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걱정 마, 내 인생이 원래 그랬잖아.

by 아리당스

'아주 밑바닥에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가?

가령 어릴 적 파도 한 번에 싹 사라져 버린 모래성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렸던 것처럼 말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지독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내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너무 막연해서 결과가 전혀 예상되지 않는 일. 그래, 그 일을 한번 해보자!


브랜드는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흔을 코앞에 둔 내가 굳이 그동안의 경력과 무관한 일을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하려니 솔직히 두려웠다.

마침 유튜브 알고리즘에 40살 넘어 사업 성공하는 사람들 특징은 '그동안의 경력과 완전 다른 도전을 하지 않는 것'이라 말하는 쇼츠가 떴다.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실패할 거라 말하는 것 같아 그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멍하니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뒤숭숭한 마음을 다잡게 해 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경력과 관련된 일을 다시 찾아보고자 그동안의 내 삶을 되돌아보다가 발견한 나의 지난 굵직한 선택들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매일 밤, 어두운 방이 무서워 침대 스탠드 불빛 아래 책을 펼치곤 했는데, 책 속의 흥미로운 세계는 금세 두려움을 잊게 해 주었다. 그 시간들이 쌓여 내게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글쓰기 대회에서도 종종 수상을 하곤 했던 나는 장래희망 칸에 카피라이터라고 적었다. 그때는 아마도 멋있어 보이는 직업 이름을 골라 썼을 테지만 어쨌든 커서 글 쓰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나는 자라면서 언어보다는 수학에 흥미를 더 갖게 되었고 대학전공으로 건설공학을 택했다. 블록놀이, 퍼즐 맞추기 같은 걸 좋아하니까 설계 일을 하면 재밌게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한 선택이었다. 전공공부는 재밌었지만 업계 문화는 잘 맞지 않았다. 몇 번의 현장실습을 마친 후 복수전공을 결심했다.


복수전공은 금융공학이었다. 경영학, 경제학, 수학, 컴퓨터공학, 이렇게 4개의 학과가 협력하여 만든 융합전공으로 학부가 있는 대학은 거의 없고 대학원 진학이 필수인 전공이었다. 본전공 교수님들은 나를 볼 때마다 왜 그렇게 생뚱맞은 복수전공을 하냐고 놀리셨지만 나는 진심이었다(그 당시 본전공 교수님들은 내가 복수전공이름을 말해도 뭐 하는 과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셨다. 그 정도로 의외의 선택이었다).


학부 복수전공을 마치고 대학원을 진학해 보니 금융공학의 베이스가 되는 수학과 경영학 학부생 출신들이 동기생의 대부분이었다. 복수전공을 하긴 했지만 건설공학 출신인 날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 실제로 학부에서 관련 전공을 했던 동기생들은 프리패스 과목이 몇 개는 있었지만 나는 4개의 전공과목을 다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석사시절은 진짜 딱 죽겠다 싶을 때까지 공부했던 것 같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전공으로 바꿨던 선택의 대가는 가혹했다. 하지만 다행히 졸업은 과수석으로 마무리했다.


대학원 성적이 좋았고 연구도 적성에 잘 맞았던 나는 학계에 남기로 결심하고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 당시 학교에서 벌어졌던 파벌싸움, 지도교수님의 안식년등이 내 개인사와 겹쳐서 돌연 취업을 결심하게 된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첫 취업을 했고 남들보다 늦었던 만큼 쉽지 않았지만 이 역시 아등바등 애쓰며 나의 삼십 대를 직장생활로 가득 채웠다.




그러니까 난 인생을 살면서 뭐 하나 쉽게 예상되는 선택을 한 적이 없었다.

글을 좋아하던 어린이였는데 이과를 선택해 대학은 공대로 진학했고, 건설전공이 갑자기 전혀 상관없는 금융공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학계에 남으려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순간에 취직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멀쩡히 증권사 잘 다니다가 갑자기 그동안의 인생과 상관없는 브랜드 론칭을 준비하려고 한다.


나의 선택을 알게 된 주변인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응?? 네가 뭘 한다고?? 진심이야?"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어릴 적부터 해온 수차례의 생뚱맞은 선택 중 그 어느 것 하나 진심이 아닌 건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 당연히 두렵고 당연히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고 내 인생에서만 본다면 지금의 나의 선택은 오히려 크게 이상할 게 없다. 내가 만들어온 길에서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동안 잘해왔던 만큼 이번에도 잘 해낼 거라 믿는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거, 한두 번 해보는 거 아니잖아?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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