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비 : 판도라의 상자, 분배기 이동

전문가가 극구 말리던 공사, 과연 잘한 일일까?

by 아리스

인테리어 공사에서 철거 다음으로 진행되는 시공은 바로 '설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집의 생명줄을 잇는 작업. 이번 리모델링은 '가성비 인테리어'에 초점을 맞췄던 터라 욕실 두 곳을 모두 덧방(타일 위에 덧붙이는 시공)으로 계획하며 설비 공사에 대한 예산을 십분 아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설비의 덫이 발목을 잡았다. 공사 직전, 주방에 냉장고 위치가 없다는 사실에 막바지에 들어서 아일랜드 상판을 잘라 냉장고 자리를 만들었다. 그 결과, 냉장고와 수전 간 거리가 30cm도 채 되지 않는 비좁은 동선이 탄생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방 사장님은 '두고두고 불편할 동선'이라고 만류하셨다. 그러나 나의 예산 시나리오에 더 이상의 추가 비용은 없었다. 까닭에 '이거 설비 들어가야 되잖아요. 예산을 최대한 아껴야 해서요. 그냥 사용할게요.' 라며 앞으로 닥칠 '불편할 동선'을 기꺼이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그때 욕실 사장님 입에서 나온 말은 '설비 서비스'. 서비스가 웬 말인가. 파격적인 제안에 공사를 진행했고, 욕실팀에서 진행한 주방 설비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나는 인복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분배기. 거실 한편에 자기주장을 한껏 내세우는 분배기가 나는 왜 그렇게 미웠을까. 집을 처음 둘러보기 전부터 아트월에 목공 작업으로 TV를 매립형으로 거치하고 싶었다. 세부적인 계획안을 작성하기 전부터 품고 있던 큰 틀은 이거 하나. 그러나 분배기가 거실에 떡하니 버티고 있을 경우, 이 계획은 송두리째 무너지는 셈이니 분배기를 치워야 했다.


분배기 관련 비용 총계 3,190,000원

-세부항목-
분배기 교체 600,000원
분배기 이동 1,200,000원
가지관 교체 500,000원
하니웰 조절기 4세트 680,000원
구동기 2개 80,000원


공사 진행 전, 다른 인테리어 실장님과 상담을 했을 당시 분배기 이동은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라며 극구 권장하지 않는다는 말이 거슬렸다. 내가 발품 팔아 찾아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생각보다 예산을 많이 잡아먹는 시공도 아니었다. 분배기 이동 시공 가격만 따지면 120만 원. '가성비 인테리어'를 내세우는 나였지만, 그 정도 값은 도배지를 아껴서라도 할 수 있는 '가치 소비'라고 판단했다.


일전의 ubr 욕실 2개소 철거처럼, 시나리오에 없던 분배기 공사에 3백만 원이 들어가니 속이 쓰리긴 했다. 그러나 분배기와 가지관 교체는 30년 구축 아파트라는 특성에 따라 '선택이 아닌 필수'로 해야 할 시공 중 하나였다. 온도조절기는 무광의 은근한 실버를 뽐내는 니켈 재질을 봐왔지만, 분배기와 호환되는 제품은 유광의 화이트 제품 하나였다.



이제 분배기 위치를 정해야 했다. 처음부터 나는 침실 2개 사이 공간, 일명 '데드 스페이스(Dead Space)'라 불리는 이곳에 두고 싶었다. 직선 간 거리는 가까워도 분배기 배선은 곡선으로 이동해야 하니 2미터 남짓 이동할 예정이었다. 발품을 팔고 팔아 시공자를 선택했으니 결과는 만족할 수밖에.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를 성황리에 이동했다고 생각했으나, 공사가 끝나자마자 두 가지의 '골칫거리'가 따라왔다.


첫 번째는 바로 '분배기장'이었다. 데드스페이스 공간을 반수납장의 빌트인 형태로 그림을 그렸던 나의 계획이 무색할 정도로, 분배기장을 옮기고 나니 큰 허들이 보였다. 이동한 분배기 벽체를 수납장으로 설치할 경우, 안방 맞은편의 침실 출입이 매우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안방에 비해 맞은편 침실 방문과 벽면의 깊이는 얕았던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고민을 거듭해도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고, 결국 분배기에 알맞은 '기성 가구'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빌트인의 미학은 쉽게 무너져버렸다.


두 번째는 바로 '전기포설'이었다. 분배기에도 전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분배기 설치 전, 전기 사장님과 현장 미팅 때 나는 분배기 이동 위치에 나의 사심을 채우기 위해 전기 포설을 희망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을 철회한 까닭은 바로 '비용'이었던 것. 그러나 분배기를 이동하고 난 뒤, 분배기 구동에도 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서 전기 사장님의 공사는 복잡해졌고, 공사 비용도 늘어나게 될 작정이었다.





왜 전문가들은 사전에 얘기하지 않았을까. 다들 공사를 따기 위해 클라이언트에게 '꼬리'만 치고 있었던 것인가. 수많은 전문가를 현장에서 만났지만, 이 문제점을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어 덮을 수도 없는 일. 받아들여야 했다.


전기포설은 돈이 해결해 주지만, 미관상 아쉬운 부분은 속이 매우 쓰렸다. 비대칭형 오브제 가구도 아니고, 이러려고 여기에 3백만 원을 들인 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애써 공간을 활용해 보고자 머리를 이리저리 굴린다. 와중에 위로가 되는 건, 이 공간에 전기가 포설되어 기존에 계획했던 블루투스 스피커와 전기 캔들을 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반셀프의 고충이 바로 이런 점이다. 총괄 책임자가 없다 보니, 다들 나 몰라라 하고 큰 틀에서 디자인과 계획을 반영하는 사람이 '나'인데 정작 나라는 사람은 이 분야에 문외한 아니던가. 내가 지금 며칠 바짝 공부해도 세밀한 공정들까지 다 알아차리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 모든 시행착오와 쓰린 속은 결국 '나만의 집'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일부일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대가로 얻은 것은, 거실 한복판을 차지하던 분배기 대신 깔끔한 벽면과, 블루투스 스피커를 놓을 수 있는 '뜻밖의 전기 포설'이라는 작은 위안이었다.


설비 다음은 목공 작업. 중문, 두 개의 가벽, 그리고 포기할 수 없었던 아트월과 천장 내림까지. '드림팀'을 찾아 나섰던 여정만큼이나 목공팀과의 협업은 또다른 고난과 환희의 서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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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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