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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sta Seo Oct 30. 2018

가을 남자를 사랑하는 법

2018년 가을 경북 김천시

 29살 민이에게는 내년 가을에 결혼하기로 약속한 남자 친구가 있다. 3년의 연애 기간을 통해 서로의 장단점과 양쪽 집안의 분위기까지 다 파악한 후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세상의 축복받을 일만 남은 예비부부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은 부분이지만 민이에게는 남들에게 말 못 하는 고민이 한 가지 있다.


 남자 친구가 소위 말하는 “가을 남자”인 것이다. 외모가 못 생긴 가을 남자가 아니라 가을만 되면 우울해지고, 감수성이 예민해지면서 무기력해지는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는 가을 남자이다. 그래서 지난 3년 동안에도 매년 10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민이는 남자 친구 때문에 피곤한 가을을 보내야 했다. 어떤 날은 외롭다고 옆에 있어 주길 바라고, 어떤 날은 고독한 존재라면서 혼자 있고 싶어 하기도 했다. 같은 상황에서도 그때그때 나타나는 감정의 폭 차이가 컸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증상은 가을 2개월 동안은 회사 출근 외에 어떠한 일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는 무기력 증상이었다. 사실 회사도 마지못해 나가는 것으로 보였다.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일조량 변화에 따른 호르몬 부족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논리도 있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우리 몸의 감정을 관장하는 폐가 움츠려 들어 감정을 제어하는데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한의학적 논리도 있었다. 음양오행설에 근거하여 천지의 기운 중 양의 기운이 쇠퇴해지면서 남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래도 민이에게 다소나마 위로가 되었던 점은 ‘가을을 심하게 타는 남자일수록 순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문장이었다.


 ‘세상에 날강도나 늑대 같은 남자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놈들에 비하면 그래도 순수한 내 남친이 백배 나은 거지 뭐! 최소한 살아가면서 내 피만 빨아먹거나 우리 엄마, 아빠한테 빨대 꽂는 파렴치한 행동은 안 할 거 아니야…… 그래도 결혼하기 전에 가을 남자 증상을 고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결혼은 현실이니까. 무기력하게 살면 안 되지…… 어떻게 하나?’ 이때부터 그녀의 남자 친구 ‘가을 남자 증상’을 고치기 위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올해도 여지없이 그녀의 남자 친구는 10월에 들어서자 가을 남자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민이의 고민도 깊어져 가던 10월 초 어느 날 그녀는 인터넷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8월에 추천하는 걷기 여행길에 김천시의 인현왕후 길이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폐위된 인현왕후가 머물면서 기도하며 복귀를 꿈꾸었던 청암사가 있는 수도산을 중심으로 조성된 9km의 산책로가 남녀노소 누구나 걸을 수 있는 평탄한 지형과 고즈넉한 분위기의 길로 소개되어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인현왕후 길’이라는 단어가 민이의 두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생각했다.

 ‘인현왕후가 나중에 복위한 걸 보면 이 동네 기도빨이 장난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이고, 가을 햇살을 많이 받을 수 있으니까 호르몬 분비 등에도 좋을 것이고, 9km를 걸으면 운동이 되니까 폐도 활발하게 활동할 거구…… 괜찮은데! 여기 한번 데리고 가볼까……’ 그 자리에서 그녀는 김천 시청 홈페이지의 문화관광 페이지로 들어가 남자 친구의 ‘가을 남자 병’을 고치기 위한 여행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짜면서 그녀는 김천시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좋은 여행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사실에 놀랬다.


 아침 06:35 서울역에서 KTX 107호를 타고 민이와 그녀의 남자 친구는 김천으로 출발했다. 아침 8시가 되기도 전에 김천에 도착한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제일 먼저 수도산에 있는 수도암으로 갔다.


 수도암 앞에 도착해 내리니 울창한 숲에서 나오는 청량한 아침의 녹색 공기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쌓였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수도암은 김천과 거창의 경계에 솟은 1,317m의 비교적 높은 수도산의 품 안에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년)에 창건된 천년고찰인 이곳은 신라 말기에는 수행을 하는 곳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상쾌한 공기를 맘껏 들이마시며 경내를 둘러보다 우연히 마주치게 된 스님께서 전망 좋은 바위가 있는 곳을 가리켜 주었다. 그 바위를 찾아 숲 속 길을 걸을 때 일부러 소리 나게 낙엽을 밟아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들어 보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은 눈이 부셨다. 바위 위에서 내려 다 본 자연은 온통 가을의 물결이었다. 가슴이 터질 거 같은 벅차 오름이 그녀의 안에서부터 용솟음쳤다.

 “어때?” 막 물에서 나온 듯한 풋풋한 얼굴로 민이는 남자 친구의 기분을 물었다.

 “좋네. 상쾌하고, 무엇보다 싱그러운 기운이 내 안으로 막 들어오는 거 같아…… 아~ 이 아침 햇살 투명한 병에 담아 간직하고 싶다. 나중에 우리 민이 지치거나 힘들 때 보여주면 좋은데……”


 ‘헉! 이 무슨 기름 멘트. 이거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약발 먹히는 거 아니야?’

수도산 품에 안겨있는 듯한 수도암
가을 수도암 풍경
보물 제296호 수도암 석조보살좌상 / 대석광전 앞 삼층석탑 (멀리 가야산 상왕봉이 보인다)
수도암 뒤 숲 속 아침 가을 햇살

 수도암을 나오기 전 대적광전 앞에 있는 삼층 석탑의 뒤로 보이는 가야산 상왕봉을 보면서 민이는 생각했다. ‘이곳에서 수행을 하고 기도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여기 보통 상서로운 곳이 아니네!’


 수도암에서 조금 걸어 내려와 인현왕후길로 들어섰다.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강등되었을 때 3년간 머물며 복위를 기원했던 곳이 조금 전 갔던 수도암 위쪽에 있는 청암사였다. 청암사 역시 신라시대에 창건한 천년고찰로 비구니 스님들이 수학을 하고 있다. 인현왕후길은 왕후의 역사적 흔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울창한 숲 속 길이다.

 적당하게 좁은 길에 쌓인 낙엽을 밟을 때의 바스락 거림이 인적 드문 산길이어서 걸을 때 더욱 좋았다. 울창한 숲 속 길은 조용히 사색을 하면서 힐링을 하기에 알맞은 최고의 길이었다. 힘들지 않은 평탄한 길이지만 남자 친구를 위하여 민이는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남자 친구가 많은 사색을 하며 자기를 찾아가는 시간을 충분히 만들어 주고 싶었다. 평탄하지만 구불구불한 길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녀는 이 길을 걸으면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모든 혜택을 다 받는 것만 같은 행복에 빠져들었다. 옆에서 바라본 남자 친구의 얼굴도 생동감이 있어 보였다.


 민이는 생각했다. ‘이래서 사람은 계절의 변화를 자연을 통해서 몸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구나’

 산길을 걷다 보니 중간에 흰색 그네가 덩그러니 나타났다. 두 사람은 그네에 앉아 준비해 간 따뜻한 커피를 함께 마셨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갈색 나뭇잎들 사이로 파란 가을 하늘이 언뜻언뜻 보였다. 가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고즈넉한 숲 속에서 어떤 제약이나 방해도 없이 두 사람은 가을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길이 끝나갈 즈음에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얕은 물이 흐르기도 했다. 물이 흐르는 계곡 옆으로 붉은색 단풍과 노란색 나뭇잎들이 지나가는 가을을 잡으려는 듯 가을바람에 떨고 있었다.

인현왕후 길 풍경들

 수도계곡 옆 도로로 내려와 콜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탄 두 사람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지레면에 있는 지례흑돼지 식당 거리로 갔다. 지례흑돼지의 원산지에서 맛본 돼지고기는 원조의 풍미가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었다. 특히, 연탄불과 석쇠에서 구워 낸 흑돼지 양념불고기의 쫀득하고 고소한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지례흑돼지 양념불고기 구우는 장면 / 식당에 붙어있는 지례흑돼지 소개문

 점심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경상북도 서북부 지역에 용수 공급을 위하여 다목적 댐으로 건설된 부항댐으로 갔다. 민이가 이곳을 일정에 포함시킨 이유는 짚와이어와 스카이워크라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극단적 체험을 통해서 남자 친구가 의욕적인 생활 자세를 가지고 감성적인 부분을 줄여주었으면 하는 그녀의 바람이 깃든 일정이었다.


 먼저 물문화관으로 갔다. 물문화관에는 댐에 대한 이야기와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곳 전망대에 올라가면 아름다운 부항호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가 있었다. 댐 주변은 생태공원과 테마공원, 캠핑장 등이 조성되어 종합 테마 관광단지로 발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문화관 전망대에서 바라 본 부항댐 전경/    레인보우 탑 (93m)

 국내 최고 높이로 댐 양쪽에 만들어진 타워의 높이는 93m와 88m이며, 짚와이어의 왕복 거리는 1.7km로 국내 최장 거리이다. 93m의 탑에서 백두대간 줄기를 바라보며 타는 짚와이어는 스릴과 함께 시원한 성취감을 준다고 한다.


 스카이워크는 93m 높이의 전망대에서 42.3m의 전망대 둘레를 안전줄에 의지한 채 허공을 걷는 체험이다. 민이는 약간의 고소공포증 때문에 두 가지 다 도전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남자 친구는 두 가지에 다 도전하였다. 체험을 마치고 타워에서 내려온 민이의 남자 친구는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본인이 해낸 결과에 상당히 만족한 듯한 모습이었다. 주먹을 쥐고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그래, 이제 아무리 가을이 와도 지금 그 모습으로만 살자. 제발 세상 근심 혼자 다 안은 것처럼 분위기 잡지 말고……’ 마음 속으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짚와이어 타는 장면과 스카이워크 장면

 두 사람은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길이 256m로 국내 최장 거리의 출렁다리를 걸었다. 다리 중간에서 민이의 남자 친구는 다리를 출렁거리게 하려고 일부러 발을 구르기도 하였다. 그 모습을 본 그녀의 얼굴에 알 듯 모를 듯가벼운 웃음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댐 수면 위에서 바라본 가을의 댐 풍경이 아름다웠다.

국내 최장 길이 출렁다리 모습
부항댐 출렁다리/   가을날의 출렁다리 데크

 데크 위에 떨어진 낙엽이 가을의 우수 분위기를 깊게 해주는 10월이다. 하지만 민이의 남자 친구는 이제 더 이상 에고(Ego)에 빠진 감성주의자가 아니다. 감성과 이성이 조화롭게 균형을 잡은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이 되었다. 애벌레가 성충이 되듯 민이의 남자 친구는 이번 가을에 껍데기를 벗고 성숙한 인간이 된 가을 여행을 한 것이다. 사랑은 민이처럼.




◆    김천시                                            www.gimcheon.go.kr

◆    수도암       증산면 수도길 1438        T. 054) 437-0700

◆    백산가든   지례면 장터길 82             T. 054) 430-2252

◆    부항댐물문화관  지례면 부항로 195  T. 054) 420-2635

◆    레인보우짚와이어& 출렁다리   부항댐길 352   T. 054) 439-5030   www.rainbowzi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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