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면 상담만 열 곳이 넘어가니 전문가의 숨소리만 들어도 그가 그리는 견적서가 예상되었다. 무작정 받은 턴키 견적서만 스무 장. 걸레받이, 몰딩, 코킹, 문선, 샌딩, 움푹, T5... 처음에는 낯선 단어들도 폐 안 가득 공기가 퍼지듯 피부에 스며들었다. 실크 도배지여도 브랜드마다 라인업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인 세계. 까닭에 클라이언트의 주문에 따라 견적은 '0'이 하나 더 붙을 수도, '0'이 하나 더 빠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옷을 하나를 사더라도 오프라인 상점 이곳저곳 들락거리다가 종국에 스마트폰에서 프로모션이 좋은 '가성비' 제품을 사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런 측면에서 '인테리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백화점에서 코끝부터 우아한 향취에 젖어 달콤한 말들로 속삭이는 직원의 대접을 받으며 공주가 된 듯 뽐내며 사는 옷과 스마트폰 스크롤을 끝까지 내려가며 어깨결림과 맞바꾼 최저가 옷. 그 중간 언저리에는 아울렛과 백화점 매대 이월상품도 있을 것이다. 제품을 사달라고 애원하는 직원들과 화려한 매장 사이에 언제나 선택은 소비자의 몫인 것처럼, 인테리어도 쇼핑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세 번째 인테리어를 앞두고 깨달았다.
인테리어의 '인'자도 몰랐다면 '턴키'에 맞기는 것이 속편 했을 수도. 알수록 파고들게 되고, 고쳐야 할 집은 턴키 실장님의 집이 아닌 내 집이 아니던가. "인테리어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라는 물음에 그저, "... 음... 깔끔하게, 요즘 트렌드에 맞춰서요?"라는 두리뭉실한 대답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가격도 공간도 천지차이일뿐더러 그렇게 고친 집은 '내가 추구하는 집'이 아닌, '턴키 실장님 취향'을 한껏 반영한 공간이리라.
합지가 저렴하고 건강에 덜 나쁘다지만 관리가 여간 쉽지 않고 멋스럽지 못하다. 요즘 대세인 디아망은 그 명성대로 질감이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베스띠보다 1.5배 비용을 지불할 만큼 절대적인 가치가 되지 못했다. 무몰딩과 9mm 문선은 공간을 깔끔하고 더 넓어 보이게 하지만 마감이 나쁜 현장이 당첨될 경우 시공비가 월등히 높아지거나 시공 자체가 불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케라폭시나 무몰딩은 시공자의 숙련도에 따라 하자가 발생할 수 있는 비율도 높았다. 장판은 발을 편안하게 해 주고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방에서 저 방으로 자주 가구를 옮겨 다니는 주거인을 만난다면 바닥의 수명은 길어야 2년 남짓일 것이다.
나라마다 미의 기준이 다르듯, 시대에 따라 미인의 형태가 다르듯 인테리어도 그랬다. '예쁜 집'은 어제와 오늘이 달랐고, 예쁘기만 한 집은 사용자들의 편의성이 떨어질 수도, 엄청난 지출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었다. 인테리어, 어떤 시공자를 만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나의 '취향'과 '예산'을 정해두어야 했다.
93년 준공한 서른세 살의 구축 아파트, 방 3개 달린 36평형, 발코니가 드넓은 비확장형, 외창호를 교체하였지만 새시가 다 가라앉아 있었던, 분배기라는 트롤이 거실 중앙에 존재하는 집. 재건축 선도지구로 지정되었어도 사는 날까지 우리의 베이스캠프가 되기를. 방 4개의 신축 아파트에서 구축으로 둥지를 옮겨도 그 괴리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의 공간감과 안락함. 초등학생 삼 남매가 건강하고 무탈하게 자라날 공간. 고양이 두 마리와 강아지 한 마리가 평온하게 지낼 터전. 무엇보다 우리 부부가 해로하는 보금자리가 되기를.
숨어있는 고수보다, 눈부신 오늘의 집보다, 무조건 최저가에 맞춰주는 업체보다, 성실하면서 소통이 잘 되는 그런 시공자를 만나고 싶었다. 대면 미팅만 서른 번 남짓 가졌다. 하루에 다섯 팀을 만나기도 했고, 경쟁 업체 간 공실 현장에서 부딪히는 민망한 순간도 더러 있었다. 나름 합리적인 '올수리'라고 판단하며 발품 손품 팔던 찰나에 '이 정도 공사는 하지 않는다'며 상담조차 거부하는 업체도 있었다.
예산은 3천5백만 원. 분배기 이전 시공과 창호 교체라는 큰 공사를 포함한 가격이니 욕실은 변기와 수전만 교체할 작정이었다. 수십여 개 업체에게 '욕실은 액세서리(ACC)만 교체할 거라는' 계획안을 들이밀면서도, 내심 욕실 인테리어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까닭에 화장실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나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신호 대기 중 허름한 트럭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욕실 올수리 전문 010-0000-0000"
무작정 트럭에 기재된 번호로 전화를 하고 공사 중인 현장에 직접 찾아갔다. 트럭 운전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구축아파트 올수리를 하고 있었고 입소문으로 해당 아파트 단지 인테리어는 대부분 그의 팀들이 다 하고 있었다. 불쑥 찾아간 곳, 그곳에서 날것의 현장을 볼 수 있어 좋았고, 내가 원한다면 욕실팀과 함께 공사를 진행하는 싱크대팀, 목공팀 등을 선별할 수 있었다. 문제는 '견적서'였다. 어느 분야든 전문가를 만날 때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나이가 있다. 그 분야에서 몸을 충분히 적실만큼의 연륜이 묻어나지만 트렌드는 겸비하면서 신체가 건강한 나이. 트럭 운전사였던 욕실 사장님은 해당 분야에 충분히 몸을 담고 계셨고, 노장에 비해 트렌드 했지만 요즘 추세인 '복잡한 견적서'는 작성하실 줄 몰랐다. 그도 자신의 약점을 아는지 "요즘 인테리어 견적서 A4 용지 몇 장을 넘어가더라고요. 우리는 돋보기 끼고 그거 들여다보는 데만 해도 한 참이 걸려요. 우리는 자신 있어요. 가장 마음에 드는 견적서 가져오시면 그것보다 잘해드릴 수 있어요."
대면 상담에서 3D 도면으로 즉각 나의 의견을 반영해 주던 A 업체, 창호교체와 분배기 이전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올수리 2천만 원이라는 최저 금액을 내밀던 B 업체, 대면 미팅 후 관리사무소에 직접 내력벽을 체크해 가며 현장을 두어 번 방문하는 등 열정을 쏟아부은 C 업체, 그리고 견적서도 쓸 줄 모르는 D 업체. 120개의 견적서 중 굵은 뼈대를 추려봤다.
결과물이 가장 좋을 것 같던 A 업체는 그가 거느리고 있는 직원 수만큼 뒤에서 빠지는 돈이 많을 것 같았다. 가격 때문에 흔들렸던 B업체는 천장이 낮아 실링팬 시공이 안된다, 분배기 이전 시공은 위험해서 안된다는 등의 소통이 아쉬웠다. 열정적이었던 C 업체는 과도한 계약금과 중도금에서 신뢰를 잃었다.
나만의 '드림팀'은 120개 견적서에 없었다. 비록 견적서 작성은 서투르더라도 내 취향과 예산을 존중하는 트럭 운전사, 매일 전화로 그날의 작업 보고를 하는 욕실 사장님, 계약금도 받지 않고 공사를 시작했던 D 업체. 무엇보다 직접 현장에 몸담으며 긴 세월 누적되었을 팀 간 콜라보가 좋아 보였다. 그렇게 숨은 고수를 예상치 못한 길거리에서 찾은 것이다.
D업체와 발품 팔아 찾은 마루, 필름, 전기, 그리고 난방 담당자 그들과 4주간 부딪히며 새로 만든 터전을 기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