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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Sep 21. 2023

마법에 걸린 날

오늘의 소박한 행복

  기나긴 등반에서 목적지 그 자체보다 여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던 것처럼, 나는 이제 삶을 재촉하기보다는 하루하루 순간들을 만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_<마음이 흐르는 대로> 중


 새벽 공기가 싸늘해서 열어두었던 창문을 빼꼼히 닫는다. 이불을 칭칭 감고 다시 눕는다.  잠이 오지 않아서 작은 스탠드 조명을 켜고 엎드렸다. 시계는 오전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머리가 맑다. 어제 일찍 잠들었던 탓이다. 읽고 있던 책을 읽어 내려간다. 옆에서 달콤한 숨소리를 풍기는 아이들은 꿈나라에 한창이다. 아이들이 깰 까봐 책장을 조심히 넘기며 읽는다. 아이들이 깨기 전 읽던 책을 다 읽었다. [미래의 교육, 올린] 책은 2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이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깨기 전에 완독 해서 기분이 더욱 좋았다. 왠지 모르게 오늘은 내내 기분이 그럴 것 같다.


 그러고 보니, 3호가 곧잘 유치원에 다녀온다. 매일 아침 가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3호를 보고선 아직은 사회 생활할 때가 아닌 것 같아 "퇴원신청서"를 담임교사에게 부탁했었다. 그 뒤로 신기하게도 3호는 유치원에 가기 싫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담임교사의 태도가 바뀐 게 분명했다. 아무렴 어때, 3호가 "아직은" 유치원에 잘 적응해 나가서 다행이다. 오늘이 목요일이니 4일 연속 등원한 것도 입학한 이례로 처음이다. 3호가 등원을 힘들어할 때면 언제든 돌아올 품을 남겨두었기에, 3호가 등원한 날이면 집으로 빈 킥보드를 끌고 오면서 오늘의 계획을 세운다.


  곧 만료될 스타벅스 기프티콘이 있어서 카페로 향했다. 맥북, 빈 텀블러, 전자책, 메모장, 그리고 최근 완독한 책 두 권을 서둘러 챙기고 나갔다. 스타벅스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가 갓 지났지만, 이미 좋은 자리는 노트북을 들고 온 사람들이 선점했다. 그들은 뭐 하는 사람일까? 일주일에 한 번은 들르다 보니, 제법 눈에 익는 사람들도 보였다. 재택 근무 하는 사람일까, 개미일까...

 나는 간헐적 단식 중이기에 라떼 두 잔의 기프티콘은 너무 큰 값이었다. 늘 마시는 톨사이즈 핫 아메리카노와 아이들 하교 후 간식으로 줄 미키 딜라이트 티라미수를 테이크아웃했다. 가지고 간 텀블러로 할인도 받고 기프티콘으로 아이들 간식도 사니 뭔가 알찬 씀씀이를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내가 카페에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뒤에서 누군가 바라보는 것이 싫다. 다들 그런 걸까. 콘센트가 있고 벽면에 벤치형으로 달린 의자 테이블은 자리가 거의 찼다. 3층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가 있어서 그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전에도 책을 읽기도 했고, 공신력이 그다지 없는 민간 자격증의 강의를 듣기도 했던 자리다. 집중이 잘 되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 자리는 좋은 느낌이었다.


  보온력이 상당한 스탠리 텀블러에 담긴 핫 아메리카노는 두세 시간이 지난 뒤에도 따뜻해서 좋았다. 한 여름 야외활동을 할 때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담은 스탠리 텀블러는 아주 오래도록 얼음이 남아있어서 어딜 가나 꼭 데려가는 아이템이다.


  읽었던 책을 정리하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벌써 시간이 자정 무렵이 되었다. 내가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옆자리의 여성분이 내가 두고 간 전자책을 건네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집에 와서 보니 책갈피로 사용하던 포스트잇 플래그 분류용 필름이 없어져서 속상했다. 지난번에도 그곳에 두고 가서 새로 샀었는데, 다음부터 잘 챙겨야겠다. 전자책이나 더 값진 걸 잃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니 속상했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어제 내내 내렸던 비로 산책을 못했던 라떼를 데리고 나왔다. 최고 기온 24도인 오늘은 완연한 가을 기온 같았다. 반팔을 입고 간 아이들이 추울 것 같아 하원할 때 얇은 외투를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아는 사람을 만날 까봐 옆 단지로 가서 산책을 했다. 자정의 아파트 단지는 한적하고, 평온하다. 한가로이 산책을 마치고, 킥보드 두 대와 얇을 외투를 가지고 아이들을 데리러 나왔다. 나의 4시간이 끝났다.


 시간이 아까워 점심을 거른다. 간헐적 단식을 일 년간 하고 있었는데, 이 참에 시간을 늘려보려고 아침과 점심을 걸러 본다. 내 컨디션에 따라 점심을 먹고 안 먹고는 들쭉 날쭉이지만, 시간도 벌고, 돈도 아끼고, 건강도 챙기는 여러 가지 장점이 많은 다이어트 방법이다.


  환절기에 피부 습진으로 고생하는 2호를 보니 마음이 쓰인다. 먹거리제공에 더 신경 쓰는 요즈음이다. 오늘도 그랬다. 송산포도 한 송이와 기정떡을 오후 간식으로 주니 맛있다고 양볼 가득 넣어서 먹는다. 저녁에는 초당순두부에 브로콜리, 견과류 멸치볶음, 그리고 메추리알 장조림을 차려주었다. 예상했던 바, 2호는 초당순두부만 두 그릇을 먹었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어 곧 습진이 없어질 것 같은 좋은 예감이다.


 이틀 전 길고양이의 새끼를 데려왔다. 아이들이 "커피"라고 지어줬다. 내 손바닥만 한 녀석이 어리광을 부린다. 그 애교에 녹아내린다. 참 예쁘다. 아직은 서먹한 "라떼"와도 조금 더 간격이 좁아진 것 같아 그들만의 밝은 미래가 보인다.


 마법에 걸리니, 기분이 한결 괜찮아진다. 지난 이틀간 기분이 내려앉아서 안 좋았는데 이게 다 마법 때문이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내일은 라떼와 커피의 간격이 더 좁아지길 바라며 내일도 그 모든 게 오늘만 같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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