 숙고함으로써 힘을 얻고, 인간의 삶이 영광스러운 것임을 느낌으로써 영감을 얻게 되는 여행이다. 다른 하나는 속해있는 사회와 정체성이 과거에 의해서 형성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과정에서 연속성과 소속감을 확인하게 되는 여행이다.


왠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정읍으로의 여행이 내게는 니체가 말한 영감을 얻게 되고, 자아를 확인하게 되는 여행이었다. 그곳은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있는 유서 깊은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재생시키는 자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무성서원 앞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 9곳’이 한국에서는 14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한 사립교육 시설로 성리학의 가치를 쫓는 지식인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한국의 성리학 문화 전통을 나타내는 증거이자 당시  성리학을 보급하는 데 있어서 서원의 역할, 지역을 중심으로 학파를 만들어가는 역사적 과정에서 서원의 기능 등이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번에 등재된 서원은 소수서원(경북 영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영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돈암서원(충남 논산)과 전북 정읍에 있는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 강당

정읍에 있는 무성서원은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정읍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했다 떠난 후 그의 선정을 기려 주민들이 세운 생사당에서 유래되었다. 다른 서원과 달리 무성서원은 앞에 칠보천이라는 개울물이 흐르며 뒤에는 성황산을 등지고 자리한 배산임수형 위치이면서 마을의 중심에 있다. 신분의 차별 없이 모두에게 열린 학문의 공간이자 소통의 장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고,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 최익현 등을 중심으로 호남의병을 창의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사우로 들어가는 내삼문

일반적으로 서원의 입구 출입문으로 외삼문이 있다. 무성서원의 경우에는 1891년에 건립한 2층 누각의 현가루가 외삼문 대신에 출입구의 역할을 한다.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이름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에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의미이다. 서원은 제례를 지내는 사당인 사우와 강학 공간인 강당, 기숙사인 강수재, 서원 관리인이 거주하는 고직사 등의 건축물로 구성되어있다. 주변에는 각종 비석과 비각이 놓여있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들 앞에 서니 과거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시간 속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다.

무성서원 전경

무성서원에서 30km 거리에 한국 최고의 단풍을 자랑하는 내장산 국립공원이 있다. 몇 년 전 보았던 내장산 단풍의 풍경을 기억의 한편에서 꺼냈다. 하지만 올해는 따뜻하고 건조해서 단풍의 절정기가 예년에 비해 늦어졌다고 한다. 11월 중순에야 명성에 맞는 내장산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직 절정기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장산은 내장산이었다. 내장사를 향해 가는 단풍 터널 길을 걷는 내내 일종의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자연 속에서의 이런 경험을 ‘시간의 점(spot)’이라고 불렀다. 이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서, 이 힘으로 우리가 높이 있을 때에는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에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고 했다. 확실히 그랬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안에 있는 선(善)을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장산 단풍 풍경 1)

계절의 변화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 많은 녹색들은 조금씩 미세하게 변하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햇빛에 비친 나뭇잎들도 색의 변화에서 제각각 차이를 드러냈다. 녹색을 띤 황금빛, 붉은색을 띤 황금빛, 온통 시뻘건 붉은 색, 레몬 빛 노란색, 녹색과 합쳐진 붉은빛, 체리색 주황빛...


내 영혼에 이로운 감정을 위해서 오래도록 풍경 속에 있고 싶었다. 노란색, 붉은색 나뭇잎이 떠다니는 호수의 우화정에 자리를 잡았다. 화려하게 변신 중인 숲길을 바라보는데 불현듯 고흐가 생각났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사이프러스 나무의 선과 비례의 아름다움을 그렸던 것처럼 그가 내장산 단풍을 그렸다면 어떻게 그렸을까? 색의 대비로 내장산의 가을을 표현한다면 그는 어떤 색의 대조를 선택했을까? 눈을 감고 잠시 고흐가 되어 상상의 화폭에 가을 내장산을 그려 보았다.    

우화정
내장산 단풍 풍경 2)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연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내 안에 있는 나와 교감하니 살아오면서 그동안 습관적으로 길러진 안 좋은 감정들(노여움, 천박, 욕망 등)이 씻겨나가는 듯했다.       



▪ 무성서원: 전북 정읍시 칠보면 원촌 1길 44-12  063-539-5182


내장산 단풍 풍경 3)



http://bravo.etoday.co.kr/view/atc_view.php?varAtcId=1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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