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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sta Seo Nov 16. 2018

은수의 가을 소나타

영동군 송호관광지, 양산팔경, 반야사, 한천팔경

 “투두둑, 투두둑…”

 드디어 은수가 들고 있는 우산에 빗방울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른 아침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회색으로 잔뜩 찌푸려있던 하늘은 은수가 이곳 충북 영동군 송호리에 도착해서야 기다렸다는 듯이 가을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수령 300~400년 된 고송(古松)이 집단으로 어우러져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곳에 비마저 내리니 소나무의 향이 더욱더 짙게만 느껴졌다. 소나무 밑에는 텐트를 설치할 수도 있다. 그 풍경을 본 은수는 텐트 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을이 되면서 호젓하게 여행을 가고 싶었다. 이국적이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여행보다는 낯설지 않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마음이 그렇다 보니 살아오면서 잊고 지내온 시간과 인연들이 자꾸 떠올랐다. 그렇게 시월 한 달을 보내고 난 후 십일월이 되어서야 은수는 겨우 집을 떠날 수 있었다. 늦은 가을날 집에서 나온 은수가 간 곳은 어렸을 때 짧은 추억과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시간을 담고 있는 충북 영동군이었다. 그리고, 그 여행의 첫 도착지가 지금 은수가 소나무 향에 취해 있는 ‘송호관광지’인 것이다.

충북 영동군 송호 관광지 송림

 

#1.

 ‘송호관광지’는 284,000㎡ 규모의 부지에 소나무가 1만여 그루나 자라고 있으며, 캐러밴, 취사장, 산책로, 물놀이장 등이 갖춰진 금강 변의 관광지이다. 영동군에서 산수의 어우러짐이 가장 아름다운 8곳을 “양산팔경”이라 하는데, 그중 금강 상류 줄기를 따라 ‘2경 강선대’ ‘4경 봉황대’ ‘5경 함벽정’ ‘6경 여의정’ ‘8경 용암’의 5곳이 있다. 2017년 이 5곳과 ‘송호 관광지’를 묶어서 총 거리 6.0km의 “양산팔경 금강 둘레길”을 조성해 놓았다. 오염되지 않은 금강 변의 맑고 깨끗한 길이다.


 은수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바닥에 떨어진 갈색 낙엽, 노란 은행잎, 앙상한 나뭇가지들의 풍경이 을씨년스러운 늦가을의 정취를 더욱더 깊게 해주고 있었다. 강변에 놓여있는 빈 벤치는 은수의 가슴속 공허함을 표현하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걷던 길을 멈추고 은수는 온 길을 뒤 돌아보았다. 순간 얕은 신음이 은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 정말 아름답구나… 수채화가 따로 없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부담되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많이 익숙한 아름다움이었다.

11월의 양산팔경 금강 둘레길


 승천하려던 용이 목욕하는 선녀를 보느라 승천하지 못하고 강가에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8경 용암’ 앞을 지날 때 이곳이 1978년 제작된 영화 “소나기”의 촬영 장소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그 외에 ‘무녀도’ ‘양산도’ 등의 영화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느꼈던 익숙한 아름다움의 이유가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였다는 이야기의 ‘2경 강선대’에 올라갔다. 물과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삼합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한다. 가을 부슬비와 살짝 내려온 안개가 지금 당장이라도 선녀가 내려올 것 같은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가을날의 동화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11월의 금강 변이다.

양산팔경 중 6경 '여의정'(왼쪽)과 8경 '용암'(오른쪽)
양산팔경 중 2경 '강선대'(왼쪽)와 금강둘레길
금강둘레길 '봉곡교'에서 본 금강 상류


 #2.

  “은수야~ 시방 이 할매 어디 가는지 알지! 우리 은수 아프지 말라고 할매가 기도드리러 가닝께 할배 말 잘 듣고, 안성댁 아즈매 주는 거 잘 묵고 있어야 댄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은수는 9살 무렵 심하게 아파 이곳 영동에 내려와 일 년 가까이 지냈었다. 은수가 내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은수의 할머니는 은수에게 조금 전 말을 한 후 짐을 잔뜩 실은 지게를 진 아저씨와 함께 백화산에 있는 “반야사”로 백일기도를 드리러 들어갔다. 할머니의 정성 때문인지 그렇게 아프던 은수는 9살이 지난 후부터 아픈 곳 하나 없이 잘 컸다. 그런데 정작 은수는 자신을 위해 백일 정성을 들였던 할머니에게 돌아가실 때까지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못 했다. 그것이 가슴 밑바닥에 남아있었는지 나이가 들면서 할머니 생각이 자주 났다. 은수는 할머니가 은수를 위해 기도를 드렸던 반야사로 발길을 향했다.


 반야사로 가기 전 영동군 황간에서 전북 무주로 넘어가는 고갯길엘 먼저 들렸다. 해발 800m의 ‘도마령’이다. ‘말을 키우던 마을’ 혹은 ‘칼 찬 장수가 말을 타고 넘던 고개’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황갈색 잎으로 변한 나무들이 덮여 있는 구불구불 내려가는 길 너머로 겹겹이 산들 사이에 낀 안개. 11월 가을의 풍경은 왜 이렇게도 정겨운지…….

11월의 도마령


 문수보살을 상징하는 ‘반야’라는 이름이 붙여진 반야사는 조계종 법주사의 말사로서 신라 성덕왕 때 (728년) 세워진 천년고찰이다. 비 내리는 석천계곡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일주문이 나타났다. 일주문을 지나 나타난 반야사는 아담한 절이었다. 대웅전과 절이 한눈에 다 보였다. 절은 작았지만, 지세와 기운이 범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백화산에서 흘러내리는 큰 물줄기가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데 그 연꽃의 중심에 반야사가 있었다. 할머니께서 왜 이곳으로 백일기도를 오셨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과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신라와 백제계 석탑 양식이 섞여 있는 고려 시대 석탑인 삼층석탑은 보물 제1371호이며, 석탑 뒤의 배롱나무는 500년 된 나무라고 한다.

가을비 내리는 석천계곡(왼쪽)과 반야사 일주문(오른쪽)
석천계곡 다리(왼쪽)과 반야사 삼층석탑
반야사 전경


 대웅전을 지나 요사채와 템플스테이를 하는 방들이 있다. 전국에서 6곳만 선정되는 최우수 템플스테이 사찰로 반야사는 2014년, 2015년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체험형과 휴식형 두 가지로 운영한다고 하니 목적에 따라 힐링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야사는 조선 세조 임금이 문수동자를 만나 절 뒤쪽 석천 계곡에 있는 망경대 영천에서 목욕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절을 지나 낙엽 쌓인 계곡 길을 따라가다 보면 세조가 목욕한 영천이 나타나고 조금 더 올라가면 문수전이 있다. 은수는 자신을 위하여 이 계단을 올라갔던 할머니를 생각하며 가파른 절벽 위에 있는 문수전으로 올라갔다. 가을비가 더 세차게 내렸지만,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에 더욱 힘껏 발을 내디뎠다. 문수전에 올라 아래에 펼쳐진 풍광을 보면서 ‘할머니는 돌아가셔서도 이 아름다운 것을 은수에게 보여주려고 은수를 이곳까지 오게 하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그곳에 앉아 어렴풋이 생각나는 지난날 할머니와의 시간을 떠올렸다. 비 내리는 하늘 저편으로 은수를 향해 미소 짓는 할머니의 얼굴이 그려졌다.


 늦었지만 은수는 문수전 내부로 들어가 문수보살상에 할머니의 극락왕생을 빌며 큰절을 세 번 올렸다.

세조가 목욕한 영천(왼쪽)과 석천계곡 풍경(오른쪽)
절벽위 문수전 모습(왼쪽)과 문수전 올라가는 계단(오른쪽)
문수전에서 내려다 본 계곡 풍경


 #3.

 은수가 영동의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마지막으로 놀러 왔던 것은 대학 2학년 때였다. 같은 서클의 친구 희자와 함께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내려왔었다.


 “할아버지, 여기서 어디가 제일 좋아?”

 “뭐, 영동은 산 좋고 물 좋고 다 좋지…….”

 “아니, 나는 미술사 전공이잖아… 그리고 얘는 문학 전공하거든… 그러니까 우리 둘이서 같이 가볼만한 곳이 어디냐구?”  

 “그래… 그럼 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던 한천정사가 있는 한천팔경을 가보려무나…”


그렇게 한천팔경을 가게 된 두 사람은 그곳의 청초한 아름다움에 반해 초강천이 흐르는 하얀 백사장 위에서 소주를 몇 병을 마셨는지 모른다. 나중에는 취해서 두 사람이 껴안고 엉엉 울기까지 했었다.


 은수는 희자와의 추억이 서려 있는 월류봉으로 갔다. 광장에서 ‘달이 머무는 봉우리’라는 높이 400m의 월류봉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초강천은 깨끗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때는 백사장에도 들어갈 수 있었는데……’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선비의 기운과 기상 같은 정결하고 고고한 기운이 지금도 느껴져 좋았다. 송시열 선생이 서재로 글도 짖고 가르치기도 했던 한천정사로 갔다. 은수는 툇마루에 앉아 월류봉에 걸쳐 있는 달을 그려 보았다.

광장에서 본 월류봉(왼쪽)과 한천정사에서 본 초강천(오른쪽)
한천정사(왼쪽)과 한천정사 툇마루에 앉아 바라 본 월류봉(오른쪽)


 은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영동의 할아버지네 집은 은수 작은 아버지가 얼마 동안 사셨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작은 아버지네 식구도 서울로 올라오고, 영동 할아버지 집은 군에서 고택으로 관리를 하게 되었다. 은수는 기억을 되짚어 그 집을 찾아갔다.


 “영동 김참판 고택”은 17세기에 지어진 집으로 지금은 안사랑채만이 남아있다. 전형적인 사대부 집으로 주변의 환경을 건물에 조화시킨 것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는 마당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정원을 바라보며 툇마루에 앉아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뒷마당 장독대에서 장맛을 보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운 분들의 모습이다.

김찬판댁 안사랑채 앞마당(왼쪽)과 뒤편 정원(오른쪽)

 

 #4.

 영동에 재미있는 카페가 있다. ‘호구가 호감으로 꼴값을 하고 있다’는 다소 길고 독특한 이름의 사회적 기업 공동체 카페이다. 은수는 이 카페에서 차분하게 차를 한잔 마시며 여행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카페는 안에 들어서면서부터 독특한 인테리어들로 눈길을 끌었다. 메뉴도 꽃차, 발효차, 커피 등 다양하고 샌드위치와 빵 등 푸짐했다. 특히 팥과 호두가 잔뜩 들어가 있는 ‘호구빵’이 별미였다. 예쁜 카페에 앉아 예쁜 잔으로 차를 마시며 오늘 여행을 되돌아보았다. 다음번에는 아이들과 함께 영동에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에 가면 오랜만에 희자도 만나볼 계획이다.

카페 전경(왼쪽)과 촛불(오른쪽)
왼쪽부터 호구빵, 꽃차, 디저트 푸딩


 은수에게 11월의 영동 여행은 오래 전에 들었던 ‘박인희’가 부르는 ‘이사도라’나  평소에도 좋아하는 ‘케롤 키드’의 ‘When I Dream’이 지니고 있는 음색을 띤 수채화 여행이었다.




 O 송호관광지   영동군 양산면 송호로 105.   043) 740-3228    songhotour.yd21.go.kr:451/

 O 반야사          영동군 황간면 백화산로 652. 043) 742-4199    www.banyasa.com

 O 호구…호감   영동군 영동읍 화신로4.          010) 7740-9428

 O 영동김참판고택                                                                   http://tour.yd21.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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