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좋은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물론 돈에 빠삭한 사람이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흑과백만 존재하는 세상은 아니니까.
욕실 사장님은 공사 예정일 하루 전, 입주민 동의를 마치고 엘리베이터 보양까지 끝내두셨다. 그리고 약속한 당일, 아무 일 없다는 듯 예정대로 철거가 시작됐다. 계좌번호는 커녕 계약금이 몇 퍼센트인지조차 언급되지 않았던 터라, 나는 그저 넋놓고 지켜볼 뿐이었다.
당연한 순리를 거스르는 그들의 작업 현장에서 묘한 감동이 스몄다. 철거가 혼자 하는 작업일 리 없고, 공사를 하려면 자재도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던가. 그 많은 자재와 인건비를 부러 클라이언트에게 먼저 요구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시작하는 그 그림자에서 신뢰라는 감정만 켜켜이 쌓였다.
내가 먼저 사정하듯 계약서를 요청했고, 공사 예정일을 사흘 앞두고 현장에서 세 번째 미팅을 가졌다. 욕실 사장님, 그의 파트너 목공 사장님, 늘 그들과 함께하는 싱크대 사장님. 현장과 사무실 간 거리가 20km 남짓으로 결코 가깝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공사 전 무려 세 번이나 현장을 찾았다. 돈 이야기에는 유독 무심해 보였지만, 현장에 서 있는 그들의 눈빛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매서웠다.
냉장고 위치로 고민하던 중, 해당 아파트에서는 보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제안받기도 했다. 답이 없었던 공간에 머리 네 개가 모이니 생각보다 수월하게 답이 나왔던 것이다. 다만 설비 비용이 부담돼 한사코 고개를 저었는데, 뜻밖에도 '설비 서비스'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으셨다.
발코니 단열은 물론 화장실 턱 올림까지. 예산 때문에 포기할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혹은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세밀한 공정들이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는 당연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현장에서 곧바로 서로의 공정을 맞춰보며 계획안을 수정했고 그중 욕실 사장님은 유독 너스레를 보이셨다. "OO아, 너 이거 얼마에 할거야? 조금 싸게해줘. 주인님이 돈이 많이 없으시대".
물론,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턴키로 진행했다면 공사 시작일과 종료일만 알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반셀프 인테리어는 다르다. 공정의 흐름부터 이해해야 했다. 시공자마다 차이는 있으나 우리집 공정 순서는 아래와 같았다.
1. 입주민 동의서 및 엘리베이터 보양
2. 전체 철거
3. 설비
4. 창호 및 전기 배선
5. 미장 및 방수
6. 목공 및 중문
7. 전기 배선
8. 타일
9. 화장실 acc 설치 (마지막에 해도 무관)
10. 도장(페인트)
11. 필름
12. 주방 및 붙박이 가구
13. 걸레받이
14. 벽지
15. 바닥
16. 스위치, 콘센트, 도어락, 비디오폰 설치
17. 입주 청소
18. 최종 점검
처음 반셀프를 계획할 때는 입주민 동의서도 직접 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소 파격적인 견적과 '사람 좋음'이라는 감정에 기댄채 대부분의 공정을 그들의 손에 맡기게 됐다. 그 바람에 미리 자필로 써두었던 입주민께 전할 편지도 건내지 못한 채, 매캐한 분진과 '드르륵' 소음이 시작된 것이다.
경험상 구축 아파트 입주민들은 대체로 배려와 이해의 폭이 넓었다. 그럼에도 참기 어려운 소음은 분명 존재하리라. 창호 교체가 있던 날, 소음이 가장 컸고 결국 윗집에서 찾아오셨다. 내가 부재중이었던 그 시각 욕실 사장님은 연륜이 묻어나는 말투로 상황을 잘 수습해 주셨다.
늦게나마 작은 선물과 손편지를 준비해 입주민들께 전달했고, 그 이후로 찾아오는 주민은 없었다. 오히려 "편하게 공사하세요"라는 배려 깊은 인사가 돌아왔다.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가능하다면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기 전, 직접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편이 좋다.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은 운이지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좋은 이웃을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공동주택에 사는 우리는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작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작은 배려와 따뜻한 말 한마디는 눈덩이처럼 커져 더 큰 이해로 돌아온다. 피해를 주기 전 건네는 짧은 인사 하나가, 공동 주택에서의 삶을 제법 평안하게 만든다.
철거 비용은 열다섯 군데를 발품 팔아 받은 견적보다 욕실 사장님의 금액이 더 저렴했다. 철거는 비교적 난도가 낮은 공정이기에, 가능하면 비용을 아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자연스럽게 욕실 사장님께 철거를 부탁드렸다. '사람 좋은' 욕실 사장님은 철거뿐 아니라 다른 공정에서 발생한 폐기물까지 직접 처리해 주는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셨다.
가능하면 하루 한 번은 꼭 현장에 들렀다. 별다른 일 없이 돌아오는 날도 더러 있었지만 직접 현장에 개입해 샤워 수전의 위치를 조정하고, 메지 색을 고르고, 가벽 길이를 논의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물론 빈 손으로 간 적은 없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우리 집을 만들어 주는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약소하게 그날의 간식을 챙겼다.
공사가 시작된 지 몇일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욕실 사장님이 결국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유, 그만 사와요. 뭘 자꾸 이렇게 사 와. 먹을 거 많아요."
창호가 설치되던 날(철거일로부터 5일이 지났다.) 현장에 들렀다 귀가하던 내 뒤통수에 욕실 사장님은 말끝을 흐리셨다. "오늘... 돈 조금만 주세요. 많이 주면 좋고요."
당연히 받아야 할 계약금조차 받지 않으셨던 분이라, 그 말 한마디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먼저 드렸어야 했을까. 귀갓길에 공사 금액의 30퍼센트에 해당하는 금액을 송금했다. 잠시 후 도착한 메세지. "확인했읍니다."
짧고 투박한 그 한 문장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까지도 잔잔하게 여운이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